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스 에이징 세미나

예스 에이징 간단한 에세이 발표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1-11-16 11:29
조회
159
8주 동안 이어온 ‘에이징’에 대한 고민의 결실을 볼 때가 왔습니다. 각자 어떤 ‘에이징’을 ‘예스’하고자 하는지 하나씩 들고 와주세요. 물론 글 잘 쓰자고 공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의 고민을 글 한 편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묵직한 질문 하나는 가져가실 수 있을 겁니다. 서로가 생각해볼 만한 질문거리를 나누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이번에는 대면으로 진행합니다. 발표 뒤에는 간단한 회식도 있으니 꼭 참석해주세요!

간단하게 지난 토론을 정리하는 것으로 후기를 대신할게요. 이번에 《장자》 〈열어구〉편과 《나이듦에 대하여》를 끝까지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는 《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을 읽었죠. 당연한 말이지만, 텍스트 셋 모두 문제의식이나 주장하는 바가 달랐습니다. 장자는 유가를 비롯해서 제도를 정비하는 정치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했고, 《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의 저자 솔 레브모어와 마사 누스바움은 이미 사회적으로 형성된 ‘노년’에 대한 여러 관념들을 되짚으면서 ‘새로운 노년’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죠. 비슷하게 《나이듦에 대하여》의 저자 루이즈 애런슨도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노년’을 서술했지만, 실제로 의사로서 목격했던 순간들을 같이 풀어낸 덕인지 좀 더 와 닿았던 것 같아요. 전반적으로 선진국이라 불리는 국가들이 아직 ‘초고령화 사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처음 《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을 읽었을 때는 미국 사회를 대상으로 서술되어서 그런지 문제제기나 해결책이 지금의 한국 사회와 꼭 들어맞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요. 하지만 미국이나 한국 나아가 전 세계가 유례없을 만큼 많은 노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대 중국 사회가 60세 지난 노인에게 지팡이를 주면서 한 사회의 원로로 인정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지금 이렇게 수많은 노인들이 등장한 것 자체가 시대가 매우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여러 지표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 노인들의 역량을 어떻게 펼치게 할 것인지, 의료·운동·문화생활 등 그 노인들의 보편적 신체에 대한 적합한 앎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이번에 나온 ‘안락사’에 대한 얘기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루이즈 애런슨은 제도적으로 안락사를 허용할 필요가 있다고 했는데요. 단순히 존엄사의 측면이 아니라 생을 이어가는 것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노인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했죠. 좀 길지만 뇌리에 남는 부분이라서 인용해볼게요.
“냉정한 진실은 이렇다. 아빠는 이미 1년쯤 전부터 숨이 꺼져 가고 있었다. 20세기 후반의 현대 의학이 창조한, 길다고도 짧다고도 볼 수 없는 애매한 임종기였던 셈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엄청난 자본과 아이디어들이 질병을 뿌리 뽑기 위한 프로젝트에 집중되고 있다. 당사자에게는 그것이 득이 아닌 실일지도 모른다는 배려나 이후 이어질 후유증에 대한 대비 따위는 간과한 채 말이다. 계속 이런 식이라면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수많은 이가 애꿎은 고통에 시달리면서 목숨만 부지할 뿐 원치도 않는 삶을 그저 버텨 가게 될 것이다. 마치 아주 천천히 가라앉는 늪에 빠진 것처럼 말이다.

질병에서 완전히 해방시킨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초고령기에 도달할 정도로 오래 살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냉정하게 표현하면 초고령기란 삶의 안락함도 주체성도 사는 의미나 즐거움도 전혀 남지 않은 인생 종점이나 마찬가지다. 혹자는 벌써부터 그렇게 심각하게 걱정할 거 뭐 있냐고 할지 모른다. 과학이 발전하면 노화를 멈추는 게 곧 가능해질 거라면서. 그런데 과연 그럴까? 노화가 완치 가능한 사안인가 하는 논제는 일단 차치하고, 뭐 그런 완치 비법이 언젠가는 나온다고 치자. 그렇다고 그걸로 끝일까? 무미건조한 하루하루가 무기한 이어지는 긴긴 세월을 당신은 어떻게 견딜 것인가? 이상기후에 인구 과포화까지 겹겹의 문제로 온 동네가 몸살을 앓고 있는 이 행성에서 한정된 자원, 일자리, 배우자 등등을 두고 한층 격해질 경쟁에 인류는 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과학 기술을 잘 쓸 만한 대상만 활용하게 해야 할까? 바이오테크 기업과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이 안티에이징 테마에 투자한 만큼 혜택을 돌려받는 동안 나머지 대다수는 그냥 자연의 섭리에 따르게 두는 식으로?

(…) 현재 유럽에는 안락사가 합법인 국가가 꽤 된다. 미국 국내에서도 안락사법이 통과되는 주가 점점 느는 추세다. 단, 적용 대상에는 조건이 있다. 분명하게 죽어 가는 환자로, 우울증 소견이 없고 스스로 약을 복용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타당한 조항이다. 그러나 한 꺼풀만 벗기면 중증 장애나 치매를 앓는 노인에게는 이 법이 무용지물이라는 뜻도 된다. 더불어, 정신이 아직 말짱할 때 해치우려는 생각에 몇몇은 실행 시기를 지나치게 앞당기는 부작용의 우려도 있다. 기본적으로 이 법안이 문제가 되는 것은 젊은 후손들은 당연시하는 권리를 노인들은 박탈당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극소수 특권층은 재력과 권력을 동원해 어떻게든 차선책을 찾는 동안 대다수 일반인만 그대로 방치될 테니 불평등이 이중으로 심화될 게 뻔하다.”(761~764)

사실 저는 ‘안락사’라는 것이 무기력한 선택을 그럴듯하게 꾸민 말이라 생각했는데요. 다르게 생각해보면, 노년을 살아가는 이들이 자신의 역량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지 않은 채 무작정 삶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도 매우 폭력적인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저자도 단순히 ‘안락사’를 자유롭게 허가하자는 건 아닙니다. 다만 사회적으로 노년을 감당할 여력도 안 된 상태에서 ‘안락사’의 합법적 기준조차 제대로 설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문제 삼은 것이죠. 토론 중에는 집에서 임종을 맞이한 남편의 죽음을 해명하기 위해 경찰서로 출두한 아내의 이야기, 관이 들어갈 수 없도록 설계된 엘리베이터 등등에 대한 얘기들이 있었습니다. 햐... 들으면서 이래도 되나 싶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제도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필요하겠고(아마 솔 레브모어의 얘기들을 참고할 수 있을 듯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각자 노년을 자유롭게 살기 위해 철학적으로 고민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 중 하나로 중세 유럽의 ‘죽음을 기다리는 문화’에 대한 얘기가 있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죽을 때가 다가왔음을 직감하면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음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매일 마을 사람들이 한 명씩 찾아와서 그가 죽는 것을 지켜봤다고 하는데요. 개인적으로 그것을 감내하는 데에도 높은 수준의 역량이 요구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체적으로 느껴지는 변화들과 마을 사람들과의 달라진 관계들부터 많은 것들을 감내해야 할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고 그 과정을 편안하게 맞이하겠다는 점에서 이것도 안락사의 일종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에 비해 저희가 상상하는 안락사는 오히려 자신이 ‘자신이 아니게 되는 모습’들을 소거하려는 행위입니다. 삶과 죽음, 병과 건강 같은 걸 사유하기는커녕 내 삶이 내가 바라는 대로만 되었으면 하는, 못난 꼴 보이고 싶지 않다는 나약함의 발로죠. ‘안락사’에 대해서도 여러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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