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 세미나

4.1 <차이와 반복> 1장 1-3절 정리강의 후기

작성자
임영주
작성일
2021-04-08 04:02
조회
333
작년 주역을 공부하면서 함께 읽은 것이 <차이와 반복>이었습니다. 역(易)의 세계만큼이나 들뢰즈님이 들려주는 차이와 반복 이야기도 무척이나 흥미로웠지만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올해 긴 호흡으로 조금씩 읽어가는 세미나에 합류해서 제대로 읽어가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적은 분량이라고 맘 놓고 있었더니 어느덧 서론을 지나 본론에 들어서 있네요. 올해도 역시나 읽을 땐 도통 모르겠고, 토론하면서 함께 얘기하다 보면 좀 이해할 듯하다가도 집에 가서 정리하려면 또 무슨 말인지 모르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깜깜한 와중에도 만나는 뭔지 모를 멋진 문장들이 뿜어내는 아우라에 이끌려서 꾸역꾸역 읽는 중입니다. 다행히 우리들의 헤맴 중간에 한 번씩 채운샘이 정리 강의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본론을 시작하면서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인 ‘차이 그 자체’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차이의 개념과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이 ‘차이’가 난다고 말할 때 보면 원래 그런 대상이 실체로 우선 주어져 있고 그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변하게 되거나 혹은 다른 것과의 관계에 의해 조금씩 달라진다고 봅니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것은 변하지 않은 실체가 있음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차이를 생각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변치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전제했을 때의 차이는 늘 그것에서 얼마나 달라졌는가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다른 것들을 생각해도 결국은 원본에 비추었을 때의 멀거나 가까운 거리에서 오는 차이일 뿐이므로 결국은 그 원본만을 떠올리는 결과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흔히 차이를 생각하는 방식이고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기존의 철학자들이 차이에 대해서 사유하는 방식입니다. 즉 그 자체로 그러한 실체들이 먼저 있고 이들이 후에 서로 관계를 맺게 된다고 보는 것이지요. 따라서 실체들 각각은 서로 독립적으로 있기 때문에 이들이 맺는 관계는 말 그대로 거들 뿐, 서로의 존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들뢰즈는 우리가 보는 어떤 대상은 변치 않는 본질이나 규정성을 가진 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 이들은 언제나 ‘바탕(fond)’과의 관계를 통해 떠오르는 일시적인 규정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바탕은 어떤 규정성을 가진 대상을 현실로 드러나게 만드는 힘들의 차이가 끊임없이 발생 되는 장으로 ‘잠재적 차원’이라고도 합니다. 대상이 어떤 형태를 가지고 현실로 드러났다면 언제나 이런 잠재적 차원에서 만들어내는 ‘차이’들과의 관계비만큼 규정성을 가진 개체로 떠오릅니다. 따라서, 개체들이 규정성을 가진 형태(form)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이들이 맺고 있는 바탕과의 관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됩니다. 이런 차이와의 관계로 인해 개체들이 특정 형태로 드러났을 뿐, 어떤 상황에서도 원래 그러한 채로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봅니다. 따라서 어떤 개체들이 아무리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해도 마치 보자기 아래에서 어떤 것이 솟아오르듯이 자신을 만들어내는 바탕과 늘 함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바탕은 모든 규정성이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차이들의 장이기 때문에 어떤 규정성도 갖지 않습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이런 차이를 끊임없이 생겨나게도 사라지게도 하는 규정할 수 없는 바탕의 본성을 ‘잔혹성’, ‘괴물’로 표현합니다. 보자기를 벗기고 개체들을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되면 잠도 잘 오고 편안해질 것 같은 데 삶은 그렇게 규정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또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닥치기도 합니다. 그리고 들뢰즈는 이렇게 규정할 수 없는 ‘파국으로서의 차이’를 사유할 때만 더이상 개념적 차이라는 동일성만 재생하지 않고 자신만의 ‘참다운 개념’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이렇게 모든 존재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바탕이 있음을 전제하게 되면 이 바탕과의 관계를 통해 현실로 드러나는 개체들은 그것이 다른 형상으로 드러날지라도 결국은 하나의 바탕에서 나온 같은 의미와 원리를 내장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것을 들뢰즈는 ‘존재의 일의성’이라고 하는데요. 즉 ‘일의성’이란 식물이든 동물이든 인간이든 다른 형상으로 현실화 되지만, 결국은 같은 생성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반면,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개체의 변치 않는 실체가 있다고 보게 될 때 존재들 각각은 애초에 다른 원리들로 되어 있다고 보게 됩니다. 즉, 각 개체들은 서로 질적으로 다른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에 따라 개체들을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까지 위계화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존재의 다의성’입니다.

