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영성 세미나

여섯 번째 시간 후기

작성자
윤순
작성일
2021-07-21 12:25
조회
188
저는 영어&영성 세미나에 중간에 합류했습니다. 이 세미나에 다섯 번밖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뿌듯함이 생겼습니다. 영어를 오랫동안 접하지 않아 저에게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더듬더듬 읽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만, 이 점 때문에 어떤 문장을 대충 안다고 단어나 문장 사이를 설렁설렁 건너뛰지 않고, 차례차례 읽을 수밖에 없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일단 모르는 단어를 찾아가며 읽어야 하고, 앞 뒤 문맥에 맞도록 문장을 번역하며 읽어가야 하기 때문이지요. 한글로 된 책은 어떤 단어를 대충 안다고 퉁치고 자기 맥락 안에서 쭉 읽게 됩니다. 어찌 보면, 경제적인 관점에서 익숙한 언어(모국어)로 책을 읽으면 안다고 치고 대충 넘어 가는 일이 허다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공동체에서 저희가 공부하는 책들이 주로 철학책이다 보니, 한글인데도 ‘하얀 것은 종이요, 까만 것은 글씨네’라고 느낄 때가 자주 있습니다. 자기 맥락 내에서는 읽어 낼 수 없으니까 철학책이겠지요. 이 경우는 안다고 대충 넘어갈 수 없기에, 조금이라도 책과 소통하려면(책을 이해하려면) 웬만한 외국어 읽기보다 더 외국어를 번역하며 읽는 것처럼 질적으로 양적으로(집중해서 많은 양의) 시간이 들어갑니다. 물론 단어도 찾아야 합니다. 사전에서가 아니라 다른 관련 해석서에서 말이죠. 어떤 철학을 해석한 책 역시 고단한 경험을 할 만큼 난해한 책들이 주를 이루지만, 이를 통과하면서 가지게 되는 그 철학 책의 어떤 용어, 문장이 다르게 이해되는 신기한 경험은 공부를 지속하게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읽고 싶은 책이 무궁무진해 집니다. 한글로 읽고 있지만, 내 말로 번역하는 지난한 과정을 겪어야 조금 이해되었다고 느껴집니다. 이 느낌을 알고 싶다면, 철학책 추천합니다.

외국어로 된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외국어 뿐 아니라, 변역된 모국어 용어가 맞는가, 문장에서 앞 뒤 맥락을 잘 연결하고 있는가를 의심하는 일이 문장마다 일어나지요. 외국어 책을 읽는 것은 한 문장 한 문장 이 의심이 끊이지 않기에 고단하지만, 많은 시간과 집중이 필요한 활동이기에 모국어로 쭉 읽어버리는 것과는 다른 경험을 읽는 자 에게 안겨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배경 지식이 협소하다 보니 읽을 만한 마땅한 영어로 된 책을 고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번역가 선생님이 함께하는 영&영 세미나는 이 욕구를 충족시켜줄 최적의 세미나가 아닐까 합니다.^^ 영어 문법 설명도 해주십니다. 영&영 세미나 후기가 처음이라 서론이 길었네요.

우리가 읽고 있는 <UBUNTU : I in You and You in Me>는 성공회 주교인 투투주교의 사상과 말씀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는 책입니다. 아프리카 출신의 영국 성공회 주교인 투투는 서양의 개인주의에서 비롯되어 일어나는 세계적 여러 폐해에 대해 공동체적 아프리카의 전통 사상과 결합된 기독교를 소개합니다. 서양의 개인주의적 기독교가 아닌 공동체적인 사상이 기독교와 결합된 'Ubuntu'에서는 ‘나’가 타자와 상호의존적으로 연결되어서 출현하는 존재가 됩니다. 'Ubuntu'는 개인이 먼저가 아니라 공동체가 먼저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있는 세계관을 갖도록 만들어 주지요. 이에 따라 신도 다시 정의됩니다. 앞 시간에 ‘교회가 없어지게 되는 것도 신의 명령이기에 기독교적이다?’ 등의 반기독교적인 문장이 저에게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Ubuntu시점의 세계관은 개인주의에 의해 피폐해진 현대 서양의 문화가 다르게 변화하는 데에 큰 선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장의 제목이 'How Ubuntu can be a gift to the west'입니다. 이 맥락에서 서양인들이 아프리카의 전통 사상에서 공동체적 가치를 배우는 것이 현대 서양사상(특히 인종차별주의가 바탕이 되는 그들의 인간에 대한 몰이해)에 대해 좋은 영향 끼칠 수 있고, 또한 서양의 문화를 통해 아프리카인도 특별함에 대해 더욱 깊은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면에서 서양과 아프리카의 사상은 서로 풍부하게 만드는 작용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Human beings, utterly fragile, at the mercy of capricious world and at any moment exposed to the possibility of affliction, have two points where they are linked to something else. One is the capacity for attention to someone else, the waiting that is an intense receptivity to that which comes from outside; the other is the ineradicable expectation in every human being that something positive will be done to us.(84p)

