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4학기 여섯 번째 시간 후기

작성자
소소 (최난희)
작성일
2021-11-09 17:45
조회
166
어제 오늘 늦은 가을비가 내리네요. 다음 주가 수능인데 꼭 이맘때쯤 겨울이 피부에 와닿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저는 어제 백신 2차 접종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했습니다. 열이 나고 오한이 들고 뼈마디도 쑤시고 입맛도 떨어지고, 전형적인 감기몸살증세네요. 몸속 면역세포들의 치열한 전투를 상상해봅니다. 우리편 파이팅!!!

이번 주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어 푸코의 분석을 따라가며 ‘동정’, 한 점 티끌 없는 순결한 육체에 그토록 집착하는 기독교인의 정신세계를 탐사했습니다. “동정은 율법이 아니” (262p)라는 문장이 기억납니다. 동정이 율법이 아니라고 굳이 명시하는 이유는 뭘까? 동정의 목적은 모든 욕망과 탐욕을 뿌리째 뽑는데 있다면서 그것으로 가기 위한 실천적인 방법, 즉 율법적 차원으로 도달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라는 겁니다. 푸코는 이들의 “정결의 고행에서 행위의 절제에 초점을 맞춘 성윤리를 멀리 추방해버린 ‘주체화’의 과정을 인식할 수 있다”(362P)고 합니다. 저는 “실제로 기독교 윤리의 형성단계에서 기독교가 영혼의 테크놀로지 혹은 자기의 테크놀로지를 발전시킨 것은 확장되거나, 내면화되던가 간에 죄의 범주와 관련되어서가 아니라, 유혹의 개념과 관련되어서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라는 푸코의 분석이 흥미진진했습니다. 니체 세미나에서 다룬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속 인물들의 자폐적 자아 공간, 스산하면서도 갑갑한 내면 풍경을 보면서 진저리를 쳤습니다. 지옥이 따로 없구나! 싶었죠. 이 폐쇄적인 내면, 그 내면을 채우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선 ‘내면’은 초역사적인 실체가 아닙니다. 결론부터 얼른 말하면, 푸코의 정말 중요한 테제 “권력은 억압할 때조차도 생산한다”를 꼭 염두에 두고 분석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고대 이후 4세기 교부들이 기독교 윤리를 구축하는 과정, 자기 자신과 관계맺기 위한 구체적인 통치 테크닉들은 언뜻 보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 너무도 우리의 문제와 밀접하다는 느낌이 들어 놀랐습니다. 그런데 호리의 차이가 하늘과 땅을 가르는 것처럼 이들이 생산해내는 주체들은 고대 그리스로마인들과는 너무도 결이 다릅니다. 고대인들에게도 내면이 있었죠. 저는 일상 속에서 이들의 삶이 훤히 펼쳐진다는 말을 처음에는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속이 없는 인간들이었단 말인가? 푸코의 분석을 곱씹으며 내린 결론은 이들도 ‘내면’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 내면이 우리의 오감으로 접촉되는 감각적 세계 밖에 대한 내면, 신체와 분리된 오롯한 정신적 세계가 아님을 이해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니체는 우리가 독립된 실체, 혼자만의 나, 이런 개념이 생긴 것도 다 역사적 과정이 있다고 했죠. 고대인들에게 ‘혼자’라는 생각은 공동체 차원에서 가장 중죄에 해당하고 그에 따르는 벌도 고립이었죠.

어제 ‘즐거운 학문’을 정리하다가 이런 문장을 만났습니다.

