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 세미나

2학기 두번째 강의 '첫번째 시간의 종합과 두번째 시간의 종합'

작성자
김재겸
작성일
2021-06-15 05:48
조회
151
 

2학기 두 번째 강의에서는 시간의 종합에 대하여 정리해보았습니다. 시간은 차이 입니다. 만일 차이가 없다면 시간을 인식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찰나 찰나가 달라지기만 한다면, 즉 차이 자체만 존재한다면 우리는 시간을 인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들뢰즈는  인식이 일어난다는 것은 무언가 종합되고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시간의 종합을 세 가지 차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간의 첫 번째 종합

각 각의 생명체는 다르게 인식합니다. 가령 모기는 모기로서의 주의 집중이 있습니다. 동물의 체온과 분비물을 감지하여 그 몸에 침을 꽂아 피를 빱니다. 그건 모기가 선택했기에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모기의 신체성이 그렇게 주의 집중하도록 한 겁니다. 그러고 보면 인식한다는 것도 내가 선택하는 사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을 보면 자동적으로 연상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 생명체의 습관에 의하여 연상 작용이 일어나게 됩니다.

반복은 그 자체로 독립된 것이 아닙니다. 반복은 어떤 연관성을 인식하는 행위입니다. A를 보고 B를 기대하게 될 때 반복을 비로소 인식하게 됩니다. ‘해 뜸’이라는 사태와 ‘아침’을 연합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내일 아침 해가 뜬다고 기대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인식 속에 반복이 존재 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예측하며 살아갑니다. 만일 예측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목이 마르면 습관적으로 물을 찾습니다. 목마름과 물을 연관시키는 습관으로 생명은 살아갑니다. 생명체의 경험은 수동적인 것이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 속에서 축적되어온 습관이 그렇게 인식하도록 합니다. 그 수동성을 가지고 미래로 투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시간의 첫 번째 종합은 수동적 종합이고 습관의 종합입니다.

인식한다, 는 것은 그 생명체의 수축작용입니다. 과거의 시간성이 한 순간에 수축되는 것입니다. 명멸하고 있는 매순간에서 시간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종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몸은 매순간 다른 환경에 놓이게 되지만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몸의 종합능력 때문입니다. 매순간 차이가 발생하는 가운데서 한 지점으로 수축할 수 있기에 살아있는 현재를 구성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현재를 현재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건 시간의 종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수축 작용을 통하여 과거는 경험의 차원으로 현재가 되고 미래는 투사로서 현재가 됩니다. 즉, 존재와 인식의 지평으로부터 시간을 사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흉터는 부상이라는 과거의 응축입니다. 흉터는 과거 부상에 대한 현재의 응시입니다. 자아는 부상과는 분리되어 있습니다. 흉터는 차라리 자아를 부상과 분리시키는 모든 순간들을 하나의 생생한 현재 안으로 수축합니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가 시간 안에서 구성한 것입니다. 응시라는 수동적 정신을 통하여 우리는 시간을 종합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조건들의 집합이고, 우리는 수축된 우주입니다. 유기체들은 살아가는 조건들을 자기 식의 습관으로 수축하게 됩니다. 어떤 것을 만나고 어떤 것은 피할지를 습관으로 구성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건들의 자기식의 수축이 생명체이고 생명체 자체는 수축된 종합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종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시간의 종합은 살아있는 현재를 구성하는 문제입니다. 시간을 종합한다는 건 과거와 미래를 현재 차원에서 매번 다르게 구성하는 역량입니다. 어떤 생명체가 더 이상 수축할 수 없을 때 그 생명체에게는 동일한 반복만이 있습니다. 더 이상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닙니다.

자아들은 어떤 애벌레 주체들이다. 수동적 종합들의 세계는 규정되어야 할 어떤 조건들 안에서 자아의 체계를 구성한다. (187)

들뢰즈는 애벌레 주체라는 흥미로운 표현을 가져옵니다. 자아는 어떤 조건들을 수축하고 있는 무수한 자아들의 집합입니다.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단일하고 단절된 주체가 아닙니다. 하나의 주체로 환원될 수 없는 오글오글한 복수적인 존재들이 있습니다. 자아를 말할 수 있다면 우리안에는 응시하는 수많은 목격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응시하는 자아들이 있기에 생명은 매번 다른 방식으로 수축하고 다른 방식으로 행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는 양태변화 자체 입니다. 생명은 매번의 차이를 그 시간의 종합 속에서 살아갑니다. 차이 자체만 있다면 존재자체가 성립될 수 없지만 생명의 수축 역량이라는 위대함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비루한 삶을 살지라도 생명인 한에서 전 우주를 담고 있습니다.

