러시아

소생러시아 3학기 7주차(4/23) 공지

작성자
정옥
작성일
2020-04-17 20:13
조회
138
소생러시아 3학기 7주차(4/23) 공지

총선을 치른 다음 날이라 그런지 오신 선생님들이 모두 전날 개표 관람기를 잔뜩 쏟아 내셨어요. 아쉬움과 기쁨과 우려가 섞인 말씀들이었죠. 그런데 오늘은 또 6년 전 아픈 기억이 있는 날이기도 하네요. 어떤 것을 말함으로써 어떤 것은 배제되는 것인가 봅니다.  해마다  16일이면 비가 왔던 것 같은데, 화창하게 맑은 날이라 새로운 기운이 들었나 싶기도 하네요.

이번 주 공통 텍스트는 발리바르의 <<맑스주의의 역사>> 중 <사회주의와 맑스주의>에 대한 논문을 읽었습니다. 지난주부터 발리바르의 논문들을 읽고 있는데, 논지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아 고전하고 있어요. 그래도 맑스의 사상을 확장해 다른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는 부분에서 즐겁게 읽고는(만) 있습니다;; 소생팀들은 팀별 편차는 있지만, 공부를 자신의 문제들과 융합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혁명’이라는 주제가 다른 사유들과 접목되어 나가는데, 단초가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번 주도 마찬가지로 오전에 조별 토론을 하고, 좋은 날씨를 핑계 삼아 긴 산책을 했어요. 겉옷을 벗어야 할 만큼 화창한 길을 함께 걷는 재미가 있었어요. 정규 수업이 이제 2주를 남기고 있고 마지막 주는 채운샘의 강의와 주제 글에 대한 프로포절을 발표해야 해서 사실 다음 주까지 대략의 아이디어가 나와야 하는데, 쩜쩜쩜... 나올겁니다.

이후 일정 소략

일단 4월 30일까지 3학기가 끝나면 2주 방학을 하고, 각 조별로 10주 정도 세미나를 하며 공부를 더 해나가기로 했습니다. 5월 21일에 시작하면 대략 7월까지 갈 것 같아요. 8월 한 달 방학을 가질건데, 그때, 코로나 상황을 봐가면서 다음 일정을 다시 조율하거나 공부한 걸 발표 하는 시간을 가지거나 할 예정입니다. 세미나는 지금과 같은 시간에 시작을 할 거고, 오후 시간엔 그간 텍스트에 밀려 하지 못했던 것들, 등산 영화보기, 긴 산책, 운동, 특히 회식 등 가능한 것으로 활용해 보자는 안이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코로나 사태는 모두에게 새로운 상황을 경험하게 하고 있습니다. 불안정과 우발성 속에서도 동의하고 함께 고민하며, 즐거이 참여해주시는 선생님들 덕분에 프로그램에 대한 다양한 提示도 가능한 것 같습니다. 가는 데까지 함께 쭉 가보도록 해요.

 

 날이 좋아 처음으로 멀리 산책을 나가봤어요. 언덕길과 계단길을 따라 돌아 왔어요. 벌써 반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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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와 맑스주의

