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 세미나

2학기 첫 강의

작성자
둥글
작성일
2021-06-03 13:56
조회
167
1장 차이 그자체에서   6절과7절에 대한 강의이다. 이번 시간에도   칸트, 라이프니츠 , 니체,  플라톤, 장자와  부처님까지 모두 등장!  시뮤라크르를 발견한 플라톤에 대한 꼼꼼한 강의

들뢰즈가 보기에 헤겔은 차이가 생겨나면 어떤 것의 대립으로 파악하고, 차이를 모순으로 만들었다. 헤겔에게 무한은 모순과 지양이 무한한 방식으로 계속되는 것이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어떤 미세한 두 사물도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사물은 어떤 것도 똑같지 않다. 모든 사물에는 모나드가 있어 자기 안에 신을 함축하고 있다. 이 모나드는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를 펼쳐낸다. 라이프니츠는 무한히 작은 것에 초점을 맞췄는데, 차이를 사유하기보다는 신이라는 동일성을 도입했다. 헤겔과 라이프니츠는 차이를 발견했지만, 차이 자체를 사유하지는 못했다.

 

플라톤을 왜 주목해야 하는가? 단순히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차이를 종적인 범주로 규정한 것도 아니고, 차이를 무한 속에다 융합한 것도 아니고, 플라톤은 어떤 점에서 차이를 발견했다.  들뢰즈가 보기에 플라톤의 놀라운 점이다. 이 세계와 단절된 어떤 것들이 있는데,  그것이 시뮬라크르이다. 카피는 어쨌든 본에 근거를 두고 그것을 닮으려고 한다. 다 이데아를 분유 받고 있다. 그러나 시뮬라크르는 이데아를 닮지도 않았고 아예 지원도 하지 않는다. 이데아라고 하는 본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지 않다.

 

플라톤은 이데아와 카피들로 질서정연하게 세계를 구성하고자 했다. 그 세계의 이미지를 방해하는 것은 아예 닮지 않은, 근거가 없는 시뮬라크라다. 카피는 이데아라는 근거가 있다. 근거 없는 것들, 아비 없는 자식들 이런 것이 존재한다. 있다고 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광기, 어지럼증, 물질 중에서는 먼지, 아지랑이. 그런 류의 것들은 도무지 이데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도, 뭐가 있다고 하기도 없다고 하기도 어렵다. 이것들은 뭔가 보이지는 않지만, 그 보이지 않는 것들이 계속 작동하고 있다. 우리는 그런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런 것들을 플라톤은 시뮬라크르라고 한다.

 

금강경에서 모든 것은 환이라고 말한다. 그림자, 꿈, 메아리, 물거품, 소리, 도깨비, 귀신. 이런 것은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한마디로 하면 다 환이다. 다 마술과도 같은 것이다. 있는 것이 아니다. 동양식으로 말하면 기, 기도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정확하게 환에 해당하는 단어가 시뮤라크르이다. 환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시뮬라크르를 영어로는 환타지(fantasy)로 번역한다. 오페라의 유령, 팬텀(phantom)이다. 팬텀, 환타지가 시뮬라크르다.

 

