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스 에이징 세미나

5주차 후기

작성자
소소 (최난희)
작성일
2021-10-28 14:03
조회
146
안티에이징에 안티하는 것이 예스에이징인가?

세미나를 시작할 때만 해도 나는 이 테마를 조금은 가볍게 여긴 것 같다. 나는 평소 우리 사회의 ‘젊음, 동안 강박증’을 낯설어하고 있던 터였다. 예스에이징은 그래서 내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테마였다. 그런데 세미나가 지속될수록 이 당연한 테마에 염증이 조금씩 느껴지면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공부가 되어가려는 조짐이 느껴졌다. 급기야 후기를 써라는 주문을 받고 보니 글 한 줄을 이어나가기가 싫어지는 것이다. 나는 이 저항감이 뭘까, 왜 글이 이렇게 쓰기 싫은가 지켜보기 시작했다. 내 경험상 내 속에 절실한 질문이 형성되면 글은 저만의 추진력을 가지고 내 속을 뚫고 올라오려고 한다. 결국 글이 이렇게 쓰기 싫다는 것은 이 문제가 아직 내 문제로 여겨지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책은 재밌게 읽었다. 저자의 발랄한 문체도 마음에 들었고 나이듦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도 이전 책 마사와 솔의 토론 방식이었던 ‘지혜롭게 나이든다는 것’보다 훨씬 심도있게 다가왔다. 나이듦에 대한 의학 현장에서의 경험과 사회에 만연한 노화에 대한 혐오 풍조를 방대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나이듦에 대해 더 많은 ‘앎’이 쌓였는데, 왜 그 문제에 대해 갈수록 심드렁해지는가. 다시 짚어보기로 했다.

나는 그동안 안티에이징에 반대하는 것만으로 저절로 ‘예스’에이징이 되는 것으로 여겼는가 보다. 저자는 나이듦에 대해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접근이 필요하다고한다. 그동안 내게 ‘안티에이징’이란 생물학적 노화 현상이라는 측면에서만 형성된, 약간은 반항적인 입장이었다. 아니, 사람이 늙으면 주름도 지고  배도 나오는 거지, 그게 뭐 어때서?  책에서는 나의 반감에 대한 적절한 근거를 이렇게 제시한다.

“과학의 울타리 안에서 안티에이징이란 보통 노화를 늦추거나 완전히 정지시키는 것으로 정의된다. 이 용어를 지지한 찬성파는 안티에이징이라는 말이 세상 사람들에게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발명품 중 하나로 꼽히는 항생제와 같은 무게로 인식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안티에이징의 ‘안티’는 자연의 섭리를 부정하거나 반대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저항을 뜻하는 항생제의 ‘항抗’보다는 반체제나 반이민의 접두사 ‘반反’에 훨씬 더 가깝다. 게다가 안티에이징은 노인 집단과 노화의 특징을 거부하고 부정한다는 면에서 상당히 시대착오적인 표현이다. 미국 안티에이징 의학회는 다른 의학 단체들과 다르게 .org가 아니라 .com으로 끝나는 계정 주소를 쓴다. 이 말은 곧 이 조직이 순수한 학술단체가 아니고 영리목적으로 운영된다는 것을 뜻한다.” (186P)

50대 이후 특별히 자기 미모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그 다종다양한 미용시술의 길에 발을 들여놓는가? 내가 너무 여자들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미모에 자신이 있어서, 혹은 자신이 없어서 요즘은 ‘반지계’가 아니라 ‘시술계’를 든다고 하는 말을 어딘선가 들은 기억이 난다. 나의 ‘안티 에이징’의 그동안의 입장이 생물학적 노화에 반대하는 수준이라 해도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초보적인 입장조차도 이상한 사람, 현실에 어두운 사람 취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책을 읽으며 알았다. 이상한 사람, 현실에 어두운 사람이라도 상관없다, 나는 아무튼 세태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는 막연한 정체성! 거기에는 얼굴이나 뜯어고치는 니네들이랑 나는 좀 달라! 뭐 이런 우월감 비슷한 감정에 지배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그런 값싼 우월감이 실제 내 삶, 차근차근 나이들어가는, 즉 변화해가는 내 몸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도피처, ‘샛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나아가 내 몸은 나만의 몸이 아님을 숙고하는 여러 차원들을 가볍게 스윽! 훑고 지나가면서 다 안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도록 하는 감정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저항하는 척하는 냉소주의!  그와 관련한 인상깊은 구절이다.

"선긋기와 정형화는 이런 현대인의 불안 심리를 잘 보여 주는 현상이다. 선긋기와 정형화는 나와 저들, 그리고 세상을 이해할 기준을 간단명료하게 제시한다. 지난 문명들이 경험과 공감을 통해 서서히 스미도록 공통의 가치를 더 큰 규범, 이상, 혹은 신화에 꽁꽁 숨겨 두었던 것과는 정반대다. 선긋기와 정형화는 현상을 인식하는게 아니라 그저 바라보게 한다.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무언가를 바라보려면 시선을 고정하기만 하면 된다. 반면에 인식한다는 것은 영혼의 눈으로 행간을 읽는다는 뜻이다. 그런 이유로 19세기 후반에, 사람들이 육체를 신의 선물이 아니라 기계로 보기 시작했을 때 노인을 바라보는 시선도 함께 달라진 것이 다. ‘인식’이 아니라 ‘구경’으로 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에 가까운 존재로 숭상되던 사회의 어른들은 산업화의 렌즈를 낀 현대인의 두 눈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고물에 지나지 않았다. 나이가 많다는 말은 젊은 사람에 비해 떨어진다는 의미와 동일시되었다. 또 사람들은 고령은 곧 기능저하와 노후라는 근거없는 방정식을 들이대며 가능한 한 노년층과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 인간을 기계로 취급하며 그 가치를 정의하는 풍조는 지금까지도 식지 않고 있다." (127P)

“어떤 주제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의 진짜 문제는 내가 뭘 얼마나 심각하게 모르는지를 정확히 모른다는데 있다. 그런데도 잘 모르는 한 사회집단이 다른 집단들보다 덜 중요하다는 시각이 있다면 그 바탕에는 그 집단을 잘 몰라도 별 상관없다는 태도가 반드시 깔려 있다.” (136P)

진짜 문제는 안티 에이징에 ‘안티’를 한다는 것으로 곧바로 “예스” 예이징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왜 나이듦에 그토록 맞서는가? 맞서지 않는 척하는 사람의 심리는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이듦에 ‘예스’하기까지, 어떤 무지의 자기를 드러내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하는가. 질기게 잡고 풀어볼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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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29 08:57
    저는 매사가 막연하게만 느껴지니 글로는 커녕 내가 무슨 느낌을 가진지마저도 정리가 안되는데 소소님의 글을 읽으니 '맞아 맞아, 이런거였어!' 하게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