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 세미나

7.24 2장 대자적 반복 정리강의 후기

작성자
임영주
작성일
2021-08-10 17:10
조회
170
나들이 세미나 팀은 2학기 마무리로 회식 대신 평소보다 조금 일찍 만나 아무래도 어려웠던 ‘시간의 세 가지 종합’에 대한 정리 강의를 다시 한번 듣고 토론하면서 <차이와 반복> 전반부를 정리하는 알찬 시간을 보냈습니다.

뭐 그렇다고 쌈박하게 정리가 되었다고는 할 수 없고요. <차이와 반복>은 처음 읽을 때부터 장님 코끼리 코 만지듯 뿌연 안개 속을 헤매고 있긴 합니다만 특히 이 시간의 종합 부분은 더욱 그랬습니다. 하지만 존재를 생성으로 사유하는 들뢰즈 철학에서 시간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핵심이라 그냥 이렇게 꾸역꾸역 강의를 듣고 듣고, 책을 읽고 읽고, 아무 말이라도 함께 해보면서 이해해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앞서 재겸샘과 규창샘께서 시간의 세 가지 종합을 후기에 잘 정리해 주셨으니 그것 대신 왜 우리는 존재와 시간을 다르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짚어보겠습니다.

순수하고 텅 빈 형식의 시간

들뢰즈는 모두 눈에 보이는 대상들은 보이는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보이지 않는 힘들인 차이 그 자체에 의해서 특정한 방식으로 드러난 일시적인 효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어떤 것이 있다’라는 실체에서 존재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개체들이 있게 해주는 생성의 원리에서부터 존재를 파악해야 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렇게 보았을 때 시간이 구성되는 방식도 다르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원래 그런 내가 있다는 전제를 버리기가 쉽지 않죠. <차이와 반복>이든 <주역>이든 생성에 관한 텍스트들을 읽을 때 가장 어려운 부분도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존재’나 ‘시간’에 대한 생각이나 전제들이 너무 강해서 이것이 아닌 다른 방식의 존재나 시간에 대한 개념들이 무척이나 낯설고 이해하기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이죠.

사실 저는 이번에 ‘시간의 종합’을 읽기 전까지 시간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질문해본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은 나의 밖에 과거-현재-미래로 있으면서 여튼 나와 상관없이 혹은 내가 어쩔 도리없이 흘러가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라고만 여겼기 때문입니다. 다만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어떻게 분초를 아껴가며 알차게 쓸까? 혹은 늘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실망을 반복하는 정도로만 시간을 생각했었습니다. 실체로서의 존재나 시간이 있다는 전제가 매우 견고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채운샘은 이번 강의에서는 시간이나 존재를 객관적인 실체로서가 아닌, 생성으로 보았을 때 인간이 가지게 되는 실천적 지점을 잘 생각해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차이와 반복> 1장 ‘차이 그 자체’는 만물은 개체라는 실체가 아니라 ‘차이 그 자체’인 생성원리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밝히고 있다면 2장 ‘대자적 반복’에서는 이런 개체들이 현재의 삶을 영위해가는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서 개체들이 어떻게 생성의 원리인 차이 그 자체를 그들에게 고유한 방식으로 해석해서 반복을 만들어 내는가에 대한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자적 반복이란 개체들이 시간을 인식하고 종합하는 다양한 차원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차이 그 자체는 그 자체로서 현상 혹은 현실에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개체들을 살아가게 하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작동 원리입니다. 현실의 개체가 이런 계속 생성되는 차이들을 자신의 생명을 영위하기 위해서 이 차이를 그들에게 고유한 방식으로 반복하고 질서를 세우기 위한 시간의 정초로서 혹은 근거로서 세울 때 그것은 시간으로 혹은 공간으로 인식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카오스 상태의 차이 그 자체는 그것이 존재하기는 하나 이런 카오스를 인식하는 개체들이 없는 그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카오스는 개체의 인식 이전의 상태이기 때문이죠. 즉, 현실로 드러나는 개체들은 이런 차이들을 나름대로 내면화한 것들이며 따라서 모두 차이 그 자체의 일시적인 효과들입니다. 이렇게 개체들이 현실에서 차이를 구현해냈을 때만 차이도 현실에서 개체들을 통해서만 비로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이런 차이를 어떤 식으로 반복하는가는 개체마다 모두 다르지만 그 원리는 같다고 할 수 있죠. 따라서 시간은 개체들이 차이를 인식하는 나름의 고유한 반복 혹은 리듬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현실로 드러난 만물들은 나름의 시간성으로서 형태를 갖추고 살아갑니다. 즉 시간과 개체는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개체의 삶 자체가 시간을 혹은 차이를 펼쳐내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만물에게 모두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시간성은 없습니다.

