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티모아> 9월 30일 3학기 9주차 수업후기

작성자
몽실이네언니
작성일
2021-10-10 13:52
조회
193

중론 제19. 시간에 대한 고찰


1. 명상

이번주는 윤지샘이 담마코리아 명상수련에서 배운 호흡명상을 공유해주셨습니다. 호흡명상 3단계 중 첫 번째 단계를 해보았는데 이것의 핵심은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라 합니다. 눈을 우선 감고 이전에 호흡명상을 하면서 집중하게 위해 하던 들숨, 날숨하면서 마음속으로 대뇌었던 방식이 아니라 코로 숨 자체를 알아차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의도가 들숨 날숨하면서 집중하는 것 자체가 언어에 메일 수 있으니 그 점을 배제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중론 공부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느낌입니다.

2. 용수의 사유-중관사상과 서구철학.

칸트나 헤겔 등 서구의 철학자들이 중관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한 노력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나카무라 하지메는 여러 가지 수학적 기호를 통해 공사상을 정의 내리고 싶어 했고 공을 ‘없음의 있음’ 즉 ‘0’이라는 숫자를 통해 표현하려 했다는 점이 재미있는 부분이었습니다. 낸시 맥캐그니는 공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용수의 ‘4구 부정’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이용해 ‘4구’를 명제로 설정해 고찰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중관사상에서 개념적인 실체를 찾으려 했던 칸트와 헤겔도, 수학적 기호를 사용해서 논리를 끌어내려했던 나카무라 하지메와 낸시 맥캐그니의 노력도 용수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입니다. 적어도 어떤 논리식이 성립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어떤 개념에 대한 정의가 필요한 서양철학은 공사상에 대해 ‘공이란 무엇이다’라는 개념설정에 초점을 두었다면 용수는 오히려 우리가 가진 그 개념을 해체하고 파괴하는데 초점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용수는 우리가 논리이전으로 돌아가 분별지로 인한 ‘고통에서의 해방’이라는 붓다의 가르침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지, 결코 인과에 대한 논리적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이야기를 듣더라도 그 안에서 먼저 의미를 찾고 논리적 정의를 내리는 사고체계는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 수 없습니다. 실상을 통찰하는데 장애로서 작용하는 희론이 적멸한 길양을 추구하는 것이 용수의 사유에서 가장 큰 특징이 아닌가 합니다.

3. 중론 19품 시간에 대한 고찰

대론자들은 자성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시간은 존재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삼시 즉 과거, 현재, 미래를 우리가 인식하기 때문이고 시간은 자성을 의지처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우리가 시간을 인식하려면 “있다”는 개념의 ‘존재’의 출발에서 시작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대론자들은 시간은 양(量)을 소유하기 때문에 확실히 존재한다고 합니다. 하루 이틀, 찰나, 초 분 등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가르주나는 그런 주장에 대해 논리적 모순을 이야기합니다. 찰나, 초 분 등의 양을 측정하려면 시간이 정지해야 할 수 있는데 시간이란 통상적으로 정지하지 않기 때문에 측정할 수 없다 반박합니다. 실제로 ‘찰나’ 라는 것이 어느 만큼인지 우리는 가늠할 수 없을 겁니다. 사람들마다 모두 찰나라는 시간에 대한 개념이나 느낌이 각각 달라, 그 다른 만큼 그것은 시간의 정확한 양은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셈입니다. 즉 시간이란 개념적인 존재이자 우리가 만들어 낸 상이지 현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가르주나는 ‘시간은 존재하므로 자성은 존재한다’는 대론자의 주장에 대해 반론을 통해 자성은 존재한다는 대론자의 주장을 논파하고 있습니다.

“정지하지 않은 시간은 파악되지 않는다.

파악되는 정지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파악되지 않은 시간이 어떻게 인식될 수 있는가?”

“만일 시간이 존재에 연하여 존재한다면,

어떻게 존재 없이 시간이 존재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떤 존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시간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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