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4월 23일 예술팀 후기

작성자
혜림
작성일
2020-04-27 20:03
조회
127
예술조에서는 “유물론적 예술론은 처음이라서”라는 큰 주제로 각자가 지닌 예술에 대한 ‘분할선’을 의심해보는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러시아 예술을 공부하면서 예술을 특권화시키면서 생긴 문제들을 다르게 보게 되는 점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건화의 경우 처음에 러시아 소련 예술을 공부하고 싶었던 이유는 ‘다른 주체성의 탄생’이 궁금해서였다고 합니다. 러시아 예술은 상품 소비에 치우친 문화가 아닐 텐데, 소비하는 방식으로 취미 생활하는 게 아니라면 어떤 게 있을까? 처음에는 막연하게 러시아 예술이 대중운동으로서의 예술이라는 상이 있어서 예술이 공공체육시설에서 수영 강습하는 것처럼 인민들의 예술적 소양을 기르는 국가사업과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공부할수록 대중 예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특히 브레히트 관련 책을 읽으면서 인민을 위한 러시아 예술은 대중에게 교양 쌓게 하는 게 아니고 대중들이 지닌 기존의 생각들을 교란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현숙 쌤의 경우는 어릴 때 그림을 좋아해서 그렸었는데 성인이 되어서는 그림을 보는 관객이 되셨다고 합니다. 작업자로서 어린 시절 보냈는데 성인이 되면서 일어나 단절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예술이 전문화된 제도적 조건 속에서 예술의 주체와 객체가 나눠지는 것을 문제시해보기로 했습니다. 예술의 전문화와 그 속에서 소외되는 나. 예술에 주체와 객체 나누는 전제는 무엇이었는가? 그동안 자신이 예술작업을 하지 못한 것은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이런 조건에도 불구하고 예술을 하기 때문에 자신은 그냥 향유만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순간 나는 창작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창작한다는 것과 향유하는 것의 차이는 뭔지를 더 고민해 보기로 했습니다. 시대적 조건을 다르게 보기 위해 러시아 예술에서 표어처럼 말하는 “예술은 인민의 것이다”를 선생님 식으로 해석해 보기로 했습니다.
혜원이는 줄곧 컨텐츠 소비자로서 예술과 관계 맺는 방식을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술 작품이란 자신에게 자극을 줄 수 있고 자기 취향에 따라서 선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들은 각자 입맛에 맞게 선별하고 나면 자신에게 남는 것은 없다고 합니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우리의 분할선을 의심하게 하고 사유를 요구하며 감각을 변형시키는 예술 작품은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자극을 주지 않는 이상, 어떤 특정한 정서를 발동하지 않는 예술은 무시해 온 거죠. 혜원이는 낯설게 세상을 보게 하면서 자신에게 자극을 주는 것을 예술이라고 생각했는데 러시아 예술을 공부하다 보니 이런 예술이라는 것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뻔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자극만을 주는 예술은 관객을 여전히 수동적 입장에 놓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관객이 작가가 되지 않더라도 관객이 관객인 채로 능동적이게 된다는 것은 무엇인지, 관객의 능동성을 위해서 러시아 아방가르드에서 뭘 고민했나를 더 고민해보기로 했습니다.
저의 경우는 예술과 기술의 분할선을 의심해 보기로 했습니다. 예술을 기술보다 더 특권화하고 있습니다. 기술이나 생산하면 동일하게 반복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 떠오르는데, 이것을 새롭게 창조하는 예술의 영역보다는 수준이 떨어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러시아 예술가들은 자신을 엔지니어라고 부릅니다. 이때 이들은 예술가들의 유일무이한 것을 창조해내는 신적 존재로 불리는 것을 배척하려고 합니다. 아방가드르 예술가들처럼 자신을 엔지니어라고 생각할 때의 뭐가 달라지는 것인지, 작업의 결과를 자신의 소유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업을 하면서 그 사물과 관계 맺고 있는 방식이 전부인 생산 작업은 어떤 것일 수 있을지 고민해 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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