두 번째 종합

현재를 사유하면 할수록 묘합니다. 현재는 규정하자마자 지나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떻게 지나가고 있는 것일까요? 첫 번째 종합에서 우리는 현재 속에는 과거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그 현재는 과거가 되지 않고는 지나가는 현재가 될 수 없는 역설이 발생합니다. 현재는 그 자체로 지나가 버리고 있는 과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첫 번째 종합과는 다른 시간의 또 다른 종합을 필요합니다. 들뢰즈는 그 지점에서 두 번째 종합을 베르그손에 기대어 사유합니다. 현재를 지나가도록 만들고, 현재와 습관을 전유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것은 시간의 근거로 규정되어야만 합니다. 첫 번째 시간의 종합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근본적 차원을 필요로합니다.

그 근본적 차원을 사유하기 위해서 베르그손은 ‘기억’을 가져옵니다. 시간은 기억에 의하여 보존됩니다. 그리고 기억의 수동적 종합이 시간을 지나가게 합니다. 여기서 베르그손의 원뿔(주 17번 참조)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억은 불확정적입니다. 우리가 놓여있는 상황에 따라서 그 때 마다 불러오는 기억도 다릅니다. 과거는 지나가버리는 것도 쌓여지는 것도 아닙니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시간은 기억으로 보존됩니다. 베르그손은 모든 기억이 보존 된 차원을 순수과거라고 지칭합니다. 정보 이론에서는 우주를 정보들의 집합이라고 정의 합니다. 그 정보들의 총체와 같은 것이 순수과거입니다. 정보는 사라지지도 않고 더 새로운 것이 더해지지도 않습니다. 매순간 다른 형태로 교차하고 집합 형태를 바꾸면서 변화해 갑니다.

어떤 상황과 만나느냐에 따라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각 각의 삶들은 다른 기억의 수준을 불러옵니다. 어떤 기억의 수준을 불러오느냐에 따라서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처럼 ‘개체의 삶’은 ‘우주의 삶’과 다르지 않습니다. 베르그손은 기억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한 개체의 삶에 우주의 삶을 내포하고 있음을 역설합니다. 개체는 우주전체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번의 삶(S)은 과거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그 삶(S)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비일관성이나 대립이 아무리 크더라도 각 각의 존재가 어떤 다른 수준에서 ‘똑 같은 삶을 펼친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197 쪽) 현재는 독립적 현재일 수 없습니다. 과거 전체를 가지고 현재가 되는 것입니다.

즉 거기서 드러나 있는 것은 각각의 현행적 현재가 앞선 현재와는 다른 수준이나 등급에서 삶 전체를 다시 취한 방식이다. 하지만 그때 이 모든 수준과 등급들은 공존하고 있으며, 결코 현재인 적이 없었던 어떤 과거의 바탕으로부터 우리의 선택에 내맡겨진다. (198쪽)

과거는 실존하는(exist) 것이 아니라 공속하고(consist) 내속하면서(insist) 끈덕지게 자신을 주장할 뿐입니다. 들뢰즈는 그를 ‘초월론적인 수동적 종합’이라고 정의합니다. 그 것이 모든 시간적 차원의 근거가 됩니다. 순수과거는 현재가 지나갈 수 있는 조건입니다. 다만 어떤 수준에 연관되느냐에 따라 철학자와 돼지, 범죄자와 성인이 거대대한 원뿔의 서로 다른 수준에서 똑같은 과거를 연출하는 셈입니다. 그 것을 우리는  '윤회'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시간의 종합은 존재가 시간 자체를 구현하고 있음을 역설합니다. 시간은 생명을 통하여 작동하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한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오직 우주가 나를 통해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세 가지 시간의 종합 중에서 두 가지 시간의 종합을 사유해 보았습니다. 첫째 둘째 종합으로 충만한 시간이었습니다. 세 번째 종합은 다음 강의에서 만나게 됩니다. 차이와 반복은 니체의 영원회귀의 영감으로 가득한 책이라고 하니 진한 종합의 시간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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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15 12:42
    시간을 가지고 이렇게 다양한 방향으로 사유를 뻗어나갈 수 있다니! 들뢰즈의 사유는 정말 놀랍네요. '시간이 무엇일까?'라는 생각으로 읽었는데, 우리가 시간을 살고 인식하는(?) 관점에서 다시 읽어야겠어요. 시간이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로 보면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길들이 있을 것 같아요. '애벌레 주체'라는 말도 그렇고, '끈덕지게 자신을 주장하는 과거'도 그렇고 참 어떻게 이리도 다양한 방면으로 깊은 사유를 할 수 있었는지, 대단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