이번에 읽은 발리바르의 논문은 <사회주의와 맑스주의>입니다. 발리바르는 이 논문이 하나의 대답을 향해 달리는 콜로키움의 선형적 도식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시작했다고 밝힙니다. 그의 사상이 맑스를 경유해 그의 스승인 일튀세르를 거쳐 다시 발리바르 자신의 언어로 정리되고 있어, 맥락을 따라 토론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발리바르는 인간의 조건이 이미 정치 안에 있다고 전제합니다.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존재하는 인간은 없다고 보죠. 그래서 사회주의를 맑스의 역사변증법에 의거해 자본주의를 넘어 도달할 하나의 지향점으로 보는, 즉 ‘이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사회주의는 18세기 근대 자본주의 아래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는 자유주의 사상과 혁명에 반대하는 보수주의 사상이 태동한 이후 19세기 맑스에 의해 제기된 사상입니다. 사회주의를 맑스 사상의 계승으로 보는 흐름이 있었던 것이죠. 그렇기에 사회주의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문제들과 함께 사유해야 합니다. 상하부 구조의 문제뿐만 아니라, 생산력의 재생산 문제, 생산관계의 재생산 문제 등과 떨어져 생각할 수 없는 것이죠. 생산력은 노동력의 재생산을 포함하고 있죠. 노동력은 경제의 문제뿐 아니라, 경제 바깥의 문제, 교육 제도나 지배 이데올로기에 종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주의 근대성의 특수한 문제들, ‘지식성(육체 노동과 지식노동의 분할), 가족과 성적 차이의 문제들(피착취자임에도 부르조아적 가부장제에 귀속), 식민지화와 반식민지화(문화, 인종주의의 문제)에 대한 문제들’을 상정합니다. 사회주의는 이런 문제들과 대립해 존재해 왔고, 그런 한에서 근대성을 벗어나기 어렵다고 보고 있습니다. 발리바르는 다른 이데올로기와 맺는 관계에 더 주목하며 ‘동시대성’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발리바르는 맑스주의는 이와 다르다고 말합니다. 어려운 개념이라 저희가 토의한 만큼만 풀어보겠습니다. 발리바르는 맑스주의를 ‘모순’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해석하는데요. 이때의 모순은 헤겔식의 정-반 이후에 ‘합’이라는 본질을 지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순을 구체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는 모순이 전개되는 상항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 상황을 발리바르는 구조라고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모순을 구조 속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외적 조건만을 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경우 모순은 본질이 되고 상황들은 그러한 본질의 외적 조건 또는 외양등으로 단순하게 사고되기 때문이지요. 모순과 구조 사이의 관계를 본다면, 모순은 구조 속에서만 식별되고 작동되는 관계가 됩니다. 모순은 자신이 그 속에서 작동하는 사회 전체의 구조와 분리될 수 없으며, 자신의 존재 조건의 외양과도 분리되지 않d며, 오히려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들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럼 구조가 외양만이 아니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 때 등장하는 것이 알튀세르의 개념인 ‘과잉결정’이라는 어려운 말인 것 같습니다. 과잉이라는 단어 때문에 더 헷갈리기도 하는 말인데요. ‘자본-노동의 모순은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이 모순은 자신이 그 속에서 작동하는 구체적인 역사적인 정황과 형태에 의해 항상 특수화 된’다는 것으로, 국가 지배적 이데올로기, 종교등의 상부 구조와 내 외적 역사적 상황, 풍속, 전통, 정치 투쟁의 스타일 등에도 영향을 받는다고 봅니다 (알튀세르, 맑스를 위하여188-193 참조) 많은 복합적 요인들이 작동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과잉결정을 구성하는 요소는, 항상 이미 주어진 구조화된 복합체가 전제되어 있고, 이것이 지배요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미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 선험적으로 본질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의 복합체라는 의미로, 하나의 의미로 환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노동자의 생활은 크게 두 가지로 결정되지요. 하나는 노동이고, 다른 하나는 생존 조건, 노동력의 재생산, 도시화, 생활 양식 등등이 노동 환경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노동자 계급의 계급성의 통일과 사회적 변혁으로서의 경향은 처음부터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경향은 차별적 문제들과 차별적 사회 집단, 또는 조건이라고 해야 맞을까요? 그런 것들이 융합된 안에서 구축되게 되는 것이죠. 알튀세르는 이것을 ‘과잉결정’이라고 부른 것 같습니다. 모든 모순은 사회적 구성요소의 과잉결정에 의해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구조도 고정항이 아닌 것이고, 이 안에서 발생하는 모순 역시 모순이 실존을 규정하지만 실존 조건이 모순을 발생시키는 관계인거죠. 그래서 무한한 모순밖에 없습니다. 이 때 실천이라는 것도 모두 물질적 의미로써, 노동, 과학적 인식, 정치 등 복수의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맑스주의는 하나의 복수성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결론만을 보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논지가 구성되는 과정은 강의를 통해 들어야 할 거 같습니다.

# 공지합니다.

*담주 읽을 분량은 숙제방에 스캔해서 올려 놓았습니다. <다시 돌아보는 러시아 혁명 100년 1> 중 2개의 논문입니다.

*간식: 윤순샘, 규창 부탁드립니다.

# 마지막 주 발표 관련: 그동안 조별로 공부한 내용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발표.

형식은 자유롭게 하되 공부한 것이 잘 전달 될 수 있도록 할 것.
전체 1

  • 2020-04-21 15:06
    빵을 쟁취해서 누워있는 민호에게 봉사하는 스토리의 사진 같은데요? ㅋㅋㅋㅋㅋ 시국이 시국인지라 책으로 깊고 넓게 배우는 러시아가 될 것 같습니다. 좀 더 오래 함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