겨우겨우 개념을 다르게 생각하려고 하다 보면 나 왜 이러고 있나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삶을 괴물이나 파국으로 보지 않고, ‘나는 나’인 것으로도 그동안 잘 살아왔는데 말이죠. 어떤 점에서는 어떤 것들을 규정성을 가지는 실체로 그렇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버리면 당면한 문제들을 단순하고, 예측 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 있어서 행복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이 나에게 유리할 때는 별 문제가 없어서 자만하게 되고, 나에게 불리할 때는 쉽게 절망해서 자책하거나 남을 원망하게 됩니다. 결국 존재의 일의성이나 개체성을 내세우지 않으려는 노력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있기 위해서임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전체 5

  • 2021-04-08 09:25
    공부하다 보면, 저희가 배우는 철학자들이 다 통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주체는 관계의 효과라는 것, 개체는 차이와 더불어 존재한다는 것, 일음일양의 운동 속에서 생멸하는 만물 등등 공통되는 지점들이 있어요. 이런 걸 보면 '우주의 변하지 않는 진리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이다(易而不而)'는 것을 조~금은 알게 됩니다. 이제 느낌 정도는 알았으니 본격적으로 들뢰즈의 차이의 논증을 사유하는지 따라가야 할 텐데요. 허허;; 라이프니츠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그리고 들뢰즈가 정리한 철학의 계보를 따라가다 보면, 공자의 '저술하되 창작하지는 않았다(述而不作)'는 말이 떠오르네요. 공자는 스스로를 성인처럼 문명의 기초를 건설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대신 전해내려오는 것을 자기 식대로 텍스트화했다고 하죠. 들뢰즈 역시 '차이와 반복을 사유한 철학자들', '일의성을 사유한 철학자들'.... 이렇게 정리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펼치죠. 공자와 비슷한 태도가 보였습니다. 그런데 주희에 따르면, 공자는 '술이부작'했지만, 텍스트화함으로써 도통을 만세에 전해내렸다는 점에서 이전의 성인들보다 문명에 기여한 바가 더 크다고 하죠. 그렇다면 차이와 반복을 정리한 들뢰즈의 공도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있겠죠?(그리고 그것을 읽고 전승하는 우리 역시? ㅋㅋ)

  • 2021-04-08 13:17
    '차이'개념은 정말 알 것 같다가도 설명하려면 금새 막막해지는 어려운 개념인 것 같아요. 규창쌤이 정성들여 정리해준 글을 읽으니 아, 이해된다, 싶습니다. ㅎㅎ 한 번 듣고 알아서 척척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지만..욕심이고 아만이겠지요. 공부는 역시 듣고 잊어먹고 듣고 또 잊어먹으며 반복하면서 근육을 길러가는 과정이 아닌가...뭐 그런 생각을 잠시 해봣습니다. 이 글은 스크랩해놓고 차이개념을 떠올릴 때마다 참고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2021-04-08 13:20
      난희쌤, 이건 제가 쓴 게 아니라 영주쌤이 쓰신 후기입니다.ㅎㅎ;; 어쨌든 저희의 공부가 선생님께 도움이 된다니...! 감동입니다! 언젠가 같이 들뢰즈의 사유에 빠질 기회가 있겠죠? ^^

      • 2021-04-08 13:26
        ㅎㅎ참, 제가 이렇게 허술합니다. 글쓴이도 확인하지 않고...영주샘, 뵙지는 못했지만 감사합니다. 규창쌤과도 언젠가 공부할 날이 올 거라 기대합니다. ㅎㅎ 거 참!!1

        • 2021-04-09 17:51
          워낙에 조금씩 읽어가고 있기 때문에 지금 합류하셔도 전혀 문제가 없으십니다. 규창님×영주샘×<차이와반복>을 한방에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들뢰즈님에게 취해 헤매이실 세미나원 상시모집중이오니 난희샘 컴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