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 세미나

나들이 세미나 1학기 마지막 강의 "차이의 체험"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1-04-27 19:55
조회
236
나들이 세미나가 어느새 한 학기를 마쳤네요! 야금야금 읽다 보니 어느새 1장 〈차이 그 자체〉도 읽어버렸습니다! 내용 파악보다는 들뢰즈에게 더욱 빠지게 되는 시간이었던 것 같네요. ㅋㅋ 그리고 오늘 4월 27일을 기준으로 동학이 한 명 더 늘었습니다! 같이 머리 싸매며 들뢰즈의 사유에 취할 벗이 생겨서 좋네요. 그건 그렇고 모두 한 주 쉬면서 앞에 나온 내용을 복기하죠. 저희가 새로 합류한 동학에게 설명할 때 모양이 빠지면 안 되잖아요? 특히 ‘나들이 1기 선임영주쌤’의 활약을 기대합니다. ^^

 

차이와 탈구축(de-construction)

《차이와 반복》을 읽으면서 저희에게 잘 풀리지 않았던 지점은 ‘이렇게 차이와 반복을 사유하는 것이 삶을 어떻게 다르게 보게 해주는 것일까?’였습니다. 이에 채운쌤께서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강의를 시작해주셨는데요. 듣고 보니 맨 처음 강의에서 해주신 주제가 이 질문에 대한 것이 아니었나 싶은데요. 물론 그때는 저희가 이런 질문을 갖지 않은 채로 읽었고, 지금은 질문을 갖고 읽는다는 점이 다르지만요. 차이를 동반한 반복이네요.^^

현대 철학은 ‘de-construction’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를 위시해서 칸트 등의 철학자들은 ‘있다’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있다’를 넘어가야만 할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있다’를 상정하는 이상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긍정’할 수 없습니다. ‘있다’는 ‘원래 그렇다’를 상정할 수밖에 없고, ‘원래 그렇다’를 규정한 초월적인 무엇을 알아야만 하고, 우리는 초월적인 것에 의존함으로써만 우리에게 닥친 사건들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여기서 어떤 해석역량도 발휘되지 않습니다. 실상 그것은 자신의 협소한 판단 체계로 분별한 결과입니다. 가령, 스피노자는 우리가 선악(善惡)이라 규정하는 것들이 원래부터 선악을 담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과 마주쳐서 좋음과 나쁨으로 변용된 결과라고 말합니다. 이 원리를 파악하지 못하는 인간은 변용과 무관하게 자신에게 닥친 사건들을 그 자체로 선악으로 분별합니다. 그리고 그 자체로 선악을 규정한 원인으로 ‘사회적 도덕’이나 ‘초월적 신’을 소환합니다. 이러한 도식 속에서는 들뢰즈가 말한 사유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도덕을 열심히 따르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도덕을 따르는 것만으로는 결코 우리가 겪는 문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채운쌤이 “도덕을 가진 자들의 학살이 부도덕한 자들의 살인보다 정의로운가?”라고 말씀하신 게 기억에 남네요. 정인이 사건이나 묻지마 살인사건의 발생 원인은 결코 우리의 도덕적 틀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 기준에서 끔찍한 짓을 저지른 사람이 실제로는 바른 사람, 도덕적인 사람이었다는 증언이 심심찮게 나옵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도덕을 준 신이 정말 어딘가 따로 있었다면, 이런 비도덕한 행위를 저지른 사람이 처벌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신은 없죠. 정인이의 부모는 우리가 그들의 비도덕함에 느끼는 분노만큼 처벌받지 않을 것입니다. 신에 기대는 것만으로는 결코 이 세계를 살아갈 수 없습니다. 신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따라야 할 도덕을 따로 명시하지 않았겠죠.

게다가 주어진 도덕에 충실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타자에 대한 폭력을 동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도덕에 따라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면, 사는 게 이토록 힘들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십자군 전쟁 같은 것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어진 도덕만으로 돌파하기에 삶은 모순투성이입니다. 그리고 십자군 전쟁도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의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해 벌어졌죠. 유럽 국가들의 입장에서 도덕에 근거한 행동이 이슬람의 입장에서는 끈질긴 침략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지금도 곱씹어 볼 지점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일어날 만한 범죄를 어떻게든 예방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을 착취하고 우리가 지구를 파괴하는 것에는 그리 절박하지 않습니다. 범죄 예방도 필요하지만, 편파적으로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것조차 도덕에 근거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체험과 사유

이러한 맥락에서 현대 철학은 ‘있다’의 사유를 전복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들뢰즈가 이 ‘de-construction’적 철학의 선구자로 꼽은 게 니체죠. 니체는 존재와 생성, 반복과 차이를 서양 철학사에서 가장 가깝게 사유했습니다. 들뢰즈는 이를 ‘일의성’으로 정리했습니다. 채운쌤은 일의성을 불교의 일수사견(一水四見)으로 설명해주셨습니다.

