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티모아> 9월 9일 7주차 수업후기

작성자
경희성
작성일
2021-09-14 22:32
조회
153

『쁘라산나빠다』 제18장, 자아에 대한 고찰, 1~7게송 /  김은순.


 불교에서는 오온(五蘊)의 작용을 ‘나’라고 본다. 내가 경험하는 일체를 오온으로 설명한다. 오온은 ‘다섯가지 무더기’라는 뜻으로 색은 물질, 수는 느낌, 상은 지각, 행은 형성, 식은 의식으로 분류한다, 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오온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사람마다 형성된 오온의 작용이 그 사람의 세계를 구성한다는 의미이기도하다.

우리는 오온의 작용을 ‘나(자아, 에고)’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오온 중 어떤 것도 내가 아니라고 가르쳐 주신다. 만일 자아가 존재한다면 10년전, 1년전, 어제의 내가 지금의 나와 동일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나를 포함한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지금 나의 오온 작용 중 어느 것 하나도 지난 시간에 작용했던 오온과 같을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가 구성한 오온 안에서 세상을 보기 때문에 ‘탐’, ‘진’, ‘치’의 속박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탐, 진, 치는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을 만들어 내는 뿌리로 자신 뿐만이 아니라 대상도 해롭게 만든다. 천지 만물이 상호 의존하며 연기적으로 존재한다는 세계관을 가진 불교 철학이 무아론(無我論)을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이다. 따라서 ‘나’라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여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수행의 최종 목적으로 삼는다.

 

 아(我)가 존재하지 않을 때, 어떻게 아소(我所)가 존재하겠는가?


아(我)와 아소(我所)가 적멸하기 때문에


아소집(我所執)과 아집(我執)은 존재하지 않는다.


<『쁘라산나빠다』 , 제18장 2게송, 758쪽>


이 게송에서 용수는 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나의 것’도 있을 수가 없으며, 따라서 나의 소유물에 대한 집착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온 뿐인데 이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은 단 하나도 없으니 지금의 내가 인식하는 감정, 느낌, 생각 등은 ‘나’도 아니며 ‘나의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자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경우 다시 윤회의 세계에 들어서지 않는 열반을 성취하게 된다고 말한다.


아(我)와 아소(我所)라는 생각이


외적 내적으로 소멸할 때, 취(取)는 소멸한다.


취(取)가 소멸하기 때문에 생(生)은 소멸한다.


<『쁘라산나빠다』 , 제18장 4게송, 765쪽>


그런데 ‘자아가 없다’는 무아(無我)와 모든 것에는 ‘실체가 없다’는 공성(空性)을 주장하는 용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이 들어온다. 부처님께서 설 하신 『법구경」에서는 “아(我)는 아(我)의 주인(보호자)이다. 어떤 다른 자가 (我의) 주인이겠는가? 현자는 아(我)를 잘 제어함으로써 천상에 도달한다. 아(我)는 아(我)의 선행과 악행의 증인이다.” 또한 『삼매왕경』에서는 “검은 업(業)과 하얀 업은 (둘 다) 소멸하지 않는다. 자기가 지은 업은 자기가 받는다.”<같은책 776~778쪽) 라는 경전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세존께서는 자아의 존재를 설정하셨다고 반박한다.

이 반박은, 세상 모든 것에는 실체가 없으며, 그 자체로서의 본성을 지니고  있지 않아 독립 불변의 존재가 없다는 무아와 공사상을 놓고 볼 때 당연한 반박이다. 이에 대해 용수는 그들의 반박을 인정하면서 다른 경전에 있는 무아에 대한 가르침을 말한다. “세존께서는 중생과 아(我)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법들은 원인을 소유한다. 또한 “색(色)은 아(我)가 아니다. 아(我)는 색(色)을 소유하지 않는다. 색(色)속에 아(我)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我)속에 색(色)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수(受), 상(相), 행(行) 식(識)도 마찬가지다.” 또한 “제법(諸法)은 아(我)들이 아니다.”<같은책 778~779쪽> 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경전 속 세존의 가르침이 모순될 때는 그 의미를 탐구해 봐야 한다고 말한다.

용수는 세존의 가르침에 나타난 모순을 불요의(不了義)와 요의(了義)로 구별하여 이해시킨다. 불요의는 실제의 뜻을 덮어놓고 이해하기 쉽도록 방편을 써서 하는 말로, 세존께서는 상대방의 수준에 맞게 ‘대기설법’을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무아론을 하나의 이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세존의 진정한 가르침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아의 가르침은 불교 발생 당시에 많은 종교인들이 추구하던 ‘영원한 자아(아트만)’, 불변하는 ‘자아가 존재한다’는 이념에 대한 비판이었다. 아트만을 이념으로 삼는 특정한 종교인에게 ‘무아’의 가르침을 말씀하셨고 또 ‘무아’의 가르침에 집착할 경우에는 ‘무아’를 부정하셨다고 보여진다.


아(我)는 (붓다들에 의하여) 시설되었으며,


무아(無我)는 (붓다들에 의하여) 설해졌다.


어떤 아(我)도, 어떤 무아(無我)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붓다들에 의하여 설해졌다.


<『쁘라산나빠다』 , 제18장 6게송, 779~780쪽>


‘아’의 긍정,  ‘무아’의 긍정 그리고 양자의 부정을 진정으로 이해하기를 바라며 이어지는 <자아에 대한 고찰>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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