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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티모아> 11월11일 4학기 3회차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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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5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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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티모아> 11월 11일 4학기 3회차 수업후기

 이번 세미나는 오랜만에 7명이나 모여 오프라인 토론을 하였습니다. 오랜만에 직접 보면서 토론하게 되니 공부하는 느낌이 난다고 좋아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날이 빼배로 데이라고 은순샘의 사랑의 담긴 초콜릿  빼배로를 선물로 사왔습니다. 우린 이구동성으로 누구한테 이러한 것을 받아보겠냐며 말하고 맛나게 먹었습니다. 다들 조금씩 맛난 것들을 챙겨오셔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수업을 마쳤습니다.

중론 제23장 전도에 대한 고찰 13~25게송까지

우리가 아는 전도몽상이란 것이 “무상 속에 常이 존재한다. 不苦 속에 苦가 존재한다. 무아 속에 자아가 존재한다. 不淨 속에 淨이 존재한다” 라고

전도된 생각을 하고, 전도된 마음을 가지고, 전도된 견해를 일상적으로 한다고 합니다.

찰나마다 소멸하는 무상한 오온에 대하여도 상주한다고 집착하는 것도 전도이며, 무상한 것은 苦이고, 제행은 무상하다. 苦의 본체를 지닌 오온에 대하여 樂이 존재한다는 전도된 집착을 하는 것은 또 다른 전도라 합니다.

그러니까 무상과 상,  무아와 자아,  부정과 정,  불고와 고,  무상한 오온과 상주하는 오온,  고의 본체를 지닌 오온과 낙의 본체를 지닌 오온,  등과 같이 이분법적 분별로 이루어진 것들은 다 전도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전도된 생각과 전도된 마음, 전도된 견해로 보지 않으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먼저 존재가 “자성에 의하여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상이다 상이다' 라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집착도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라는 전제가 사라지면 발생도 사라진다. 그러니까 '고통이 없다'(불고)라는 상과, '고통이 있다' 라는 상으로 이분하여  각각을  실체화함으로써  전도몽상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도 존재하지 않으며, 부정도 존재하지 않으며, 무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성이 空하기 때문에 여기에 대립하는 常樂淨我도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만일 아정상락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아 부정 무상 고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22게송)

부정하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을 때 거기에 대립하는 부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도까지도 소멸하기 때문에 무명도 소멸하고 무명이 소멸할 때 행들 등도 소멸한다. 그러니까 전도가 인식되지 아니할 때 그것을 원인으로 하는 무명도 소멸한다고 합니다.

용수의 공사상 연구 그 종교적 의미에 대하여 (채운샘 강의)  상주론과 단멸론

서양학자들은 불교의 공 사상을 그들의 분석적 사유로 접근한 것 같습니다.  스트렝이 보는 용수의 주요 관심은 “다른 사람들의 환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도록 중도를 표현하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사물이 空이라는 이해 속에서 진리의 깨달음과 존재에 대한 기본 개념들을 재해석해야 했다.

집착에서 벗어나 중도를 표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또 공이란 이해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가르주나의 중도란 양변을 쳐내는 것인데 이것이 상주론과 단멸론입니다.  상주론은 우리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영원한 '실체성을 가지고 있다' 라고 규정하는 것입니다.

단멸론은 우리가 경험한 세계조차도 부정하며, 세계는 무의미하며 허무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양변을 다 쳐내서 자성으로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음이 공이라는 이해입니다.

그러나 오감과 오온으로 나타나는 것을 취하여 사는 중생들로서는 양단을 왔다갔다 하면 살기가 쉽습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 우리는 눈에 보이든, 눈에 보이지 않든, 어떤것을 이미지나 언어로 개념화 하여 살거나, 아니면 개념화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 생각이 들면 '없다' 라는 것을 실체화 하여 붙잡습니다.

나가르주나는 이러한 존재들의 실상을 보고 양극단에  머물지 말고 이것을 쳐내는 것이 중도이며 중도가 곧 공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상주론에 입각하여 어떤 사회에서 윤리와 종교, 국가가 현상세계에 출현할 때에는 그 근원인 제일의 원인이 있습니다.

사회윤리 차원에서 어떤 것이 '선하다 아름답다' 라는 근원들이  제일의 원인이며,  종교적 차원에서는 제일의 원인을 소급해 들어가다 보면 더는 원인이 소급되지 않는 무원인의 지점에서 초월자가 등장하는 식입니다. 국가도 규정과 규범으로 제일의 원인들을 출연시킵니다. 이러한 방식들이 다 상주론에 입각한 방식입니다.   상주론에서 번뇌가 발생하는 이유는 뭘까요? 우리는 어떤 것을 이미지화 하거나 이름을 붙일 때 그것을 근거로 삼는 제일의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는 생성과 소멸을 겪습니다. 이것을 아는 존재라면  제일의 원인이 만든 세계에 의해 좌우되지 않습니다. 최초의 원인들이  초월자를 만들었지만, 이것은 원인과 결과가 분리되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은 생주이멸하는 존재인데, 신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과 사물은 다 소멸하는데 신만 존재하는 꼴이 됩니다. 이러한 방식은 원인과 결과가 분리되어 존재하게 됩니다.  만약이 인간이 원인과 결과가 분리된 삶을 산다면 어떨까요?

우리가 오온과  감각을 원인으로  하여 만들어낸 세계가 가설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세계도 우리가 출연시킨 세계입니다. 이것을 원인으로 하여 나타난 현상들은 결과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만든 것이 원인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결과와 분리한다면 어떨까요?  지금 우리에게 일어난 현상들을 받아 들이지 않고 더 낳은 어떤 것이 있다고 상을 짓고 번뇌하게 되겠지요.