이원론의 기원은 플라톤에게 있다. 플라톤주의를 전복한다는 것은 이원론을 전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적인 “이 전복은 플라톤적 성격들을 많이 보존하고 있다. 이는 불가피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기까지 하다.”(150) 지금 전복하는 것, 이 전복이 플라톤적인 것을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 “플라톤주의가 이미 일자(一者), 유비, 유사성, 심지어 부정성의 역량에 대한 차이의 종속을 대변한다는 것은 사실이다.”(150) 차이라고 하는 거는 여전히 다른 것이 아닌 것, 이런 것이다. 어떤 것은 다른 것과는, 차이라는 것은 다 부정, 내가 아닌 것으로만 사유하는 점에서 부정성의 역량이다. 그다음에 유비라는 것은 여기에 뭐가 있듯이 저기도 뭐가 있다. 하늘에 뭐가 있듯이 땅에 뭐가 있다. “플라톤주의는 길들여지고 있는 어떤 동물과 같다.” 거기에 ‘헤라클레이토스적인 세계가’ 으르렁거리고 있다는 부분이 나온다. 플라톤은 생성의 세계를 부정하지 않았다. 플라톤은 모든 것은 생성이라고 말한 헤라클레이토스를 한 손에 가지고 있고, 또 다른 한 손에는 모든 것은 영원하다, 우리가 속고 있어서 그걸 모르는 거라고 했던 파르메니데스를 한 손에 가지고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모든 것은 영원한 일자다. 부동이라고 말했다. 어, 세계가 변하지 않느냐고? 감각에 속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헤라클레이토스는 다른 편에서 세계는 한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다고.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고. 이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얘기다. 그 두 가지를 플라톤은 종합한 사람이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현상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나 그 변화하는 세계의 근거는 불변하는 이데아라고 말한 것이다. 다른 편에 헤라클레이토스가 있다. 이데아는 영원불멸한 이 세계의 끊임없는 근본이라고 얘기했다. 변화 생성하는 세계, 없다고 얘기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두 개를 나누어 놓고 하나가 다른 하나의 근거가 되는 세계, 그래서 당연히 우월한 것은 변치 않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헤라클레이토스적인 세계가 플라톤주의 안에서 으르렁거린다. 플라톤의 마지막 출구가 어디에 있는지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매개는 완성된 운동에 이르지 못했다. 이데아는 아직 세계를 재현의 요구들에 종속시키는 어떤 대상 개념이 아니다.”(150) 이데아는 대상이 아니다. 이데아를 모방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카피라고 말한다. 모든 구체적인 세계를 관통하는 본은 인간 자체다. 인간 자체라는 대상이 있나? 그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데아는 대상이 아니다. 본을 카피를 한다고 할 때도 사실은 그,  인간 자체를  카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건 재현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게 있다. “이데아는 아직 세계를 재현의 요구들에 종속시키는 어떤 대상 개념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어떤 생생한 현전이다.”(150) 이데아는 현상계 속에서 현현하는 것, 나라고 하는 구체적인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데아를 나라는 구체적 현상 속에서 드러내고 있다. “이 현전은 사물들 안에 ‘재현 불가능한’ 것에 의존해서만 이 세상 안으로 환기될 수 있다.” 이 ‘재현 불가능한’ 것이 이데아다.  이데아는 그 자체를 재현할 수는 없다. “역시 차이를 어떤 개념 일반의 동일성에 묶어두기로 선택한 것은 아니다. 이데아는 차이 그 자체의 순수한 개념, 고유한 개념을 찾는 것을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차이 자체의 개념, 이것은 시뮬라크르인데, 이데아가 완전히 포섭할 수 없는 얘들, 자꾸만 이데아가 내려주는 것을 안 받으려고 달아나는 얘들, 이런 얘들을 지금 플라톤은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주의에 대체 불가능한 것이 있음을 제대로 간파했다. 물론 그는 정확히 이 점 때문에 플라톤을 비판했다. 즉 차이의 변증술은 차이에 고유한 방법―나눔―을 지니고 있다.” 이 나눔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범주화가 없다. 합리적 이유가 없다. 체계가 없이 그냥 나눠서 자의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데아의 관점에서 볼 때, 그 방법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눔의 방법은 진정한 차이의 철학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모든 변증술적 역량을 말한다. 이때 변증술은 헤겔의 변증술이 아니다. 변증은 뭔가를 논리적으로 전개해가는 기술이다. 상대와 대화하는 기술이 변증술이다. 플라톤주의에 안에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논리 자체가 범주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차이가 고르게 배열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플라톤주의 안에 플라톤주의가 무너질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전복적 요소가 이미 깃들어 있다. 그것이 시뮬라크르이다. 시뮬라크르를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이데아를 위협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주의와 플라톤주의의 전복이 서로를 보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나눔은 ‘일반화’를 뒤집어놓은 것이 아니다. 플라톤은 이 종별화가 아니라 선별화하는데 있다. 순수한 얘들과 잡종을 나누는 것. 선별하는 것이다. 이제 그 순수함을 보전하려는 혈통이 있다. 이데아를 닮고자 하는 얘들이 있다. 이 혈통과 닮지 않는, 이 혈통의 바깥을 나누는 게 플라톤의 전략이었다. 플라톤에게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 더 순수에 가까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이런 게 차이다. “차이는 유의 두 규정들 사이에 있는 종적 차이가 아니다.” 차이는 선별된 계통, 다시 말해서 하나의 같은 유에 속하는 상반자들의 차이가 아니다. 불순한 것과 순수한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진짜와 가짜 사이의 차이다. 그것은 이데아를 닮은 것과 이데아를 전혀 닮지 않은 것들. 그래도 이데아의 혈통에 있는 것과 이데아의 혈통 밖에 있는 것, 이걸 나누는 게 핵심이다. 플라톤은 시물라크라로 이데아를 함축하지 않은 혈통을 쫓아낼 수가 있어서 중요했다. 사회의 규범이나 모델을 최대한 잘 따르고 그 사회가 인정하는 삶을 살려는 사람들은 사회를 위협하지 않는다. 사회를 위협하는 건 그 모델 자체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데아를 위협하는 시뮬라크라를 찾으려고 했다. 세상을 위협하는 것은 이데아를 가장 안 닮은 것보다 이데아를 닮을 생각이 없는 자들이다. 이것이 선별의 방법이다. 그래서 불순한 것과 순수한 것과 좋은 것과 나쁜 것, 진짜와 가짜의 차이. 차이의 순수한 개념이지 매개된 차이가 아니다. 플라톤은 바로 그걸 알았다. 나눔의 방법이 지닌 의미 그게 의도하는 목표는 경쟁자들의 선별 지망자들의 시험에 있다.

