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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탁 서양 3학기 일곱 번째 시간(10.31) 공지 : 고독이란 무엇인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10-29 22:36
조회
140
이번 주에는 《선악의 저편》 8, 9장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우선 가장 많이 이야기를 나눈 것은 ‘고독’이라는 주제였습니다. 훈샘이 이 주제로 글을 써 오셨는데요. 훈샘은 9장 284절을 가지고 글을 써주셨습니다. 여기서 니체는 “모든 공동체는 어떤 방식으로든, 어느 곳에서든, 어떤 때이든 사람을―‘천하게’ 만든다”(304쪽)라는 폭탄선언을 합니다. 그리고 고독은 무리 안에서 불가피하게 불순해질 수밖에 없는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방어하는 청결의 본능이라고 말하죠. 조금 의아합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공동체 생활을 지향하고 있고, 이러한 생활이 공부하는 삶의 필수적 요소라고 느끼고 있는데 공동체를 비방하는 니체의 글을 읽어도 괜찮은 걸까요? 니체의 무리 비판과 고독 예찬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물론, 니체가 모든 종류의 관계에 적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남들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자기 자신의 내면에 침잠하라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우리가 낭송하고 있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는 고귀한 우정을 찬미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니체가 비판하고자 하는 유형의 관계란 무엇인지를 질문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가령 261절에서 니체가 말하는 허영심 강한 인간이 형성하는 종류의 관계와 같은 것일 것입니다. 여기서 니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좋은 평판을 불러일으키려고 애쓰고, 그러한 평판을 스스로 믿어버리는 종류의 인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가치를 결정하는 데 익숙하지 못하며 남들이 자신에게 부여한 것 이상의 가치도 스스로에게 부여하지 못합니다. 타자의 시선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가치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인간. 이런 존재에게 타자와의 관계는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는 수단이 아닐까요? 이를 좀더 확장해서 이해해본다면, 자기 자신의 ‘좋음’을 중심에 놓고 행위하고 살아가지 못하는 자들이 만들어내는 도피처가 곧 니체가 비판하는 무리가 아닐까 합니다. 이것은 타인과의 관계일 수도 있고, 사회적 관습이나 시대적인 상식 같은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토론 중 ‘이해받고자 하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우리는 때로 이해받고자 하는 욕망을 느끼고, 누군가 내 마음을 속속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열망을 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욕망은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지니고 있는 본성 같은 것일까요? 그런 마음이 살짝 미심쩍은 것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언제나 인정해주고 보듬어주기를 바라는 욕망과 연관된다는 점입니다. 사실 우리는 누군가 우리의 모든 욕망들과 상념들을 속속들이 파악한다고 느낀다면 먼저 공포에 질릴 것입니다. 니체가 언젠가 말했듯이 우정은 많은 부분 서로에 대한 오해 덕분에 지탱되곤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재앙일지도 모릅니다! 이해받고자 하는 욕망은 사실 지지받고자 하는 욕망일 것입니다. 사실은 단지 ‘지금 그대로도 괜찮아, 넌 충분히 고생했어!’ 뭐 이런 말들을 듣고 싶은 거겠죠? 그런데 실질적으로 타인의 인정이 우리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분명히 어느 정도 공통된 지반 위에 놓여 있기는 하지만, 각자가 이 현실적 조건과 관계하는 방식은 모두 다릅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 각자가 겪는 문제도 그 돌파구도 동일할 수가 없죠. 자신의 문제를 진단하는 일도, 그로부터 도주로를 마련하는 일도, 자신의 건강을 발명하는 일도 궁극적으로는 각자의 몫입니다. 이해받고자 하는 마음, 거기에는 스스로의 예속을 욕망하는 반응적 힘이 스며들어 있는 게 아닐까요?

자, 그렇다면 모든 것을 혼자 하라는 말이냐? 혼자서 판단하고, 혼자서 진단하고, 혼자서 가치창조까지 다 하라는 말을 니체는 하고 있는 걸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니체라면 자기 자신에 이르기 위해 타자를, 또 공동체를 이용하라고 말할 것 같네요. 니체 역시 그랬습니다. 쇼펜하우어나 바그너, 고금의 여러 텍스트들, 니체의 친구들 등등 타자들과의 마주침들이 니체에게는 자기 자신에 이르기 위한 이정표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타자들과 만남으로써 기존에 자신이 세계와 관계하고 있던 방식을 변형하고, 자신의 이로움을 실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죠. 우리가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도, 함께 텍스트를 읽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일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 있을 때 우리를 규정하는 중력에 가장 취약하게 노출됩니다. 그런데 어떤 관계, 어떤 공동체는 다른 리듬을 만들어냄으로써 기존의 익숙함과 거리를 두고 다른 것을 시도할 틈을 마련할 힘이 됩니다. 결국 무리인가 고독인가라는 문제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와 타자와의 관계 모두를 함축하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 안에서 가장 익숙한 충동들에 계속 복종할 것인지 아니면 자기극복을 시도할 것인지. 그리고 관계를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도피처로 삼을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실험의 수단으로 삼을 것인지.

어찌어찌 <선악의 저편>을 끝까지 읽었습니다. 살짝 아쉬움이 남기도 하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푸코 선생님을 만나보아야겠죠! 다음 시간에는 <감시와 처벌> 1부 1장 '수형자의 신체' (제 책 기준 ~64쪽)를 읽고 책 내용을 잘 정리해오시면 됩니다. 오전에는 채운샘 강의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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