“나는 저 먼 하얀 바다 위 태양이 떠있는 해안 절벽 위에서 그의 눈을 본다. 크고 작은 동물들이 그 햇빛 아래에서 이 빛과 저 눈처럼 침착하고 조용히 유희를 즐기고 있다. 그런 행복은 오직 끊임없이 번민하는 자만이 만들어낼 수 있다. 현존재의 바다가 그 앞에서 고요해지는 그런 눈, 다채롭고 우아하면서도 두려움을 주는 바다의 표면과 피부를 싫증 내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그런 눈의 행복. 그 이전에 이런 겸손한 열락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즐거운 학문 45절 에피쿠로스) 뭉클했습니다. 고대 철학자들이 유혹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었던가를 상상케하는 문장이었죠. 그들에게도 덧없는 현상세계, 나의 쾌 불쾌의 동정에 따라 거슬림 자체로 다가오는 것들이 문제였겠죠. 그러니 스토아 학파는 쾌 불쾌가 한 세트이기 때문에 더 많은 쾌를 원할수록 더한 불쾌와 맞닦뜨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들에게 문제는 쾌한 것들과의 관계를 조율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기독교인들에게 이것은 유혹이었으며 영혼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에스프리(우리의 가장 취약한 신체 어느 부분에 숨어 있다가 잠깐 방심하면 금방 우리를 공격하는 미세한 것들)였습니다. 이것들은 전략이 너무나 뛰어나서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맞설 수 없고 대타자인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패배하게 되고, 타락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 타락의 내용은 뭡니까?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진다는 논리죠.

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삶의 부조리, 삶의 잔혹성를 봐버린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출발점은 비슷한 듯합니다. 삶은 고통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이미 해석이 전제되죠. 겪기 싫은 일과 끝없이 마주쳐야 하는 존재의 괴로움이라는 해석 말입니다. 하지만 니체는 고통 없이는 인식도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의 주체화 양식이 죄의 범주가 아닌 유혹의 범주에서 구축되었다는 푸코의 분석을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선생님께서는 기독교인들이 두려워하는 유혹의 문제를 동양적 사유의 ‘미혹’과 구분하여 설명해 주셨죠. 눈앞이 밝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유혹은 질과 양에 관계없이 이미 그것은 실체적인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혹’은 우리의 불충분한 지혜, 그리고 감각기관의 취약성으로 인한 착각이죠. 그 자체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난 시즌 때 읽었던 스토아 철학자들의 고행은 영혼의 정결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의 내 삶의 평안을 위한 것입니다. 이들에게 고행은 효과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메커니즘에서는 놀랍게도 평안에 이른 것을 게으름과 교만의 증거라고 하죠. 고행의 실천으로 내가 뭔가 강해지고 달라졌다는 환희심이 느껴지자마자 그는 다시 타자의 시선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자신의 영혼의 찌꺼기를 고해바쳐야 합니다. 대단한 정신성의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의 치열한 자기 탐구의 길이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죠. 이들이 그토록 갈고 닦는 의식의 거울은 도대체 무엇을 위함일까요? 거울이 깨끗할수록 더러운 것이 더 도드라져 보이고 그러면 더한 고행을 해야 하는 무한한 순환.

푸코는 이 메커니즘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이 주체화가 인식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고, 이 과정은 자기 자신의 진실을 찾고 말해야 하는 의무를 윤리의 필수적이고 영속적인 조건으로 만든 것이다. 주체화 과정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자기에 대한 자기의 무한한 객체화를 전제로 한다.” (362P)

진리, 인식, 도덕의 삼종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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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10 11:47
    저는 일리치가 교회의 제도화를 문제 삼은 것이 떠올랐습니다. 교회 제도가 보편화되자 자신의 구원을 위해 교회를 나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나가는 행위 자체가 구원을 담보하는 것처럼 믿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요. 물론 교회라는 장치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자기 포기의 메커니즘에 복종하는 주체성이 문제이겠죠. 그리고 기독교적 주체와 근대적 주체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네요. 샘이 말씀하셨듯, 기독교는 적어도 삶의 부조리와 잔혹성에서 출발한다면, 우리 근대인들은 온갖 제도적 서비스들과 상품들, 우리 자신을 잊게 만드는 스펙터클들에 의존해서 이 고통의 문제를 보지 않으려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