 

그런데 들뢰즈가 하고 싶은 말은 아예 닮지 않은 탈주자들. 계속 중심을 향해 닮으려고 하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탈주자들. 일의적 세계는 근거 짓는 것과 근거 지어지는 것이 일치하는 세계. 이 근거와 근거 지어지는 세계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존재가 시뮬라크라다. 왜? 시뮬라크라는 차이 자체다! 시뮬라크라는 뭔가를 닮으려고 하면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시뮬라크라는 갑자기 이 질서정연하게 진짜와 가짜들이 열 지어진 세계로 불쑥불쑥 튀어 오른다. 이것이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보여주는 것들이다. 시뮬라크라가 차이 자체이다. 플라톤의 세계에서 이데아를 갖지 않은 시뮬라크르는 진짜와 가짜로 위계 지어진 세계를 가장 위협할 수 있다. 그리고 들뢰즈에게는 바로 이것이 진짜와 가짜의 세계로 환원될 수 없는, 즉 플라톤이 환영이라고 불렀던 그것이 세계의 실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근거의 고유한 본성’ 여기서 이데아가 근거이다. ‘근거의 고유한 본성을 분유’하는 것은 이들이 이데아를 닮을 기회를 준다. 그래서 경쟁적 지망자가 된다. 내가 경쟁하는 자들은 이데아를 자기가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경쟁적으로 증명을 한다. 이데아는 사회에서 작동하는 본, 본질, 규범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본질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하고 그것에 더 가까워지려고 노력을 한다. 이데아에 더 가까워지려고. 우리 자신은 본질이라는 유토피아를 놓고 그것에 더 가까워질수록 더 완전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시뮬라크라는 아무것도 안 닮은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하다.

 

플라톤의 현상세계는 경쟁적으로 싸운다. 우리가 논쟁을 통해 더 올바름에 도달하려고 하는 자들, 그러다가 실패한 자는 문제 삼지 않는다. 소피스트는 하나의 올바름에 도달하려는 의식 자체가 없다. 소피스트는 여기 가서는 여기에 합당한 말을 해주고, 저기 가서는 저기에 합당한 말을 해준다. 소피스트는 하나의 올바름이라는 절대적 진리가 머릿속에 없다. 소피스트는 사람들 전체의 생각이 하나를 향해서 올곧게 달리는 것을 방해한다. 플라톤이 보기에 소피스트는 세상을 망치고 있다. 자기 스승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했다. 소피스트가 죽였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아테네 사람들의 가치관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인식에서 헛된 것을 쫓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에서도 그런 소피스트를 쫓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야 좋은 국가가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문제는 뭐냐? 결국은 이 차이 자체를 사유하는 것이 전복적일 수밖에 없다. 왜 동일성을 사유하는 것은 언제나 기존의 질서를 강화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귀결될 수밖에 없는가? 차이를 사유한다는 것이 단순히 존재론이나 인식론의 문제만이 아니라 윤리론의 차원에서도 중요한 문제이다.

