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 절차탁마

절탁 서양 3학기 다섯 번째 시간(10.17)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10-15 18:48
조회
127
니체는 ‘신의 죽음’을 완수하고자 합니다. 인간은 신을 만들어냈고 또 제 손으로 죽여버렸습니다. 그런데 신을 죽일 때 인간은 신을 필요로 했던, 처음에 신을 이 세계에 불러들였던 인간 자신 또한 극복했던 걸까요? 아니면 혹시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무엇인가에 헌신하기에는, 현대인들은 너무나 바빠져버린 것이 아닐까요? 단지 신 대신에 숫자로 표현 가능하고 명확히 손에 잡히는 것처럼 보이는, 진보라는 이상을 숭배하게 된 것이 아닐까요? 인간은 신을 죽임으로써 신이라는 멍에로부터 진정 풀려난 것일까? 혹은 인간들은 정말 신으로부터 해방되어도 좋은 존재인가? 니체는 이렇게 질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니체가 바라보는 ‘종교적 인간’은 예술가입니다. 니체에 따르면 신 안에서의 삶, 경건성이란 “진리를 전도하고자 하는 의지이자 어떤 경우에도 비진리를 향하는 의지”(98쪽)입니다. 종교적 인간은 세계를 위조하는 자, 예술가처럼 자연을 변조시키는 자입니다. 그리고 종교적 인간은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 자신을 진리로부터 보호합니다. 때 이르게 진리에 노출될 경우, 인간은 파멸하게 되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죠. 즉, 니체는 종교적 인간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변조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사실 생존본능의 표현이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교적 인간은 인간들을 어떠한 진리로부터 보호하고 있는 것일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세계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 우주는 인간을 중심으로 돌지 않고 인간을 닮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동양식으로 말하자면, 천지불인(天地不仁)! 그런데 고통을 받고 있는 인간에게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통찰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에 사실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 이러한 사실은 그를 파괴해버릴지도 모르죠. 신을 만들어낸 것은 종교적 인간의 예술가적 천재성입니다. 창조주이자 인격을 지닌 신이 발명되는 순간, 세계는 무한히 의미로 가득찰 것이기 때문이죠. 모든 사건들은 신이 우리를 위해 마련해놓은 시련이나 은총일 것입니다.

물론 신은 이미 죽었습니다. 신의 존재에 의해 정당화되는 경건한 세계, 목적론적 세계가 아무리 좋아보여도 우리는 거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니체는 돌이킬 수 없는 신의 죽음을 완수하고자 합니다. 어떻게 신의 죽음을 완수할까요? 저는 56절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여기서 니체는 염세주의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사람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쇼펜하우어 철학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곤 하는, 그리스도교적이며 여전히 도덕의 속박이나 망상에 의해 규정되는 염세주의보다 더 멀리 간 사람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니까 세계가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세계와 삶에 대한 비난으로 느끼지 않는 사람, 이미 선악의 저편에 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이죠. 니체는 놀랍게도 그런 사람은 염세주의와 정반대되는 이상에, “가장 대담하고 생명력 넘치며 세계를 긍정하는 인간의 이상에”(93쪽) 눈을 뜨게 된다고 말합니다. 저는 여기서 니체가 진정한 의미에서 신(이상)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계속해서 극복하는 자, 계속해서 자신의 관점을 변환하는 자일 것입니다. 그런 자인 한에서 그는 하나의 가치, 하나의 도덕, 하나의 관점의 속박을 벗어버린 자이며, 선악의 저편에서 스스로의 좋음을 스스로의 의미를 생산해낼 줄 아는 자일 것입니다. 그는 종교적 인간처럼 의미를 생산해내지만, 그것은 신이라는 보편적 일자에 대한 복종으로 귀결되지 않고 끊임없는 변이를 겪는 자신의 몸과 생성하는 이 세계를 긍정하는 과정으로서의 삶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우선 질문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종교적 인간일 수 없는 우리는 지금 어디에 와 있을까? 우리의 허무주의는 아직도 도덕적 속박에 갇혀 있지 않은가?

다음 시간에는 <선악의 저편> 6장 '우리 학자들'과 7장 '우리의 덕'을 읽고 과제를 작성해오시면 됩니다~ 그럼 곧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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