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 4학기 다섯 번째 시간(10.29) 공지/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것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10-25 19:03
조회
183
이번 시간에는 《육체의 고백》 1장에 관한 채운샘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제 기억에 가장 크게 남은 것은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딱 듣고 뭔가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명확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세례와 고백의 실천들에 대한 푸코의 분석을 읽으며 막연히 자기 자신의 분별력과 스스로에 대한 자신의 주권, 자기 자신의 진실 같은 것들을 모조리 포기해버리고 타인에게 이양한다는 것에 어딘가 무책임한 데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분명 인간은 잘못 생각할 수 있고, 우리의 잘못된 판단은 스스로를 악으로 밀어 넣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성으로부터 ‘죄’를 발견한다는 것, 우리가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에 더 이상 스스로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해버리는 것. 이것은 너무나도 게으른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을 채운샘이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 혹은 ‘인간에 대한 불신’이라고 짚어주셔서 무언가 뚫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사는 세상이 무언가 잘못 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지구의 온도는 매년 높아지고, 사람들은 정념에 사로잡혀 서로를 물어뜯고, 오늘도 불의는 승리합니다.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우리는 사유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으로부터 우리는 상이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선 플라톤의 경우, 이로부터 초월적 기준을 요청하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우리가 이 혼란스럽고 모순과 기만으로 가득 차 있는 세계를 잘 해쳐나가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과 다른 인간들을 조금이라도 더 올바른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는 초월적인 기준이 먼저 마련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기독교는 플라톤으로부터 논리구조를 가져옵니다. 이 구도를 가지고 와서 기독교는 무한한 진실-확인의 체제를 만들어냅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판단은 언제나 틀릴 위험, 속을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이 해야 할 것은 끊임없이 타인에게,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에게 자기 자신을 맡기고 확인받고 입증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어쭙잖게 무언가를 이해해보려고 하거나 자신에게 무엇이 좋은지를 알아보려고 할 게 아니라 절대적인 올바름 앞에 자신을 내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신을 믿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자신을 신뢰하게 된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제도를 믿고, 숫자를 믿고, 여론을 믿고, 법을 믿습니다. 우리의 앎을 인증해주는 제도 없이, 우리는 스스로의 앎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견해가 옳은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우리는 여론조사 결과를 참조합니다. 스스로 어떤 문제에 직면하기보다는 제도에 의존하고, 상식을 믿고, 규범을 따르는 것. 우리는 신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의 이름으로 이런 것들을 행하지만, 여기에는 여전히 자기 자신에 대한 포기와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이 작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고자 하는 욕망, 스스로의 예속에 대한 갈망, 죽음에의 의지. 우리는 정말 이런 것들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유로워진다는 건 너무 어렵기 때문이죠. 니체가 말하듯 “독립한다는 것은 극소수 사람의 문제”(57쪽)이며,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것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분명히 자기포기와는 다른 길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건 뭘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자기 자신의 판단을 절대화하는 것과 정반대의 태도입니다. 절대적인 것에 대한 믿음 자체를 버리는 것. 초월적 기준, 절대적 올바름, 실체적 진실 같은 게 없는 이 세계를 긍정한다는 것. 이것이 자기 자신을 믿고 또 세계를 믿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틀리더라도 계속해서 다르게 평가하고 다르게 해보기를 시도하는 적극적인 의지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다르게 평가하고 다시 시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견해를 과감하게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구원하려는 자는 우선 자기 자신에 직면해야 합니다. 다른 무엇으로 환원할 수 없는 지금 이 순간의 자신의 삶, 자신의 신체, 자신의 느낌에서 시작해야 하며 그 너머에 의존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 같은 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구원의 길은 까다롭고 고독한 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신의 역량과 욕망과 감각을 부정하지 않는 길이라는 점입니다. 어떻게 나 자신을 위해 살 것인가, 어떻게 나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할 것인가. 이게 요즘 제 화두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다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다음 시간에는 <육체의 고백> 2장 2번 ‘동정의 기술’ (~306쪽)까지 읽고 과제를 작성해오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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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26 13:00
    자기 자신을 존경하고 믿을 줄 안다는 것이, 우리가 아는 편협한 고집과는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