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 세미나

나들이 세미나 2학기 3번째 강의 후기 세 번째 종합, 영원회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1-07-10 19:59
조회
152
2장 〈대자적 반복〉은 정말 어렵네요. 왜 갑자기 시간이 나오고, 시간이 차이인지, 들뢰즈는 왜 반복을 설명하는 데 시간을 인식하는 메커니즘을 분석하는지 총체적으로 감을 잡을 수 없는 장입니다. 하지만 반복해서 읽고 강의를 들으니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첫 번째 종합(습관)과 두 번째 종합(기억)

채운쌤께서 간단하게 다시 첫 번째 종합과 두 번째 종합을 설명해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아직 두 개의 종합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우리는 어떻게 시간을 인식하는 것일까요? 통념적으로 지금은 현재이고, 지나간 것은 과거이고, 다가올 것은 미래라고 구분합니다. 하지만 이렇게만 말하면, 현재는 붙잡으려 하는 순간 지나가게 되고, 과거와 미래는 항상 현재와 분리된 시간대가 됩니다. 우리는 현재를 살면서도 동시에 과거(왕년의 자신)와 미래(언젠가 성공한 자신)를 바라보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과거와 미래는 현재와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요? 시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금방 이런저런 질문들이 나옵니다.

들뢰즈는 반복과 시간을 연관 지어서 정리합니다. 시간은 차이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그 자체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시간을 어떤 연관성 속에서 인식합니다. 차이들을 특정한 연관성으로 묶는 것, 이것이 종합입니다. 들뢰즈는 종합이 일어나는 세 가지 층위를 설명함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시간을 인식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첫 번째 종합은 ‘습관’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세상을 습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는 ‘내일 아침에 해가 뜬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해 뜸’과 ‘아침’이라는 두 가지 사건이 연합된 결과입니다. 여기서 습관적 믿음을 형성하는 것은 데카르트적 코기토가 아닙니다. 모기가 피를 빨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더우면 손부채질을 하는 것은 코기토가 아니라 신체가 활동한 결과입니다. 들뢰즈는 인식 활동도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학습(learning)과 본능, 사유와 판단은 ‘나’로 환원되지 않는 ‘분열하는 자아’ 혹은 ‘애벌레-주체’에서 시작됩니다. 이러한 자아(주체)의 활동을 들뢰즈는 ‘수축’이라 말하고, 그것이 차이를 수용한다는 점에 주목해서 ‘수동적 종합’이라고 규정합니다.

두 번째 종합은 ‘기억’입니다. 습관이 현재적인 반응을 만들어내는 인식이라면, 기억은 끈덕지게 자신을 주장함으로써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과거에 대한 인식입니다. 습관이 시간을 정초한다면, 기억은 시간이 성립하는 근거입니다. 현재는 인식하는 순간 ‘지나간 현재’가 됩니다. 그러나 모든 지나간 현재는 그 자체로 과거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지나간 현재들은 사라지지 않는 걸까요? 사라지지 않는다면 지나간 현재들은 어딘가에 쌓이거나 저장되는 것일까요?

들뢰즈는 현재를 지나가게 하고 과거를 성립시키는 두 번째 종합으로서 기억에 주목합니다. 기억은 현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억은 현재에 계속 영향을 미칩니다. 채운쌤은 이를 불교의 공(空) 개념과 연관 지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공’이란 ‘없음’, ‘결여’가 아니라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그 자체 단독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는 경험적인 세계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경험적인 세계를 다르게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세계가 ‘공’하다는 것은 나타난 것들을 그렇게 나타나게 한 조건과 더불어 이해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두 번째 종합으로서의 기억도 현재(나타난 것)를 다르게 이해하기 위한 맥락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어떤 조건에 있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현실화되듯이, 현재도 과거의 어떤 기억(수준)과 접속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의미화됩니다. 베르그손의 원뿔이 이런 얘기였죠. 하나의 삶은 우주 전체의 삶 속에서 그러한 삶으로 표현됩니다.(베르그손의 원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재겸쌤의 후기를 참고해주세요!) 이런 맥락에서 들뢰즈는 운명론을 결정론, 곧 목적지향적 사고가 아니라 매번 어떤 기억과 접속할 것인가를 질문하는 자유와 연관 지어서 말합니다.

개체가 시간을 겪는 것은 절대적인 척도로서의 시간을 동일하게 겪을 수밖에 없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시간은 개체 밖에서 객관적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과학적으로 현재 1초는 세슘 원자가 91억 9263만 1770번 진동할 때 걸리는 시간입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세슘 원자의 운동도 수축의 일종입니다. 즉, 1초가 1초일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인 것이지 1초라고 할 만한 본질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이미 ‘나’라는 의식조차 분열되는 가운데 일시적으로 형성된 결과입니다. 매 순간을 동일하게 인식할 수 있는 ‘나’ 같은 것은 없습니다.

