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 절차탁마

절탁 서양 3학기 네 번째 시간(10.10)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10-06 14:14
조회
134
“한 정신의 강함은 그 정신이 곧 얼마나 ‘진리’를 견뎌내느냐에 따라,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어느 정도까지 정신이 진리를 희석시키고 은폐하며 감미롭게 만들고 둔화시키고 위조할 필요가 있느냐에 따라 측정된다.”(니체, 《선악의 저편》, 책세상, 69쪽)

니체는 ‘행복’을 비난하는 걸까? 토론 중 이런 질문이 나왔습니다. 분명 니체는 평균인들의 안온한 행복에 야유를 보냅니다. “푸른 목장의 일반적인 행복, 즉 모든 사람에게 삶의 안전, 무사, 쾌적함과 안도가 있는 행복”(75쪽)을 추구하는 자들을 지독하게 비웃습니다. 또 “행복이나 미덕은 논거가 되지 못한다”(69쪽)라고 말합니다. 어떤 학설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거나 유덕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그 학설을 진리로 여길 수는 없다는 것이죠.

이런 의문이 듭니다. 니체는 진리에의 의지에 의문 부호를 붙였는데, 왜 여전히 어떤 ‘확실성’을 견지하는 것처럼 보일까요? 관점적인 것과 가상이 삶의 토대라고 한다면, 어째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들을 진리라고 이름붙이고 행복한 어리석음 안에서 살아가서는 안 되는 걸까요? 어째서 우리는 여전히 힘들게 진리를 ‘견뎌내야’ 하는 걸까요?

니체라면, 우리가 생성하고 변화하는 ‘이 세계’에 늙고 병들고 사멸하는 ‘이 신체’를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부단한 변화와 운동으로서의 삶의 한 지점을 포착해낸 스냅사진 같은 것입니다. 삶에 행복이 수반되는 것처럼 당연히 삶은 불행과 고통 또한 내포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운동으로서의 삶이 통과하는 특정 지점을 특권화하여 행복이라 부르고 그것을 다른 지점들과 대립시킬 때, 우리는 결국 삶을 비방하는 자가 되고 만다는 점입니다.

니체는 ‘진리’라거나 ‘행복’이라고 하는 실체를 두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누구의 진리인가, 누구의 행복인가를 질문하죠. 말하자면 니체는 중산층적인 ‘행복에의 의지’에 대해 질문하는 것입니다. 동시대의 평균인들(자유정신으로 오해되는 이들도 포함하여)이 전제하고 있는 행복의 이미지, 즉 ‘고통이 제거된 상태로서의 행복’이라는 선량하고 안온한 행복의 관념에 사실은 삶을 비방하는 금욕적 이상주의가 스며들어 있음을 지적한 것이죠.

니체가 보기에 우리가 몸을 지니고 살아가는 한, 그리고 천국이 아닌 현세를 살아가는 한 고통을 받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그런데 고통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유지하고 있던 특정한 상태를 교란하는 마주침일 것입니다. 특정한 방식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들을 해체하는 마주침. 우리에게 익숙한, 우리가 안락함을 느끼는 관계나 고착된 상태를 깨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 니체가 ‘힘’을 통해 세계를 설명할 때, 니체는 사실 이러한 고체적 형태들을 깨는 흐름들, 운동들, 도주하는 힘들이 세계의 진면목임을 말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운동들의 한 순간, 부분, 일시적 결과를 취하여 그것을 실체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미분화된 힘들의 부단한 운동들에 동참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즉 부단히 외부 세계에 의해서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되고 또 세계를 특정하게 굴절시키면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로 되어가고 있는 거죠. 우리의 신체는 그러한 변용의 과정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은 너무나 둔중합니다. 그래서 의식으로 하여금 생에 속하는,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의 본질이기도 한 예측 불가능한 마주침들을 긍정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불신’이라는 과업을 수행해야 합니다. 니체는 오늘날의 철학자들에게 “의심의 심연에서 가장 악의적인 곁눈질을 해야 할 의무”(64쪽)를 부과하는데, 이는 바로 ‘의식’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내는 인간적인 표상들에 대한 의심과 악의를 말하는 것이겠죠.

“우리는 심지어 궁핍이나 자주 변하며 엄습해오는 병에 대해서조차 감사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어떤 규칙이나 그 ‘선입견’에서 해방시켜주기 때문이다.”(니체, 《선악의 저편》, 책세상, 76쪽)

그런데 바로 이 악의와 불신의 인간들은 또한 감사의 인간들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예측 불가능한 마주침들을 감사함으로 경험할 줄 아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세계가 정말로 우리의 의식이 재현하는 그대로 존재한다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모든 원인들을 모두 다 계산하면 그것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도 예측할 수 있는 고전 물리학적인 세계 속에서 펼쳐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의 관점 안에 질식되고 말지도 모르니까요.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질문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언제 스스로의 당연함에 의문을 품고 질문을 구성하게 되는 걸까요? 왜 누군가는 아주 사소한 경험도 자신의 관점을 전환하는 계기로 삼을 줄 아는데, 다른 누군가는 온갖 것들을 겪고서도 익숙한 해석의 방식으로 되돌아오는 걸까요?

저는 우선 질문을 한다는 것, 관점을 전환한다는 것, 해석을 바꾼다는 것은 우리의 의도에 달려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순수한 인식충동을 지닌 우리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우리에게 폭력적으로 닥쳐오는 사건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주체의 의지와 외부 세계의 사건은 분리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 똑같은 사건을 겪고도 누군가는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이겠죠(그 자체로 질문의 계기를 품고 있는 사건은 없다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사건을 기다리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해석 방식에 일방적으로 규정당하지 않을 수 있는 조건들을 마련하고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 단순한 삶을 사는 것. 항상된 리듬을 갖는 것. 이런 것들이 '가벼워지기 위해' 우리가 당장 실행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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