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티모아> 9월 16일 8주차 수업후기

작성자
바람도리
작성일
2021-09-22 13:39
조회
186
 

8주차에는 채운샘께서 중론 16, 17장에 대한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강의 내용 일부를 정리해서 후기로 올립니다.

 

1. 존재 없음이 아니라 자성 없음

중론에서 대론자들은 ‘업 자체가 있다, 업이 있으니까 과보를 받는 게 아니냐'고 말한다. 즉 업에 자성이 있다는 거다. 반면 나가르주나는 업에 자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자성이 없다는 게 업이 없다고 존재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나가르주나와 대론자들의 논쟁은 업이 있다는 주장과 없다는 주장으로 맞서는 게 아니다. 모든 게 이와 마찬가지다. ‘가는 것도 없고 가는 자도 없다’라고 할 때 아무 사람도 없고, 가는 현상이 없다는 게 아니다. 가는 자라고 하는 자성을 가진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니며, 가는 자와 무관하게 감의 자성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하고자 한다. 자성을 부정하는 거지 현상적으로 누군가 간다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다. 간다는 행위에 자성이 없는데 간다는 현상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모든 건 연기라는 뜻이다. 속박과 해탈과 업, 윤회도 마찬가지다.

 

2. 윤회와 업은 인연 속에서 생기한다

‘자아가 속박되었다, 자아가 열반에 이르렀다, 자아가 업을 받는다, 자아가 윤회한다’는 말들은 자아라는 존재가 한다는 걸 전제로 생각하기에 논리적 문제가 없다. 우리는 윤회를 말할 때도 어떤 존재가 있어서 그가 계속 윤회한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해탈을 논할 때에도 해탈하는 자아를 생각한다. 우리의 언어적 관습에서는 주어를 앞에 놓고 그 존재가 행위를 한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윤회에 대해서 우리가 자주 던지는 질문은 뭐가 윤회하는가이다. 그런데 주어에 해당하는 뭐가라는 게 없다고 나가르주나는 말한다. 그렇다면 윤회가 없다고 할 수 있는 건가. 불교에서 윤회도 있고 업고 있다. 윤회와 업이 그 자체의 자성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인연 속에서 생기한다는 뜻이다.

 

3. 쁘라산나빠다 17장의 구조

어떤 사람이 행한 행(行)에 자성이 있다면 그 행은 악행과 선행이 정해진다. 그렇다면 선행은 선을, 악행은 악의 과보를 받을 것이다. 이게 우리가 아는 권선징악이다. 이 말에는 어떤 행위 자체를 선과 악으로 분별하는 논리가 들어 있다. 그것에 대해서 받는 과보에 대해서도 선과 악이라는 분별이 들어 있다. 이것과 이것을 실체적으로 대응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다 자성과 분별에 기반한 사유다. 그러니까 불교에서 ‘선하게 살아라.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나가르주나의 논리 속에서 보면 그에 대응하는 자성을 가진 선행, 자성을 가진 악행은 없다. 그런데 선악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는가. 이걸 머릿속에서 풀어야 한다. 자성을 부정하면서도 업과 윤회를 설명할 수 있는가, 뭐가 무엇 때문에 윤회하는가, 과보를 받는 인과나 주체가 없는데 업, 윤회, 업의 과보는 누가 받고 어디 있는지가 복잡하다. 17장에서 1번에서 19번까지가 업에 대해서 기존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상속적 견해다. 나가르주나는 통속적 견해를 업을 자성을 가진 것으로 보는 것이 라는 점에서 게송 20번에서부터 비판한다. 33개의 구조를 그렇게 봐야 한다. 그래서 앞의 것들이 훨씬 이해가 잘 된다.

 

4. 나가르주나가 싸우는 2가지: 법무아와 인무아

나가르주나는 아비달마 구사론자들처럼 업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논쟁하며 싸운다. 아비달마를 통해서 그들이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는가, 어떤 방식으로 물질과 마음을 바라보는가를 공부하고 나면 중론을 더 이해하게 될 것 같다. 우리는 그들에 대한 비판을 읽고 있는데 무엇에 대해서 무얼 비판하는지 알지 못해서 중론이 더 어렵게 느껴진다.

중론이 싸우는 또 다른 대상은 이 세계에 어떤 요소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법이다. 중론을 크게 나누었을 때에 15장까지는 요소들, 미세한 요소들은 계속 존재한다는 법무아를 비판한다. 16장부터는 인무아, 푸드갈라, 자아를 비판한다. 윤회하는 주체, 업의 주체, 과보를 받는 주체가 없다는 걸 말하고자 하는 거다. 자아에 대한 논의가 쁘라산나빠다 631쪽에 나온다. ‘푸드갈라가 윤회한다고 할 지라도’라는 문구에서 푸드갈라는 자아다. 법은 없지만 주체인 아트만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생각해보면 사람이 ‘무엇이 있다’는 걸 출발점에 놓지 않고 사유하기가 어렵다.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부터 ‘행위한다’, ‘과보가 있다’ 는 걸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중론은 상식의 세계로 돌파하기 어렵다. ‘무엇이 있다’로부터 생각을 전개시키는 건 이 사유의 습관을 허물기는 매우 어렵다.

 

5. 매일 아침 5분 사유의 습관을 깨보라

‘아’와 ‘타’라는 분별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건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다. 공부를 하면서 그저 흉내를 내는 거 아닌가 의문이 들었다. 매일 매일 사유의 습관을 다르게 내야한다. 우리는 매일매일 뭐가 있다고 말하고 생각하며 산다. 그런데 아침에 하루를 시작할 때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있는가’, ‘팔이 나인가’, ‘숨 쉬고 있는 나라는 게 있는가’, ‘숨 쉰다는 나의 행위가 있는가’ 와 같은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5분이라도 사유의 습관을 깨는 연습을 해보라. 그 연습을 매일 매일 하다보면 낙수물에 돌이 패이듯이 단단한 우리의 사고도 균열이 생긴다. 하루라도 중단하면 원래 사유의 습관으로 돌아가려는 탄성의 힘이 세다. 그래서 매일매일 생각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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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29 10:27
    긴 방학이 지나고 지난 시간 뭘 공부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했는데, 후기를 읽으니 도움이 되네요! 은미샘 후기 감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