채운쌤께서는 ‘우리는 동일한 순간을 살면서 동일한 1년을 사는 것일까?’를 질문하셨는데요. 잘 정리되지는 않지만, 이런저런 생각이 드네요. 양적으로는 똑같은 1시간도 때에 따라서 다르게 흐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멍 때릴 때는 30분도 길지만, 유튜브 영상 볼 때는 1시간도 금방입니다. 그리고 시간을 밀도 있게 보낼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공부한 이후의 시간이 그런 것 같아요. 당장 한 달 전만 해도 전생 같습니다. 그 안에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난 것 같단 말이죠. 맨 처음 규문에서 세미나를 시작했을 때는 더욱 아득합니다. 고등학교 3년은 그리 길었던 것 같지 않은데, 규문에서의 3년은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질까요? 생각하면 할수록 시간은 참 묘합니다.

 

세 번째 종합(영원회귀)

첫 번째 종합과 두 번째 종합이 아무리 차이를 종합한다고 해도, 세 번째 종합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현실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첫 번째 종합과 두 번째 종합은 현재적인 반응이고, 현재의 반성입니다. 두 가지의 종합은 매끄러운 원환을 만들지만, 원환을 벗어나는 접선을 만들지는 못합니다. 동일한 시간 속에서 살면, 영혼은 피곤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피곤은 영혼이 자신이 응시하는 것을 더 이상 수축할 수 없는 국면을 표시”합니다.(184) 즉, 현실이 피곤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피곤할 만한 현실을 살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을 다르게 구성할 수 있는 새로운 선을 발명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자아가 무기력해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원환에서 벗어나는 직선, 곧 세 번째 종합에 있습니다.

사실 아직도 세 번째 종합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채운쌤께서는 윤리적 실천 지점은 세 번째 종합에 있다고 하셨지만, 이번에 세미나에서 토론하면서도 세 번째 종합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 감도 안 잡히더라고요. 첫 번째 종합과 두 번째 종합처럼 ‘애벌레-주체’와 ‘순수 과거’가 종합하는 것이 아니라면, 세 번째 종합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요?

들뢰즈는 세 번째 종합으로서 니체의 영원회귀를 가져옵니다. 재겸쌤께서 이해를 돕기 위해 니체의 영원회귀 부분을 발췌하셨는데, 느낌만 살짝 온 것 같아요. 대략 ‘지금 이 삶밖에는 없다. 현행적인 삶을 어떻게 긍정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왔는데, 이게 어떻게 새로운 미래를 여는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이해가 안 될 때는 예를 통해서 느낌이라도 잡아야죠. 채운쌤은 벤야민이 바라본 프랑스 혁명과 그리스 영화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화두로 단서를 던져주셨습니다. 벤야민이 보기에, 프랑스 혁명은 기존의 시간을 깨트리고 완전히 새로운 시간에 돌입하게 된 사건입니다. 그가 프랑스 혁명에서 혁명성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체제를 전복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새로운 시간에 자신을 내던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영원회귀란 ‘지금 여기’를 사는 동시에 이전과 전혀 다른 리듬으로 살아가는 것인 듯 합니다.

강의를 듣는 동안 《주역》의 성인이야말로 벤야민적 혁명을 체현한 모델이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주역》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구체적인 상황을 64개의 괘로 표현합니다. 성인은 자신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을 읽고(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하죠. 물론 상황을 읽는다고 해서 갑자기 어려움을 해결하거나 자신의 입맛에 맞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도 가도 못할 만큼 곤란한 상황에 처한 성인은 여전히 그 상황에서 살아가죠. 대신 무력하게 손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곤란함을 계기로 자신의 역량을 갈고닦습니다. 이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며 결여 없이 살아가는 성인의 가벼운 삶을 표현합니다. 채운쌤께서는 매 순간에 맞게 살아가는 성인의 실천(時中)을 ‘익명의 시간 속에서 익명의 역량을 발휘하기’라고 말씀하셨는데, 확실히 어떤 시간이 오더라도 그때에 맞게 살아가는 것 외에 다른 윤리는 없는 것 같습니다. 원환 자체를 울퉁불퉁하게 만들어버리는 접선을 끊임없이 반복하기.