(변덕스러운 세계와 시기 때문에 고통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부서지기 쉬운 인간에게 다른 것들과 연결될 수 있는 두 지점이 있다. 하나는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에 대한 강력한 감수성인 기다림이라는 다른 사람에 관심을 갖는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행해질 것이라는 모든 인간 안에 있는 뿌리 깊은 기대이다.)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배우는 것을 통해서만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 존재가 외부와 연결되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공생에 대한 투투주교의 이해를 바탕으로 나왔습니다. 인간은 타자와 반드시 연결되어야 생존할 수 있는 조건 안에 있습니다. 위의 인용문은 이 조건에 따라 외부와 연결될 수 있는 인간이 가진 두 가지 지점에 대한 설명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정아샘이 추천해 주신 시몬 베이유의 글에서 ‘집중’과 다른 ‘관심’에 관해 이야기 했습니다. 외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것이 관심이기에, 외부의 작용이 자신에게 미치는 ‘수동성의 힘’을 강조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 여러 의견을 나누어 보았는데요. 이 ‘수동의 힘’이 니체가 강조하는 능동의 힘, 자기 극복의 방향과는 다른 게 아닌가라는 질문이 제기 되었습니다. 함께 세미나 하시는 선생님들께서 니체는 적극적인 힘을 강조하지만, 니체의 글을 읽다보면, 다른 한편에서 일상에서 세상과의 마주침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에 대한 예를 들어 주셨는데 생각이 나지 않네요.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든 상호적으로 작용하는 순간에는 수동과 능동 어느 한 가지 힘만 작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두 가지 방향이 동시에 작용한다는 것, 수동과 능동의 동시성에 대해서도 서로 의견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서양 사상에서 비롯되는 경쟁의 폐해지만, 우리도 모르게 잘하는 짓이라고 하고 있는 이율배반적 행위에 대해 투투주교가 재미난 비유를 가지고 하신 말씀의 인용입니다.

 

At school you must not just do well, no, you must grind the opposition into the dust. We get so worked up that our children can become nervous wrecks as they are egged on to greater efforts by competitive parents. Our culture has it that ulcers have become status symbols.(84p)

(학교에서 당신은 단지 잘 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상대를 먼지가 되도록 갈아주어야 한다. 우리는 경쟁적 부모에 의해 더욱 높은 강도의 노력을 하도록 선동되어진 아이들이 불안한 잔해가 될 수 있도록 열을 올린다. 우리(서양)의 문화는 궤양이 신분의 상징이 되는 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개인주의적 경쟁에서의 우월한 지위(성공)를 위해서는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은 가차 없이 밞아주고, 자신의 건강까지 헤치는 지경까지 열심히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주교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열심히’라는 강력한 구호로 지금도 자신과 아이들을 다그치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In African traditional religions, formal distinctions between the sacred and the secular, the spiritual and the material dimensions of life, do not exist. Life and religious expression are one, since the invisible world of the sacred is so intimately linked with ordinary life.(86p)

(아프리카 전통 종교는 성과 속 사이에, 삶의 정신과 신체 차원 사이에 선제적 구별이 없이 존재한다. 성스러운 보이지 않는 세계는 일반 삶과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삶과 종교의 표현이 하나이다.)

 

성스러운 세계와 세속을 뚜렷이 구별하여, 주일에 교회(성스러운 세계)에 갔을 때만 신과 함께 있게 되는 서양의 방식이 아닌 자신의 일상이 성스러운 세계와 분리되지 않고 모든 곳에 신이 함께 하는 것이 서양 기독교와 다른 아프리카 전통 종교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투투는 영국성공회주교입니다. 분명 서양 기독교인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아프리카 태생이기도 합니다. 그는 아프리카의 기독교 Ubuntu(우분투)를 주장합니다. 다음은 그가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My task, however, is to show that Christian spirituality can be genuinely personal only to the extent that it is practiced communally. It is recognizable and intelligible only when it relates fully to one's neighbor.(88p)

(나의 임무는 기독교적 영성이 공동체적으로 수행되는 것으로 확장되었을 때만이 진실한 개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이웃과 충분히 연결될 때만이 인식되고 이해될 수 있다.)

 

개인은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 다른 것들과 상호의존적인 관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Ubuntu(우분투) 정신은 강조합니다. 기독교적 영성도 마찬가지입니다. 투투주교에게 나와 다른 것을 배척함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기독교는 비판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Apartheid(인종차별정책)을 장려하는 종교가 된 기독교는 비판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을 알고 이해하기 원한다면, 자신의 이웃과 연결되어야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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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22 11:01
    '하얀 것은 종이요, 까만 것은 글씨네' 느낌... 저도 잘 알죠ㅋㅋ 그런 책을 함께 읽으면서 조금이나마 내 말로 이해하게 되는 느낌도요. 그러면서 말씀하신 것처럼 읽고 싶은 책이 무궁무진해지고요^^
    인용문으로도 뽑아주셨듯이, 이번 주에는 우분투 정신에 기반한 아프리카의 영성과 개인주의에 기반한 서양의 영성이 어떻게 다른지 볼 수 있었죠. 우리 귀에도 굉장히 익숙한 말, 'Do you have a personal relationship with Jesus?'는 정말 서양 기독교인들의 태도를 한눈에 보여주는 것 같아요. 왜 'Do you have a 'communal' relationship with Jesus?'라고는 묻지 않느냐는 저자의 말에는 여러 생각을 하게 되고요. 신과의 공동체적 관계란 뭘까 궁금해지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