바다가 있지만, 모두에게 똑같은 바다란 없습니다. 인간에게 파란 바다가 물고기에게는 집이고, 천신에게는 유리, 아귀에게는 고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다를 오해한 것도 혹은 바다가 원래부터 집, 파란 물, 유리, 고름 같은 본질을 형상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각각의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은 바다의 본질이 따로 있지 않음을 반증합니다. ‘바다’라는 전체적인 지평은 집, 파란 물, 유리, 고름 같은 낱낱의 표현 속에서만 ‘바다’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바다’와 ‘집’, ‘파란 물’, ‘유리’, ‘고름’ 같은 표현들은 동등합니다.

일의성의 세계의 독특함은 이러한 표현들 속에서만 전체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낱낱의 표현은 ‘오해’가 아니라 그 나름의 실재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때 실재성이란 어떤 결여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완전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요. 각자가 바다를 다르게 인식하게 되는 까닭은 그 자체로서의 바다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 것이죠. 여기서 상이하게 인식하지만, 표현된 인식들이 모두 동등하다는 것이 성립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일의적, 즉 세계는 무-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무-의미를 들뢰즈가 얘기한 비(非)-존재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비(非)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가상적인 것을 표현하죠. 마찬가지로 무(無)는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라 규정되지 않음, 미규정적 차원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니체가 강조한 체험이란 이러한 ‘무-의미’를 경험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들뢰즈는 니체의 체험에 영향을 받아 여러 군데에서 사유와 연관 지어 말하죠. 체험으로서의 사유는 이전의 동일성이 와해되는 순간, 늘 머물던 공간이 아주 낯설게 느끼게 되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들뢰즈는 이러한 것을 예술로 규정합니다. 공부할 때도 이런 순간이 몇 번 있었던 것 같습니다. 책을 읽거나 토론하거나 강의를 들을 때, 가끔 구절이나 말이 날아와 꽂힐 때가 있습니다.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운데, 강렬하게 텍스트와 접속하게 되는 순간들인 것 같습니다.(나들이 세미나 토론할 때 특히 그런 게 많이 있어요. 빈말이 아니에요 ㅋㅋ) 그런데 저는 이런 것이 단발적으로 휘발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순간 반짝했다가 다시 흐리멍텅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ㅋㅋ;; 반면에 들뢰즈의 문장들은 이런 체험적인 것들로 가득합니다. 단순히 문학적이기만 했다면 저희가 하나하나 곱씹으면서 따라갈 매력도 없었겠죠. 그러고 보니 우리가 빠지는 텍스트들은 다 체험에서 기반한다고 봐야겠네요. 새삼 우리의 스승들에 대한 존경심이 다시 들고, 좀 더 진지하게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여담이지만, 노자가 도덕경에서 "굽은 것은 온전하고, 구부린 것은 곧은 것이고...(曲則全 枉則直...)"라고 할 때도 체험의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덕경을 다시 읽어보고픈 생각이 또 드네요. 어휴! 들뢰즈 덕분에 다시 읽고 싶은 게 참 많아요.

 

이번에 그렇게 진도를 많이 빼지는 않았습니다. 재겸쌤, 영님쌤과 함께 듣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다행이네요! 모두들 잘 쉬시고 5월 6일에 봬요~
전체 2

  • 2021-04-29 15:12
    저도 차이로부터 사유한다는 게 무엇인지, 어떻게 사유하는 것인지, 앞으로 읽어나가면서 이 질문을 계속 놓지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기 위해선 모든 규정들을 되물어야 한다는 말도요.
    '순간 반짝했다가 다시 흐리멍텅한 상태로 돌아가기'는 모두 마찬가지죠.ㅎㅎ 들뢰즈의 글이 어려운데 뭔가 좀 반짝!하게 하는 면이 있는 거 같아요. 이 즐거운 여정에 함께 할 친구가 한 명 더 늘어서 반갑네요.^^ 저도 1기 선임ㅇㅈ쌤의 더한 활약을 기대할게요!

  • 2021-04-30 18:51
    하나의 규정이나 판단 위에 서면 그 순간은 명료해지고 속이 편합니다. 하지만 이내 이 규정 때문에 나머지는 불편해지고 마음에 들지 않음 투성이로 둘러싸이죠.
    이런 번뇌에서 벗어날 방도는 결국 내가 쥐고 놓지 않은 판단을 내려놓고 바탕없는 바탕에 기꺼이 몸을 맡길 절대 긍정과 확신이 필요하죠.
    어렵게 한 자 한 자 읽고 오해했다 감동했다를 반복하는 것도 이런 무지와 두려움을 깨부수기 위한 과정인 것 같습니다.
    몸으로 말하는 사람이 되는건 참 어렵지만 정말 멋질 것 같긴 하네요. 다음 학기도 "야금야금" 망치질 해보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