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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탁 서양 3학기 여섯 번째 시간(05.21) 공지 : 자기 자신을 위한 공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10-23 17:22
조회
125
“대중들은 오랫동안 철학자들을 잘못 보아왔거나 오해해왔다. 즉 학문적인 인간이나 이상적인 학자로 아니면 종교적으로 고양된 탈감각적이고 ‘탈세속적인’ 몽상가나 신에 도취한 사람으로 잘못 보아왔거나 오해해왔다. (…) 지혜라는 것, 이것은 천박한 사람에게는 일종의 도피처럼 보이며 좋지 않은 게임에서 잘 빠져나오는 수단이자 기교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정한 철학자는―우리에게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가, 나의 친구들이여? ― ‘비철학적으로’ ‘현명하지 못하게’, 무엇보다도 영리하지 못하게 살아가며, 인생의 수백 가지 시련과 유혹에 대한 짐과 의무를 느낀다 : ―그는 스스로 끊임없이 모험을 감행하며 좋지 않은 그 게임을 한다.”(니체, 《선악의 저편》, 책세상, 174쪽)

앎이란 무엇일까요? 배운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왜 알고자 하고 배우고자 할까요? 우리는 왜 일요일 아침마다 모여서 답도 안 나오는 철학 책을 펴고 뚜렷한 결론이 나지 않는 토론을 계속 하는 걸까요? 우리가 지식을 축적하고자 했다면 더 쉬운 개론서도 많을 것이고, 학위 취득을 원한다면 대학에 갔어야 했을 것이고, 삶의 지혜 같은 걸 얻으려 했다면 명사들의 강연장에 갔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찌된 일인지, 몇몇 우연과 각자의 욕망들이 엮여서 우리는 플라톤, 루크레티우스, 아우렐리우스, 스피노자, 그리고 이제 니체를 무모하게도 직접 만나고 있습니다. 저는 어설프더라도 제 스스로의 힘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제 언어로 제 삶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헤매더라도 직접 삶의 좌표를 찾고 방향을 설정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일종의 DIY 정신이랄까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아나가기. 지금 제 수준에서 이해하는 공부란 이런 것입니다. 저는 이런 관점에서 위의 인용문을 읽었습니다. 철학자란 누구인가? 니체가 보기에 철학자는 위험하게 사는 자입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질문하는 사람입니다. 무리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상식을 적당히 따르며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자. 스스로 평가하고 의욕하고 창조하는 자. 그렇기 때문에 미련하게 위험에 처하는 자. 저는 니체 자신이 떠올랐습니다. 니체가 바그너라는 인물 옆에, 그리고 쇼펜하우어 철학 근처에 계속 머물러 있었더라면 어땠을까요? 당대 독일 청년들의 염세주의적 낭만주의에 적당히 편승했더라면? 아마 그는 훨씬 더 유복한 삶을 살았겠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인식과 학문은 자신의 “가치와 유용성”을 증명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실험하고 또 긍정하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이었죠.

니체는 어떻게 해야 우리의 배움이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합니다. 어떻게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닌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할 것인가? 어떨 때 앎은 우리 자신을 위한 앎이 되는가? 어려운 문제입니다. 분명 학문적 지식도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객관적이고 유용한 앎이,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을까요? 이런 앎이 우리의 사유 역량과 존재 역량을 증대시켜줄 수 있을까요? 니체는 정보에 불과한 앎, 누구도 불편하게 하지 않고 인식하는 자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지도 않는 앎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수도 없으리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각자에게 고유한 것이며, 다른 누구도 그에 대해 해답을 제시해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벙벙한 상식, 보편적 당위 같은 것들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각자가 놓인 지점, 각자가 걸려 넘어지는 문제, 각자의 번뇌와 각자의 욕망. 이런 것들을 외면하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는 모험을 감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딱 떨어지는 답이 주어져 있지 않은 질문을 던져야 하고, 우리를 의존과 예속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우리 자신의 자명성에 의심의 눈길을 거두어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개념이나 텍스트, 다른 누군가의 사유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안전한 지반을 떠나고 모험을 감행하기를 되풀이하는 자기 자신의 정신적 여정 속에서만 우리는 항구적으로 스스로의 구원을 실행할 수 있겠죠. 니체에게 철학이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객관적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놓인 자리로부터 예측 불가능한 한 발을 내딛는 것.

니체는 삶을 강도 높게 겪어내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배움을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의 배움에서 지식은 길을 찾기 위한 수단이자 질문을 구성하기 위한 재료입니다. 우리는 니체의 텍스트에도 예외를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니체의 철학 또한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 자신의 현실을 문제화하기 위한 수단이자 재료입니다. 그러니까 니체를 잘 써먹어야 합니다. 니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니체가 지금 각자 자신에게 어떤 질문을 촉발시키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겠죠. 이 점을 품고 남은 세미나에 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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