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영성 세미나

영어&영성 세미나 다섯 번째 시간 후기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07-17 17:41
조회
143
 

이번주에는 <Ubuntu> 교제의 세 번째 챕터의 진도를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제목은 ‘HOW UBUNTU CAN BE A GIFT TO THE WEST’였는데요. 그 서두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저자는 본인이 사제의 품을 받는 과정에서 느낀 서구 교회의 문제점이 나오고 그 해결책은 역시 우리의 우분투뿐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두 가지가 흥미로웠습니다. 첫 번째는 서구의 종족중심주의(tribalism)가 고스란히 환경문제로 이어진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찰스 테일러가 제기한 영성의 부재냐 과잉이냐의 이분법이었습니다.

In addition to the many ways in which competition constrains the development of truthful interpersonal relationships, it also takes a toll on our natural environment.

저는 이 구절이 나왔을 때 무척 관심이 갔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환경문제를 보통 우리가 그러듯 욕망이나 경제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의 문제에서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타자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의 우리 마음의 협소함이라는 문제입니다. 물론 ‘경쟁’이 환경문제를 부추긴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경쟁이 심화되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저자에 따르면 이기주의와 그것의 축적인 종족중심주의(일종의 집단이기주의)입니다. 확실히 ‘우리’의 범위가 한정적이고 그 경계선이 뚜렷할수록 저들 ‘다른 놈들’과 맞서고 배척하는 경향은 훨씬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스포츠에서도 국기나 지역의 소속을 달고 뛰는 것이 훨씬 격렬해지는 것 같습니다. 놀이의 일종인 스포츠가 이럴진대, 목숨이 달린 전쟁이나, 무역, 학문, 에너지 등의 분야는 어떨까요? 우리 애, 우리 지역, 우리 민족, 우리 국민이 잘 되어야만 하는 것이 최우선 됩니다. 다른 이들이 어떻게 되든 말이죠. 동일시는 언제나 배제를 낳고, 경쟁은 팔이 안으로 굽을 때 타오를 연료를 얻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종족중심주의에서 이런 경쟁의 심리가 환경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됨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미국인처럼 물과 에너지를 소비하면 지구가 몇십 개는 필요하다는 말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게다가 정말로 아프리카의 많은 호수가 초국적기업(백인 국가의 기업)이 주도하는 장미나 커피 같은 원예나 고부가가치 농업 때문에 말라가고 있음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실 백인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동남아로 엄청난 양의 생활 폐기물을 수출하고 있고, 아프리카나 중국(소수민족의 영토이긴 하지만)로 원자력 폐기물을 수출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잘 모르고, 잘 모르게 되어 있지만 말입니다. 네 덕에 내가 살고 있다는 감각, 우리는 서로 의존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 즉 우분투의 정신이 강조된다면 이런 일이 마구 일어날 순 없겠죠.

Talyor thinks this modern moral predicament is dangerous. (...) The modern tendency to reject and deny deep spritual aspirations and intuitions, he argues, also denies part of humanity. (...) On the other hand, linking an ethic of benevolence to religious or nationalistic ideology has led to destructiveness, not only in past centuries but in our own. Talyor insists that avoding this problem is impossible.

기억에 남는 두 번째 찰스 테일러의 딜레마(?)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테일러는 근대 사회에서 도덕의 부재에 대해 지적합니다. 영적인 열망이나 통찰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는 근대의 경향은 인간성이나 박애를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박애의 윤리를 종교적 혹은 국가적 신념에 연결시키는 것은 파괴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테일러는 이 문제를 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성장을 향해가는 것과 그것이 종교적 신념처럼 이데올로기화되는 것은 매우 가까이 닿아 있고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위험이 있습니다. 근대의 경향처럼 이기주의의 파괴 아래 놓이느냐, 보다 선하고 집단적이지만 종교적 신념의 파괴 아래 놓이느냐. 이것도 정도는 공감이 됩니다.

우리는 종종 박애나 휴머니즘을 내세운 자선이나 선교 등의 활동이 수혜자들에게 폭력이 되는 경우를 발견합니다. 빈곤이나 문맹을 퇴치하겠다며 서구가 아프리카나 남미에 행한 일들이 그 예지요. 그들은 자신들의 ‘선’ 속에서 그곳에 도로를 깔고 공장과 학교와 병원과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 순간 원주민들이 그들의 전통 속에서 유지해온 앎, 치유, 일, 신앙, 이동 등의 가치들은 모두 미개나 야만으로 불리게 되죠. 사실 이렇게 자선과 선행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이야 말로 가장 강력한 파괴일지도 모릅니다.

저자는 이기주의에도 그렇다 이데올로기적 자선에도 빠지지 않고 우리의 영적인 연결성을 향상시킬 길은 바로 우분투뿐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요? 그건 다음 주에 읽게 될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상호의존성이 신념으로서가 아니라 존재론적 이해로서 받아들여질 때 저 두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 것 같은데, 우분투가 그것을 잘 보여줄까요? 다음 주에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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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19 10:23
    서구 교회가 죽어가는 이유가 '종족중심주의'로 이어지는 '개인주의의 축적'에 있다는 지적이 흥미로웠어요. 일리치와도 인연(?)이 있는 찰스 테일러의 주장도 고개가 끄덕여졌고요. 그런 통찰에 이르렀음에도 여전히 '개인적 자아'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 테일러의 한계를 보면서는 우리에게 이런 인식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네요.. 계속 '우분투'에서 힌트를 얻어봐야겠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