 

차이를 사유하지 않는 것은 동일성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동일성에 입각한다는 건 기성의 가치들에 복종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성의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추방해 내려고 하는 폭력적인 의지가 작동한다. 들뢰즈가 다른 논문에서 그런 표현을 쓴다. 동일성이라는 것은 폭군과도 같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유를 동일성에 입각해서 전개하게 되면 옳은 것, 절대적으로 옳은 것만 있다. 우리는 그 절대적으로 옳은 것을 향하여 가려고 한다. 그래서 플라톤주의는 그런 점에서 차이를 발견해 놓고도 차이를 그 자체로 사유하려고 하지 않았다. 차이를 이데아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동일성에 종속시키려고 하고, 거기에 다시 여러 가지의 다름을 이데아와의 관계 속에서 연결시키려는 방식으로 작동을 한다. 절대적인 옳음을 의심하게 되면 가치가 혼란스럽다. 플라톤은 이런 사유의 방식을 못 참는다. 동일적 사유 방식은 모든 차이를 배제하는 것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선의가 종종 폭력이 되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것 때문이다. 그러니까 차이를 사유한다고 하는 문제는 그런 점에서 윤리의 문제, 정치의 문제와 직결된다.

 

플라톤은 선별하는데 핵심이 있다. 선별, 진짜와 가짜 그리고 그 가짜가 어떤 식으로 진짜를 근거로 구축된 세계를 위협하는가에 대해서 플라톤은 대단히 예민했다. 그래서 차이 자체가 있다는 것을 봤는데 그 차이 자체를 완전히 추방해 버리려고 하는 의지 속에서 봤다. 플라톤은 생성 자체를 봤다. 플라톤의 탁월함이다. 생성 자체를 봤는데 이걸 견딜 수가 없었다

 

사유한다는 것은 어떻게 우리는 매번 변화하는 세계 속에 있으면서도 그 변화하는 세계가 카오스로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성을 유지하면서 계속 변화하는가? 이 문제라고! 그냥 모든 것은 다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윤리도 구성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다르다는 이것을 토대로 해서 들뢰즈가 말하는 이 차이라는 토대는 사실은 토대가 아닌 토대. 계속 생성 변화하는 토대. 그러니까 어떻게 생성, 변화하는 것을 토대로 하면서 거기에서부터 우리는 무엇인가를 규정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차이 자체에 근거해서 어떤 것들을 약속도 하고, 규정도 하고, 만들기도 하고, 공통적인 형성하기도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계속 변화하는 세계 안에서 나임을 유지할 수 있을까?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도대체 뭘 구성하면서 살아야 가야 할까? 그 이야기다.

 
전체 2

  • 2021-06-04 14:05
    오해와 달리, 플라톤의 철학도 엄청난 내공이 담겨있다는 걸 알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존재와 변화를 동시에 사유했다는 것도 새삼 놀랐고, 플라톤 안에 플라톤주의를 전복할 사상이 잠재돼있다는 것도 놀라웠습니다. 물론 그것을 포착한 들뢰즈의 시선은 더욱 놀랍지만 ㅎㅎ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의 철학을 배우고, 스승으로 삼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의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볼 때, 그가 얘기하지 않은 관점에서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뭐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데요. 흠... 감동과 놀람의 연속입니다 ㅋ

  • 2021-06-30 12:57
    "차이를 사유하지 않는 것은 동일성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동일성에 입각한다는 건 기성의 가치들에 복종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성의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추방해 내려고 하는 폭력적인 의지가 작동한다." 플라툰은 그 차이를 발견하고도 그 차이 자체를 사유하려 하지 않아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네요. 언제나 동일성에 그 차이를 부합시켜려는 노력을 얼마나 많이 하고 사는 지 ....
    그리고는 '이것이 옳다. 내가 옳다!' 주장하는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내가 옳다는 생각이 어떤 폭력을 생성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