하지만 한편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처럼 과거의 삶이 현재도 똑같이 되풀이되는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베르그손의 원뿔모형에서처럼 우리가 아무리 다르게 산다고 해도 그것은 순수과거의 원뿔에서 그 수준만 다르게 가져올 뿐이지 우리는 늘 순수과거라는 필연성에 종속되어 태어나 살다가 죽는 존재라는 무력감이 들기도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운명을 지배하는 절대자를 세우고 그에게 복종하는 식의 종교를 만들기도 합니다.

들뢰즈는 만물을 생성하게 하는 차이 그 자체가 생성되고 있는 이 운명의 원환은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 자체도 생성이기도 하고 또한 만물을 통해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생성해내는 개체의 행위에 의해서도 동시에 영향을 받는다고 합니다. 개체가 어떻게 시간이나 기억을 과거에 해오던 방식과는 다르게 구성하고 행동할 것인가에 따라서 시간을 뻔한 방식이 아니라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차이 그 자체를 긍정하는 것에 자신을 맡기는 식으로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시간의 세 번째 종합이고, 들뢰즈는 이런 시간을 미래를 향해 열린 ‘시간의 텅 빈 형식’(255)이라고 합니다.

차이 그 자체의 운동원리를 내재하고 있지만 현실에서 개체적인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또한 개체와 외부환경을 끊임없이 구분 지으면서 개체의 동일성을 확보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기억이나 습관은 개체를 개체로서 생존하게 하는 필수적인 바탕이 됩니다. 그러나 그러다 보니 생존을 위해 임시적으로 규정된 과거의 기억(관념)이나 습관을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 바탕 혹은 진리, 참으로 여기게 되고 이것이 굳어지게 되면 개체는 차이 자체를 내재한 매 순간 생성으로서의 존재임을 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렇게 과거나 기존의 바탕에 따라 사는 것은 편안하고 안락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개체들은 기본적으로 차이를 내재한 생성하는 존재라는 생명의 원리에 반하기 때문에 동시에 인간을 한없이 무력하고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이렇게 개체의 동일성만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의 존재로서 살기 위해서는 과거나 기억을 똑같이 재현하는 방식으로 현재에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차이들을 생성하도록 만드는 사유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들뢰즈는 이런 사유의 능력으로 ‘문제와 물음’(244)을 듭니다.

물음은 자신의 고유한 존재론적 범위를 발견하고, 부정적인 것의 비-존재로 환원되지 않는 물음의 ()-존재를 발견한다. 원초적인 혹은 궁극적인 대답이나 해답들이란 것은 없다.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물음-문제들뿐이고, 이는 모든 가면들 배후의 어떤 가면, 모든 장소들 배후의 어떤 자리바꿈 덕분이다(245).

이 문제와 물음은 우리가 만나는 외부의 사건이나 순간들을 기존의 관념이나 기억으로 대충 끼워 맞추려 하는 것에서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답으로 가져왔던 기억이나 관념들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낯설게 만들어 줍니다. 이렇게 개체가 외부의 사건이나 대상들이 이전과는 다르게 낯설게 만나게 되는 질문의 순간이 시간을 다르게 구성하는 세 번째 시간의 종합이며, ‘빗장이 풀린 텅 빈 시간’(253)이며, 질문과 문제들로 구성되는 생성으로서의 시간입니다. 이것을 들뢰즈는 다른 책에서는 ‘반효과화(counter-effectuation)’라고도 한다고 합니다. 즉, 현재를 과거의 기억을 통해서만 습관적으로 사고하던 것에서 매번 습관적으로 마주하는 순간을 매번 물음과 질문으로 생성의 순간으로 만드는 물음의 순간으로 바꾸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주어져 있는 재현해야 할 고정된 과거-현재-미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 개체들이 현재 어떤 문제와 질문을 구성하는 것인가에 따라 기존의 시공간의 근거는 균열이 생기고 자리가 바뀌게 되면서 매번 다르게, 낯설게 구성될 수 있다고 봅니다. 즉, 이런 물음과 문제라는 사유활동이 인간을 주어진 삶을 재현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텅 빈 시간에 자신만의 물음과 문제로 자신만의 고유한 강도를 가지는 시공간을 작동시켜가는 생성의 존재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생성하는 존재의 삶에 대한 실천적이고 능동적인 지점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리가 너무 되지 않아 이제야 후기 올립니다. 속이 시원하네요. 목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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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11 11:17
    "시간은 개체들이 차이를 인식하는 나름의 고유한 반복 혹은 리듬감"이라는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네요! 굴드는 포유류들은 모두 비슷한 호흡 수를 갖고 살아가지만, 몸 크기에 따라 호흡하는 속도가 다르고 여기서 수명이 달라진다고 했죠. 비슷한 맥락에서 도가에서 명경지수 같은 마음을 유지함으로써 일정한 호흡을 유지하고, 호흡법에 관한 수양을 강조하는 것도 개체의 실존에 관한 문제들과 연관되는 것 같군요. 시간(차이)과 개체를 연관 지으니 흥미로운 생각들이 막 떠오르는 것 같아요. 진지하게 시간이란 주제를 가지고 공부해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