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 4권 육체의 고백' 성찰- 고백, 동정에 관하여'

작성자
장청
작성일
2021-10-24 16:37
조회
161
지난 금요일, 10월 22일 ‘육체의 고백’에서 토론의 주제는 ‘성찰- 고백, 동정에 대하여’에 관해서 했습니다.

채운 샘 줌 강의가 있었는데 그 강의 내용을 통해 제가 이해한 바를 대충이나마 기억나는 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성찰의 방식에 있어 고대 철학과 기독교의 방식이 어떻게 다른가를 이번에야말로 좀 더 정확하게 알게 됐는데 제겐 유익하고도 아주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

그렇다면 고대철학과 기독교의 성찰 방식이 어떻게 다른가?

고대 철학에선 자기 수련을 함에 있어 현자인 스승에게 일대일 형식을 통해 배우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배움을 위해 제자는 스승의 말에 무조건 따를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때 무조건 따른다고 하는 것이 부정적인 것처럼 비춰지기도 했는데요. 현자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입니다. 현자에게 깨달음을 얻기 위해 복종하는 건 깨달음을 향한 입문 과정인 겁니다. 백지 상태에서 앎을 얻을 수는 없으니 이때 누군가 공부의 모델이 필요한데 현자가 그 역할을 해주는 거지요. 그래서 수련을 위한 배움에 일정 기간 절대복종은 필요합니다. 이때 복종은 수련의 방식입니다. 문제는 그 복종의 형식이 지속적이냐. 한시적이냐에 고대 철학자들과 기독교의 방식에 차이가 있다는 거죠.

고대 철학에선 배움을 통해 자기 스스로 존재의 변형을 일으킬 수 있는 경지가 되면 제자는 스승으로부터 독립합니다. 이때 존재의 변형은 자동 주체화란 겁니다. 주체 스스로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절제하고 통제할 수 있는 힘과 분별력을 기르는 거지요.

기독교의 성찰 방식은 어떤가?

기독교는 유일신인 빛의 하나님을 향할 때, 축복을 받고 영광을 얻을 수 있다! 이러기 위해선 하나님께 절대복종을 해야 한다.라고 하는데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인간은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라는 말로도 해석이 되는데 이 말 자체보다 기독교의 작동 방식을 보니 이해가 되더군요.

성역 4권을 공부하면서 그동안 제가 기독교에 대해 갖고 있던 의문 하나가 풀렸습니다. 어떤 점인가? 그렇게 교리를 따르는 신자들이 세상에 가득한데 왜 세상은 변하지 않고 변화시키지 못하는가. 라는 거였습니다. 누군가 세상을 변화시켜 주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야말로 ‘타동 주체화’ 인데 푸코를 공부하기 전까진 몰랐으니까요. 푸코를 공부하고 있는 지금도 그 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습니다만. 이런 형태로 주체적이고도 지속적인 힘을 기를 수 있을까.

기독교는 나약한 인간은 외부의 유혹, 즉 악의 씨앗인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조절하고 절제하고 통제할 힘이 인간 안에는 없다고 합니다. 그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님의 힘 안에서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선 하나님께 절대복종 해야 한다. 절대복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과 신자의 매개 역할을 하도록 자격증을 부여받은 사제나 목사에게 털끝만큼도 남김없이 자신의 양심을 털어놓으라는 거죠. 먼지 한 톨 남김없이요. 그렇게 사제와 목사의 검증을 통해 하나님의 계율에 따르는지 확인이 되고 순결함이 입증되며 하나님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닮기 위해선 순결하고 정결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끊임없이 사제에게 고하고 회개하는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이게 기독교의 성찰 방식입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한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았습니다.)

여기에서 기독교적 ‘주체화’의 작동 방식을 논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거지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의식 속엔 온갖 잡념이 드나드는데 그 외부의 유혹, 즉 악의 씨앗이 되는 유혹을 인간 스스로는 물리칠 힘이 없다, 그 악으로부터 벗어나 정결해지기 위한, 인간을 지켜줄 힘은 하나님께 의존해야만 가능하다! 이 얘기는 바꾸어 말하면 인간 스스로는 존재를 변화시킬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오직 하나님께 의존해야만 얻을 수 있다.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 나머지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맡겨라! 이렇게 인간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존재의 변형을 이룰 수 있다, 라는 건 지배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세력에겐 역으로 잘못 이용될 소지가 충분해 보이기도 하는데요. 여기에서 파시즘의 토대가 마련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집니다. 나아가 자기 스스로가 아닌 외부의 타자, 절대자인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스스로의 힘이 아닌 타자를 통해 자유를 얻고 해방을 얻는다, 라고 할 때 이게 진정한 자유고 해방을 얻는 것인가? 라는 점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거죠.

고대 철학의 수련 방식에 따르면 진정한 자유와 해방은 존재의 변형을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부단히 시도하고, 반복된 훈련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고대 철학자들은 스스로 조절하고 절제하고 통제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 다양한 형태로 고행을 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자기에게 맞는 양식을 발견하고 자기 방식대로 실천하는 거죠. 주체의 조건은 다 다르기에 자기에게 적절한 방식을 찾아 실천하면 되는 건데 자신은 싹 지우고 다 똑같은 방식으로 따라라 하는 것! 여기에 무슨 자율이 실천되고 자기 해방이 있겠는지요. 자기 스스로 윤리의 주체가 되는 게 아니라 타자에 의해 윤리를 형성하는 것. 이것이 타동 주체화라는 겁니다. 푸코는 기독교의 이 점을 조명하는 겁니다.

이번 채운 샘 강의를 통해 제가 깜빡했던 걸 확인한 게 또 하나 있는데요. 제 의문이기도 했구요. 기독교가 타 종교에 비해 왜 그렇게 결속력이 단단한가? 라는 점이었는데 기독교의 사목 시스템은 현대의 사법 권력과 닮았다고 하지요. 그 방식이 피라미드 형식의 중앙집권화인데 불교나 유교 등 타 종교의 탈중심화와 다른 형태입니다. 중앙집권 형태는 질서를 유지하고 통제하기 위해 좋은 최적화 방식입니다. 여기에는 개인의 특성이나 조건 같은 건 무시됩니다. 각자 존재의 고유성은 사라지고 거대한 한 틀 안에 넣고 모두 균질하게 표준으로 만들어버리는 거! 저는 이것이야말로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찰함에 있어 ‘진실 말하기’ 이것도 고대 철학과 기독교는 다른 차원으로 작동됩니다. 견유주의의 대표적 주자인 디오게네스. 참 매력적인 인물인데요. 견유주의자들에게 진실은 현재 내 행동으로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진실과 현재의 ‘나’가 분리되지 않습니다. 디오게네스가 알렉산드로스에게 보인 일화는 유명하지요. 자신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힘을 가진 절대권력자에게 햇빛으로부터 나를 가리지 말고 비켜달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 목숨을 건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말하는 이 파레시아와 고해를 통해 타자의 검증을 받는 것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기독교의 형식은 판이하게 다른 차원입니다. 기독교의 진실 검증 과정을 보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진실인가 아닌가에 대해 법의 심판을 통해서만 검증되는 시스템과 너무 닮았다는 거지요.

주체의 해석학 등을 통해 이미 배운 것들이긴 하지만 깜빡거리고 잊었던 내용 들을 다시 숙지하게 된 시간이어서 좋았습니다. 나는 내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율에 따른 주체성을 실현하고 있는가, 라고 생각해보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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