우리 자신의 생성한 것을 우리 자신과 자꾸 분리하여 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종종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불신하고 부정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더 좋은(상), 즉 차원 높은 어떤 것과 동일시하려는 경향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상주론이지요.

스피노자의 정의에서 보면 ‘실존의 역량’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뜻은 역량이 생산해 내는 것으로 현존한다는 것입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신구의로 즉 몸과 생각과 행동으로 생산해낸 것들을 빼고, 나의 현존이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주론은 문화마다 종교마다 국가의 이념에 따라 취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지만 제일의 원리인 궁극적인 무엇이 있다고 상주하며 지배하는 논리와 부합합니다.

단멸론은 세상은 변화하기 때문에 의미가 없고 허무하다는 상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유는 신에 대한 개념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신이 있다는 사람들의 그 개념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단멸론자들은 상주론자들이 믿고 있는 그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지 단멸론에서 어떤 윤리를 도출해 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상주론이 제일의 원리로 삼고 있는 ‘있다’ 라는 근거를 부정만하지 어떤 것을 생성해 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단멸론의 잘못하면 중심 없는 세계가 될 수가 있습니다. 단멸론은 모든 것은 (생명과 사물들) 무가치하고 의미 없음이며 허무하다는 단멸공에 빠지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나가르주나는 이 양변을 쳐내는 것이 공이라는 개념이 된다고 말하면서 중도를 강조하였습니다.

중론이 갖는 시사성은 내가 어떤 분별을 만들어내고 실체화 하고 있는지 아는 것입니다. 운동은 정지에 기대고 있고, 정지는 운동에 기대고 있으니 뭐하나 따로 실체화 된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하나를 출연시키는 것은 양변을 출연시키는 것이며, 나를 출연시키는 것은 동시에 '나 아닌 것도' 출연시키는 것이 됩니다.

법의 공성과 사물의 무차별성

용수는 법 다르마도 환상으로 가설된 것이며 연기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있지도 않은 법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다르마에  대한 집착에서도 벗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용수는 아비달마 구사론 학자들에게 “ 궁극적이고 전환적이었던 지식을 단지 형식적이고 실용적인 지식(속제)로 격하시켰다” 라고 비판했습니다. 다르마의 중요성을 격하시킨 것이 아니라 다르마의 모든 관념들이 허구적으로 구상된,  다시 말하면 개념들로 구축되어 법이라는 상을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용수가 자성을 부정했던 이유는 자성이 있는 한 다른 것과 차별화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차별화 된다는 것은 모든 사물들에게 자성을 부여하여 실체화 한다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용수는 모든 사물들의 무차별성을 강조하며 이것이 무자성이고 공한 것이라 합니다.

예를 들어 언어로 어떤 것을 실체화하는 순간 그것과 비교할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자성이 됩니다. 그러나 언어가 공하다면 공하기 때문에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으며, 언어가 임시로 가설된 것이므로 자유자재로 갔다가 쓸 수 있습니다. 만약 언어가 차별화 되고 자성으로 사용된다면, 한정되고 규정된 언어가 될 것입니다.

용수는 궁극적인 실재와 모든 술어들을 타파합니다. 속박과 해탈의 차이를 부정하고, 윤회와 열반의 차이도 부정합니다.  여래가 인간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아무런 관련이 없는 어떤 절대적인 실체가 아닙니다.  공한 여래가 공한 것을 통하여 알여질 수 있겠는가! 이 말은 공과 여래도 상호의존이라는 것입니다.

용수는 여래가 본질적으로 궁극적 실재라는 생각이 생성되지 못하도록 차단함으로써  어떠한 정의로도 여래를 드러내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왜 공을 말해야 할까요?  “공성이 있다거나, 공성이 아닌 것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이 둘이 동시에 존재한다거나, 이 둘이 모두 없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공성이라고 말하는 목적은 단지 지식(假名)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존재의 인식은 가설된  것임을 전하기 위해 공의 목적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이 습관적이고 실체화하여 봄으로써 오는 번뇌들을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용수가 차별성을 부정하는 것은,  차별성이란 실체를 전제하기 때문에 무명과 갈애가 사라지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불교의 수행 목적과도 배치된다. 모든 지각이나 관념의 대상은 정신적인 조작을 요구한다. 모든 차별 또한 이런 조작에 기여한다. 차별이 절대적인 실체에 대한 확신이나 가설과 어우러지면, 사람들은 허구에 속박되도록 하는 정신적 세력들이 활동하게 된다. 이렇게  속박된 정신을 '정신적인 허구에 속박된 존재' 이며 이것을 곧  윤회라고 부릅니다. 마음이 차별화된 실체에 속박되고, 그 실체에 대해서 확신하고, 가설과 어우러지면 이것이 습관적으로 매번 윤회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샘께서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27품을 다 공부하고 나서 깨달음에 도달 하였는가?  다 空하다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공부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것입니다. 뭔가 목적이 사라져버린 것 같기도 하고, 맥이 빠지는 것 같기도 하고, 이러한 생각이 바로 단멸론이며 허무주위 라는 것입니다. 중론은 어떤 것도 실체화 하지 않기 때문에 양변을 다 쳐내고 지금 이 자리가 바로 여여한 자리이며, 바로 깨달음의 자리가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자리가 완전하게 깨달음의  자리(열반)인데, 허구(번뇌)에 가려져 있어서 모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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