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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탁 서양 3학기 여덟 번째 시간(11.8) 공지 :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11-05 21:42
조회
160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하고 있던 건 결국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구나! 이번 채운샘 특강의 교훈(?)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이 인용된 이야기이고 개념입니다만, 저는 이에 대해 충분히 숙고해볼 기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나치의 홀로코스트 같은 충격적인 사건에는 그에 합당한(?) 무시무시한 음모나 악마적인 배후 세력 같은 게 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그런데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재판장에서 목도한 것은 악마성이 아니라 상투성, 진부한 평범성이었습니다.

악의 배후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이성적 존재라는 인간들이 몇 백만이나 되는 다른 인간들을 무참히 살해할 수 있었던 것일까? 물론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의 몇몇 핵심 세력들은 삐뚤어진 사상과 광기어린 지배욕과 억눌린 폭력성으로 사람들을 선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가 그처럼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수의 아이히만들이 존재해야 했을 것입니다. 질문하지 않고 복종하는 존재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그 일이 다른 존재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자신이 놓인 현실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힘으로 판단하기를 온 힘을 다해 거부하려는 노예적 의지. 자신이 놓인 상황에 일방적으로 규정당하는 상식적 인간의 무력함. 존재론적 예속과 짝을 이루는 사유의 불능.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악의 너무나 왜소한 정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니체는 그 누구보다도 맹렬하게 사유불능성과 싸우고자 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벌써 흐릿해진!?) 《선악의 저편》을 떠올려보면 거기서 니체는 ‘진리에의 의지’에 깃들어 있는 무조건적인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자 했습니다. 진리를 원한다고들 하는데 어째서 진리가 아닌 것을 원하지는 않는가? 채운샘의 설명을 좀 참고하면 여기서 니체는 생각함의 진부한 이미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마땅한 진리가 어디엔가 있다는 생각. 그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철학의 엄숙한 전통 앞에 머리를 조아려야 하고, 어떠어떠한 범주들에 친숙해져야 하고, 또 어떤 앎들이나 목소리들은 무가치한 것으로 배제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앎은 우리의 신체를, 느낌을, 역량을 배반하게 됩니다. 사유는 진리라는 목적지를 향한 관념의 여정이 되어버리고,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이 놓인 자리에 대해서는 무-감각과 무-질문으로 일관하게 되는 것이죠.

니체는 이러한 사유의 경직된 도덕적 이미지를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선악의 저편》에서 보았던 것처럼, ‘진리’라는 도그마에 깃든 확실성에 대한 집착은 삶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니체는 진리의 가치를 묻지 않는 철학자들, 보편과 상식의 이름으로 자신의 앎을 정당화하려는 대중적인 사상가들, ‘객관성’이라는 미명 하에 스스로 질문하고 자기 자신의 가치를 입법하기를 단념한 학문의 노동자들을 비판했습니다. 그렇다면 사유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니체에게 철학이란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다르게 느끼기 위한 시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경직된 신체가, 늘 익숙한 해석방식에 복종하는 정신이 우리를 사유불능으로, 허무주의로, 삶에 대한 부정으로 인도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니체적 관점에서 사유란 그 자체로 실천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 놓는다는 의미에서요. 이러한 치열한 사유의 운동, 느낌의 실험, 자기극복의 시도는 우리를 ‘어떤 곳’으로 데려다주지는 않습니다. 대신에 어떠한 이상도 꿈꾸지 않는 강인한 자유로움을 갖게 해주겠죠.

니체의 철학은 ‘지금까지처럼은 살 수 없다’라는 욕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푸코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어진 조건에 일방적으로 복종하지 않으려는 의지. 사회가, 제도가, 시대가 보장하는 보편적 올바름과 평균적 삶의 방식에 자신의 생을 내어주지 않겠다는 결기. 그런데 이러한 의미의 자유를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은 신중해야 합니다. 어떠한 조건 속에서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또 살아가도록 조건지어져 있는지를 섬세하게 살펴야 합니다. 그래야 이러한 조건 속에서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고 살아갈 것인지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니체와 푸코의 공통적인 방법론인 ‘계보학’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기원을 추적하는 것. 이들은 어떠한 진리도 초역사적이지 않다는 전제 속에서, 어떠한 앎이 진리로 출현하게 되는 역사적 조건을 탐구합니다. 어떤 것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라면, 당연히 우리는 어떻게 다르게 만들어볼 수 있을지를 질문할 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작업이야말로 사유의 상투성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길일 것입니다.

니체와 푸코는 비슷한 듯 하면서도 굉장히 다릅니다. 특히 문체가 그렇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면, 독자의 능동성을 최대로 촉구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니체의 텍스트는 간단히 말해서 ‘원관념’이 없는 비유와 상징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니체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어떤 느낌들을 표현하기 위해 상징도 이용하고 비유도 이용하고 논리도 이용하지만, 그것들은 일종의 효과일 뿐 어떤 본래적 의미를 지시하는 기호들은 아닙니다. 철학책은 낯선 느낌을 제공하고 다른 사유의 길을 낼 것을 촉구하지, 정보를 전달하거나 진리에 이르는 보편적 방법론을 제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푸코도 마찬가지로 지식이나 정보를 전달하는 일을 중심에 두지 않습니다. 가령 우리가 읽고 있는 《감시와 처벌》은 매우 특이한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푸코는 여기서 인과적 설명을 거의 배제하다시피 합니다. 푸코는 기원과 목적을 갖는 역사를 서술하는 데 관심이 없기 때문에 역사적 사건들을 시간 순으로 나열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대신에 우리의 상식이 흩어져버리는 역사적 단절, 불연속의 지점으로 우리를 내몰죠. 자신의 텍스트를 ‘연장통’으로 삼아 달라는 게 푸코의 진심입니다. 이쯤 되면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푸코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감이 잡힙니다. 그러니까, 푸코를 읽는 좋은 방법 같은 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푸코의 텍스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이 놓인 현실에 대해 질문하는 만큼 그 쓰임새를 발휘하는 연장이고, 각자가 놓인 조건 및 그 조건과 관계하는 방식은 상이하기에, 푸코를 읽어내는 길도 무궁무진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만큼 스스로 생각하기를, 질문하기를 시도하느냐―이것이 관건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감시와 처벌》 1부 2장 '신체형의 호화로움'을 읽고 과제를 작성해오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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