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영성 세미나

영어&영성 세미나 네 번째 시간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7-11 21:09
조회
134
이번 주에도 투투 대주교와 그의 사상을 전하는 우리의 저자는 은혜로운 구절들을 우리에게 듬뿍 전달해주었습니다.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고 문장 해석을 확인하는 가운데 드문드문 우분투의 사유에 대한 토론도 이어졌는데요, 계속되는 화두는 ‘개인’과 ‘공동체’,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아프리카적 사유는 공동체에 우선권을 부여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개체들의 차이를 긍정하기도 합니다. 근대적 세계관에 익숙한 우리에게 이것은 모순으로 들리죠. 저자인 마이클 배틀(Micheal Battle)에 따르면 이는 우분투와 우리의 근대적 상식 사이에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보는 관점의 근본적 차이가 가로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설명에 익숙합니다. 서양의 사고는 개인에서 집단으로 나아가는 반면, 동양의 사유는 집단에서 개인으로 나아간다는 설명. 예를 들어 주소를 쓸 때에도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자기 집에서 시작해서 점점 더 큰 단위로 나아가는 반면, 중국이나 한국 같은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가장 큰 단위부터 점점 작은 단위로 나열을 하죠. 그래서 우리는 흔히 서양은 개인을 중시하고 동양은 집단을 중시한다고 배워왔습니다.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은 진보적인 것이고 집단을 우선시하는 것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태도라는 식의 생각도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죠. 그런데 어쩌면 이는 전적으로 서양의 관점에서 동양을, 근대의 관점에서 근대 이전의 전통적 공동체들을 바라본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마이클 배틀이 요약하는 서구적 공동체 개념은 다음과 같습니다. 공동체란 각자의 개인적 이해관계를 지닌 개인들의 무리인데, 그 개인들 각각은 그 나름의 사적인 우선권들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함께 모여서 집단을 이룬다. 왜냐하면 그들은 협력함으로써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일들을 해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기 때문에.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개인들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사회계약을 맺는다는 홉스 식의 사고방식. 여기에서 공동체란 개인에 덧붙여진 것일 뿐입니다. 개인들은 공동체 안에서도 여전히 환원불가능한 원자와도 같은 이해관계를 지닌 존재로 남아 있으며, 집단이 자신들에게 이득을 준다는 것을 확신하는 한에서만 타인들과 결합합니다. 이처럼 근대적 사고방식은 개인과 집단을 대립적인 개념으로 사유합니다.

이러한 전제 속에서 볼 때 비서구권이나 근대 이전의 공동체들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전체주의적 체제입니다. 근대인들은 그러한 공동체들 속에서 개인들은 전제군주나 사제와 같은 권력자들에게 속아서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계약을 맺은 것이리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I am because we are," does not include an additive 'we' but a "'thoroughly fused collective 'we.'"(38쪽)

근대적 상식을 내려놓고 보면, 우분투의 사유에서 ‘우리’란 개체를 탄압하거나 희생시키는 억압적인 전체가 아니라 완전히 융합된 공동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적 관점에서 공동체적 세계는 개인적 삶의 역사보다 우선권을 지닙니다. 그런데 이는 ‘개인’ 보다 ‘공동체’를 더 중시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요점은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으면 개인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개인과 공동체가 따로 있고 그 중에서 공동체가 우선시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존재에 이미 공동체가 함축되어 있다는 점에서 공동체는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 우선권을 지니는 것입니다. 서구적 학문의 언어를 빌려서 말하자면, 개인의 식별가능성은 공동체적 유전자 풀(pool)에 의해 규정되며, 나아가 어떤 사람이 어떤 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느냐는 그의 정신적인 기질과 사고방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니까 근대적 사유와 전근대적 혹은 탈근대적 사유의 차이는 존재를 파편적인 것으로 보느냐, 연결된 것으로 보느냐 하는 데에 있습니다. 공동체에 가치를 부여하느냐 개체에 가치를 부여하느냐 하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 그리고 존재를 파편적인 것으로 인지할 때 우리는 혼동된 자유 개념에 이르게 됩니다. 자유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덜 의존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자유롭기 위해 보험을 들어야 하고, 많은 자본을 축적하고 있어야 하고, 타인들과의 귀찮은 연대를 대체하도록 해줄 수많은 상품들이 필요합니다. 세계와 자기 자신을 분리시키는 것, 타인들로부터 분리되어 안락한 사적 공간을 확보하는 것. 그런데 이렇게 안간힘을 쓰며 자기 실존을 혼자 짊어지려 하는 사람은 전혀 가볍고 자유로워보이지가 않습니다.

어떻게 우리 존재의 근본을 이루는 의존성을 인정하면서 자유를 사유할 수 있을까? 우분투는 이 절실한 문제에 대해 힌트를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본성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 따라서 더 많은 관계들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개체적 실존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장하며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추가적으로 우분투적인 의미의 ‘우리’는 우리에게 또 한 가지 생각거리를 주는 것 같습니다. 근대적 관점에서 ‘우리’는 언제나 배타적입니다. ‘우리나라’라는 관념의 강화는 외국인이나 다른 문화에 대한 배제를 함축합니다. 아마도 이는 우리가 형성하는 ‘우리’(we)는 하나의 표상 안에서 다른 이들과 자기 자신을 동일화한 결과일 뿐 공동체나 전체에 대한 사유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면, 우분투적 관점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다른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사유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배타성이 아니라 확장성을 지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엄혹한 아파르트헤이트 시기의 남아공에서조차 백인들을 적으로 삼지 않았던 투투 대주교의 태도에 대한 묘사로부터 추측해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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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12 21:03
    저도 우분투의 '우리'와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가 어떻게 다른지 좀더 이해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샘이 말한대로 '확장성'과 '배타성'이라는 특징으로 나뉘기도 하네요.
    '다른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하는 '우리'.. 동시에 '개체적 실존'을 부정하지 않는 '우리'... 앞으로도 계속, 아마 끝날 때까지 우리의 화두가 되겠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