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티모아> 10월 21일 4학기 1회차 수업후기

작성자
구슬
작성일
2021-10-31 17:13
조회
188
  1. 명상


저번 시간에 이어 호흡 명상이 이어졌습니다. 생명체의 가장 기본인 호흡, 그런데 호흡 명상은 호흡만큼 쉽지 않았습니다. 호흡은 자연스레 이루어지고, 또 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저에게 호흡을 ‘바라보는’ 일은 왜 그리도 노력을 요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1차 호흡 명상에서 계속해서 떠오르는 망상 사이에서 간신히 호흡 바라보기를 하면, 2차 명상에서는 좀 더 수월하게 망상을 떨쳐버리고 호흡을 좀 더 길게 바라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떠오르는 망상도 좋은 점은 있습니다. 요 며칠 나에게 일어난 일 중에서 이러이러한 일들이 내 머리 속에 아직 남아있구나 하고 알아차림 같지 않은 알아차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명상을 이끌어주는 윤지샘은 명상을 하며 콧속과 그 주위의 감각을 섬세하게 느껴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콧속이 건조한 것과 넓은 콧방울로 공기가 훅 들어오다가 병목 현상처럼 정체(?)가 느껴지기도 했지만 다른 감각은 없었습니다. 다음에는 호흡 명상을 통해 어떠한 감각들이 느껴질지, 그리고 미세한 감각들에 집중한다는 것이 일상에서 느끼는 감각과 감정에는 어떠한 영향을 줄지 궁금해졌습니다.

2. 낭송

저번 학기에 이어 [입중론]을 읽고 있습니다. 처음 읽을 때는 의미도 안 잡히고 어디서 띄어 읽어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쌓이자 여전히 의미는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런대로 낭송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입중론을 통해 중론의 내용을 다시 마주하면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온라인 세미나라 명상도 낭송도 다른 도반들과 같은 공간에서 함께 하는 힘을 느낄 수는 없지만, 랜선 낭송을 통해 우리는 다양한 장소에 있지만 목소리를 통해 같은 장(場)에 있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3. 중론

제21장. 발생과 소멸에 대한 고찰

대론자들은 시간은 자성에 의하여 존재한다고 말하며, 이로 인해 발생과 소멸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특정한 시간에 의존하여 싹이 ‘발생’하며, 또 특정한 시간에 의존하여 싹이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대론자들에게 시간은 발생과 소멸의 원인이 됩니다. 이러고 보면 발생과 소멸은 시간의 전후관계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용수는 발생과 소멸은 존재하지 않으며, 시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중론 전체에서 용수는 개념어들은 ‘이름’일 뿐 실체를 담보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하나의 대립항을 이루는 두 개의 개념어들에 대해서도, 대론자들은 마치 두 개의 상반되는 실체가 있는 양 생각하지만 용수는 그들의 주장을 하나하나 논파해 나갑니다.

게송1

발생과 떨어져 있든지 또는 함께 있든지 소멸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멸과 떨어져 있든지 또는 함께 있든지 발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송2

발생과 떨어져서 소멸이 도대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만일 그와 같이 주장한다면) 출생과 떨어져서 죽음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발생과 떨어져서 소멸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송3

발생과 함께 소멸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마찬가지로 출생과 죽음은 동시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용수는 발생과 소멸의 존재를 논하기 위해, 그것들이 ①떨어져 있는 경우와 ②함께 있는 경우를 상정합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도 양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①의 경우는 다시 “발생과 떨어져서 소멸”이 존재하는 경우(게송2)와 “소멸과 떨어져서 발생”이 존재하는 경우(게송 4)로 나누어지는데, 전자의 경우 발생과 무관하게 소멸이 존재한다면 이는 “태어나지 않은 자가 죽음을 맞이”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고, 후자의 경우 소멸 없이 발생만 있다면, 이는 “존재들[의] 무상함”이라는 대전제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무상하여 노사의 속성이 있는데, 소멸을 무시한 채 발생만 하는 것은 상주론의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②의 경우 발생과 함께 소멸이 존재하거나(게송3) 소멸과 함께 발생이 존재(게송5)하는 경우로 나눠지는데 이 모두 출생과 죽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오류를 나타내게 됩니다. 다시 말해 ①과 ②의 경우는, 발생과 소멸의 동일성과 상이성을 고찰한 것으로 이는 모두 성립하지 않게 됩니다.

용수의 논파에 대해 대론자들은 다시 한번 그들의 주장을 폅니다.

묻는다) 발생과 소멸은 확실히 존재한다. 언어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 ([쁘라산나빠다] 917)

저는 이 부분에서, ‘언어’니까 실체가 아니지 라고 바로 훈련(?)된 답변이 떠올랐지만, 일상에서 우리의 모습은 항상 대론자들의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어로 표현되는 모든 것들을 자동으로 실체와 연관시켜 생각하니 말입니다. 용수는 언어란 실체가 아니라 ‘분별’임을 지적하며,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 모두 존재한다면 이는 마치 ‘석녀의 아들’도 (언어적 표현이 가능하기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격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대론자들은 계속해서 발생과 소멸을 주장하며 그것들은 존재들의 속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용수는 발생과 소멸이 존재의 상인 것은 맞지만(게송8), 발생과 소멸은 자성으로 존재하지 않기에 그것은 부정되었으며 이는 또한 존재의 부정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대론자들이 주장하는 발생과 소멸은 공(空)한 존재에 대해 분별한 결과이거나 또는 불공(不空)한 존재에 대해 분별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 모두 오류를 드러냅니다.

게송9

공한 것의 발생과 소멸은 타당하지 않다.

불공한 것의 발생과 소멸은 타당하지 않다.

승의의 관점에서 발생과 소멸은 없으며, ‘존재’ 또한 인정되지 않습니다. 발생과 소멸의 의지처인 ‘존재’라고 불리우는 것이 공할 때 실체로서의 발생과 소멸도 힘을 잃습니다. 하지만 대론자들은 정말 답답했는지 짜증을 냅니다. “그러한 세밀한 고찰이 무슨 소용인가? 소 먹이는 여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발생과 소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발생과 소멸은 존재한다.”([쁘라산나빠다], 927) 대론자들의 주장에 헛웃음이 나오다가도 이러한 모습이 중론을 읽는 내내 저에게 불쑥불쑥 떠오르는 의심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용수의 답송을 낭송하며 저의 의심을 마주하고 또 마주하는 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게송11

발생과 소멸이 그대에게 보인다면,

발생과 소멸은 미망 때문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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