테오 앙겔로풀로스라는 영화감독은 ‘너는 영화를 좋아하는가?’ 그리고 ‘영화도 너를 좋아하는가’라는 화두를 던졌다고 합니다. 채운쌤은 영화의 자리에 삶을 넣으셨죠. ‘너는 삶을 원하는가?’ 그리고 ‘삶은 너를 원하는가?’ 이 질문을 듣는 순간, 갑자기 머리가 띵해졌습니다. 저는 ‘나’로서 살아가지만, ‘나’ 이전에 생로병사가 있습니다. 저의 삶은 생로병사라는 원초적 사건을 벗어나지 않죠. 그동안에는 ‘나의 삶에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신묘한 힘들이 작동하고, 그렇기 때문에 생로병사를 겪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좀 더 멀리서 본다면, 삶이 매 순간의 ‘나’로 표현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개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힘들지 않게 사는 것이 개체의 목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관점에서 본다면, 개체는 삶을 구현하는 매개일 뿐입니다. 개체로서의 삶은 단순히 ‘나’에게 좋은 것들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겪을 사건들에 걸맞은 자를 목표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강의를 듣는 내내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막연한 질문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왜 세 번째 종합이 필요한지 조금을 알 것도 같습니다. 무겁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삶에 대한 태도와 연관돼있다는 것도 조금은 알 것 같아요. 하지만 아직은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에휴! 답답하지만, 들뢰즈의 사유를 따라갈 시간은 아직 충분히 남아있으니 괜찮겠죠? ㅎㅎ

아래는 나무위키에서 가져온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화두를 다룬 칼럼입니다. 세 번째 종합에 대한 힌트가 될 것 같아서 발췌했어요. 참고해주세요. 그럼 모두 남은 들뢰즈도 재밌게 만나요~

 

앙겔로풀로스는 고전영화 스타일이라는 수업을 들었다. 이 수업은 고전영화의 문법에 관한 과정으로 투 쇼트나 상상선, 쇼트-역 쇼트 나누기로 콘티를 구성하는 시간이었다. 시나리오를 나눠 주고 과제로 그 다음 주까지 콘티를 작성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앙겔로풀로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방식으로 주어진 시나리오의 등장인물을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고전영화에는 존 포드만이 아니라 오슨 웰스의 방법[3]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서 주인공을 가운데 세워 놓고 카메라가 360도 회전 트래킹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하는 콘티를 구성했다. 그 콘티를 보고 지도 교수는 앙겔로풀로스를 불렀다. “자네는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하나?” 앙겔로풀로스는 대답했다. “꼭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교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자네의 천재성은 그리스에서나 가서 뽐내 보이게.” 이 말은 학교를 떠나라는 뜻이었다. 앙겔로풀로스는 대답했다. “그리스에서도 그렇고 싶지만 파리에서도 그걸 인정받고 싶습니다.” 선생은 간단하게 말했다. “만일 학교에서 요구하는 대로 다시 콘티를 짜지 않으면 자네는 학교 바깥에서 자네가 하고 싶은 대로 영화를 하게나.”

앙겔로풀로스는 집에 돌아와서 밤새 고민했다고 한다. 새벽이 올 때 즈음 자신에게 질문했다. “나는 영화를 원한다. 하지만 영화는 나를 원하는가?” 그리고 자신에게 대답했다. 자신이 영화를 새롭게 만들 수는 없겠지만, 자신의 영화가 새로운 영화를 위한 하나의 점을 찍을 수 있다고 그 자신에게 다짐을 했다. 그는 다음날 아침 학교에 가서 자퇴 원서를 내고 그리스로 돌아갔다. 이 말은 결단이다. 앙겔로풀로스는 부산의 마스터 클래스에서 이 말을 하면서 우리들에게 말했다. “여기 앉은 여러분들은 영화를 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물어보아야 합니다. 영화도 당신을 원하는가!” 나는 이 말을 수없이 다시 생각했다. 나는 이 말이 앙겔로풀로스 영화 전체보다도 더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 정성일, 2004년 11월 칼럼에서
전체 2

  • 2021-07-12 21:47
    정말 삶은 나를 원할까요? 삶에 걸맞은 내가 된다는 건 무엇일까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질문이었어요. 시간을 다르게 이해하는 문제는 어렵지만(!) 흥미롭고요. 요즘 과학 얘기에 꽂혀 있어서 '세슘 원자' 얘기도 눈에 번쩍 띄네요.ㅎㅎ 세 번째 종합 이야기는 다가오는 '차반 데이'에 좀더 나눌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 2021-07-15 16:09
    "삶은 나를 사랑하는가?" 이 물음이 내내 맴맴 돌았습니다.
    삶은 내가 사랑하고 말거나, 내가 삶을 내동댕이 치거나 말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내"가 감히 삶에 뭔가를 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고 단단히 착각하며 살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이 매순간 나를 어디로 내몰지 모르고 어떤 것도 약속하지 않음에도 나는 삶이 나를 사랑한다고, 이런 내가 바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알 듯한데 모르겠고 모르겠어서 내동댕이 치고 싶다가도 멋진 말들 폭발에 또 꾸역꾸역 읽게 되는 마법같은 책입니다. 허참.
    더듬더듬 읽어나가다보니 벌써 절반이 넘어가네요.
    이제 어떡하든 완주해야죠!
    나들이 팀원들과 스승님 꼭 붙들고 하반기도 또 가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