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스 에이징 세미나

예스에이징 8주차 후기 및 공지

작성자
정옥
작성일
2021-11-11 16:28
조회
156
11.11 예스에이징 8주차 세미나 공지

매주 아침 9시 줌에서 선생님들을 뵐 수 있는 것은 참 신선한 경험입니다. 영어학원 새벽반 같은 분위기도 나구요, 살짝 덜 마른듯한 머리, 말끔한 얼굴이 화면 너머인데도 보이는 것이 재밌기도 하구요. 이번 주에는 아침 7시에 집을 나선 난희샘과 규창샘과 저 세 사람은 정사유( 골방이라 불리는)방에 둘러 앉았구요. 하시던 일을 정리하고 계신 정우샘은 급한 일이 있으셔서, 화면에 두 분 선생님을 모시고 세미나를 시작했죠. 근데 뭔가 아쉬웠어요. 줌으로만 뵌 순옥샘과 밥 한번 같이 먹고 싶고, 토론의 순번을 기다리며 못다 푼 얘기들도 오프라인에서 풀어보고 싶더라구요. 그래서 9주차 에세이 발표는 연구실에서 만나기로 했답니다. 봇물 터지듯 얘기꽃이 필 게 예상되어 끝나고 함께 할 점심시간에 관심이 더 가네요. 기대기대!!

<나이듦에 관하여>는 이제 노년기에 돌입했습니다. 사회적 시선이 신경 쓰이고 이곳저곳 아픈 데가 생기기 시작하는 시기이죠. 노년에 대한 사회적 편견등을 텍스트는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건 세미나에서 거의 매번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아요. 이번 주에는 노년의 고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지요. 노년이 된다는 건 이미 물리적 고립을 전제됩니다. 양로원이나 실버타운 요양원 등에 자발적이든, 타의에 의해서건 고립되는 게 현실이죠. 어느 세대나 또래집단이 모이기는 하지만 노년기는 이게 더 극명한 것 같아요. 세대를 연령으로 절단하여 과정으로서의 삶으로 보기보단 분절된 세대로 나누는 게 지금의 일이죠. 동양에서는 삶이 자연의 운행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여겼죠. 서양에서도 황도 12궁에 연결하거나 인간의 삶을 달의 운행에 비유하여 달력처럼 그리기도 했다고 해요. 그러나 근대 이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아동이 탄생했고, 지혜의 보고로 여겨졌던 노년은 보호보단 고립의 대상이 되어 버렸죠. 의료보험공단에서 실시하는 ‘생애 전환기’ 건강검진을 받으라는 통지가 올 때 전 생애 ‘전환’이라는 말이 무척 걸리더라구요. 나이 39과 40이 되면 어떤 전환이 일어나지? 60이 되면? 뭐 이런 삐딱한 생각이 들어서요.

노년의 고립과 함께 돌봄에 관하여 얘기를 나누었어요. 우리가 ‘돌봄’에 대해 상을 가지는데, 편안하고 쾌적한 걸 상정한다는 겁니다. 노인을 또는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은 쾌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죠. 몸과 몸이 부대껴야 하고 감정과 감정이 부딪치는 과정을 겪는 게 돌봄이지요. 그러나 받는 사람도 돌봄을 하는 사람도 모두 이 상을 놓지 못하기 때문에 돌봄이 문제적이고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진정한 의미의 돌봄이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음이라는 것을, 쾌한 상태만을 가정하지 않고, 불편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것, 나의 불쾌한 몸을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일 겁니다. 일본에서는 요즘 로봇 돌봄이 인기가 있다고 해요. 서비스를 받는 자는 수치스럽지 않고, 불편하게 서비스할 필요도 없는, 인간에게서 쾌하지 않은 것은 삭제시켜 버린 유용성 때문이라고 해요. 돌봄이  사회적 인식의 문제와 함께 하는 것이라고 보면, 우리 시대의 돌봄은 쾌와 함께 하는 상품이 되어 구매 가능한 것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볼 일인 것 같네요.

노년은 질병과 함께 하는 시기죠. 병에 대해서도 완치라는 상을 가지고 있지요. 정상과 병리를 나누는 현대 의료 시스템하에서 저자도 완치를 목표로 이루어지는 과잉진료에 대해 곳곳에서 문제 제기를 하고 있지요. 병은 삶의 불협화음에서 생겨나는 것이기에 완벽한 치료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죠. 삶과 병을 분리해 수치로 병을 관리할 수 있다고 보는 한 의료의 문제는 늘 상존하고 있는 것이죠. 누구나 병이 있음을 전제하는 동양 사유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데, 여기서 ‘병을 앓을 수 있는 것이 능력’이라고 하는 니체의 말을 곱씹어보게 되네요.

장자 <전자방>에서는 장땅의 노인을 들어 무위의 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장땅 노인이 무위의 도로 3년을 다스리자 파벌이 흩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의견이 같아졌지요. 그래서 문왕이 노인이 행한 도를 천하로까지 미루어가겠다는 욕망을 드러내자 다음날로 떠나버렸지요. 국면이 바뀌었고 천하로까지 욕망이 나아가는 것을 장땅의 노인이 우려하며 떠났던 거겠죠. 이 변화의 국면에 맞게 행위를 하는 것, 그게 무위가 아닐까요. 그렇게 보면, 무위라는 건 때를 정확히 아는 것일 겁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변화의 국면에 있는 우리를 받아들이고 때에 맞게 사는 것, 범범한 얘기 같지만 결국 이게 나이듦의 지혜인가 봅니다.

다음 시간은 <나이듦에 대하여> 마지막까지 읽어옵니다. 마지막 주 에세이를 위해 씨앗문장도 골라보며 읽으면 좋겠지요. 금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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