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 4학기 일곱 번째 시간(11.12)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11-10 18:48
조회
175
“이러한 정결의 고행에서, 우리는 행위의 절제에 초점을 맞춘 성윤리를 멀리 추방해버린 ‘주체화’ 과정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과 함께 두 가지 점을 강조해야 한다. 우선 이 주체화가 인식과정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고, 이 과정은 자기 자신의 진실을 찾고 말해야 하는 의무를 윤리의 필수적이고 영속적인 조건으로 만든 것이다. 주체화 과정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자기에 의한 자기의 무한한 객체화를 전제로 한다. (…) 두 번째로 강조해야 할 것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자기의 진실을 찾는다는 이러한 주체화가 다른 사람들과의 복잡한 관계를 통해서 실행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첫째, 자기 속에서 자기 자신의 외양 속에 숨어 있는 대타자인 적의 세력을 쫓아내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고, 둘째, 그러한 대타자에 대해서, 대타자보다 훨씬 강하고 전능한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이길 수 없는 전투를 수행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며, 셋째,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고백, 그들의 충고를 따르는 일, 지도자들에 대한 변함없는 복종이 이러한 전투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362쪽)

푸코는 어떤 역설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 진실의 생산이 자기 자신의 무한한 객체화와 신과 사제들에 대한 전적인 의존을 전제한다는 것! 난희샘이 후기에 적어주셨듯, 이것은 율법의 문제가 아닙니다. 율법과 규약은 허용과 금지의 체계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벗어나는 행위들을 처벌합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명령에 따르면 되는 문제인 것이지요. 그러나 기독교적 복종의 메커니즘은 자기 진실의 생산을 매개합니다. 주체가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를 세심하게 구조화하는 과정에 있어서 타자의 시선이 깊숙이 개입되어야 합니다.

완전한 가시성 하에 자신의 내면을 노출시키는 것, 그러니까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이 우리를 보는 것처럼, 수호천사가 우리의 마음속을 속속들이 파고드는 것처럼 자기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도록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상한 것은 자신의 가장 내밀한 영역인 것으로 상정되어 있는 내면이라는 영역이 실은 타인의 시선의 적극적인 내면화에 의해 비로소 활짝 열리게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내밀한 것’이라는 게 존재할까요? 이것이야말로 나의 정체성이고 나의 본질이며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영역이라고 할 만한 것이, 몸이든 마음이든 어디든 정말 존재할까요?

우리의 가장 사소한 생각 하나도 우리 자신으로부터 온전히 비롯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매번 ‘발생’하고, 그러한 발생에는 ‘나’라고 한정지을 수 없는 온갖 것들이 참여하고 있지요. 우리의 가장 프라이빗한 영역조차도 너무나 사회적이고 시대적입니다. 그러한 영역의 분할조차도 우리는 특정한 담론의 질서, 권력의 배치, 시대적 조건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니까요. 이런 관점은 주체를 지웁니다. 그러나 주체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독립적 항이 아닌) 관계들의 다발로 이해하도록 합니다. 그러니까 나의 영혼이 나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체가 그것을 이루는 조건과 관계하는 방식이 나의 존재에 대해 말해준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내면’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문득, 어떤 것이 굉장히 특별하고 유니크하고 고유한 것으로 느껴질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관계성 속에서 그 대상을 이해하지 못할 때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어떤 자연물을 발견했을 때 그 자연물과 우리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 그리고 그 관계에 개입되어 있는 자연 전체의 질서 같은 것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신이 우리를 위해 이것을 마련해주셨다’라고 믿기가 쉽습니다. 스피노자가 말하듯 놀람의 정서는 인식 역량의 결여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고통, 욕망, 정념 같은 것들이 너무나 우리 자신만의 것으로 여겨질 때는 우리가 그것들에 일방적으로 지배되어 아무런 거리를 형성하지 못할 때, 더 많은 관계 속에서 이해하지 못할 때 그것들은 오로지 ‘사적인’ 것으로 드러납니다.

기독교인들의 내면으로 다시 돌아가 볼까요. 그들은 자신 안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상념들, 충동들, 욕구들, 이미지들과 정서의 움직임, 고통, 쾌락... 이 모든 것들을 그것들을 생산해내고 있는 조건과 더불어 이해하려는 관점을 결여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자연적 조건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뭉뚱그려 ‘악마’로 실체화하거나 ‘신’이라는 초월자의 시선 속에서 일괄적으로 심판해버리는 것이죠. 이러면 아마도 좀처럼 가벼운 마음을 가질 수 없을 것이고, (인식의 결여에 의해) 마음은 과잉 의미화된 해결 불가능한 불순물들로 가득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고백하는 것이죠. 자기 짐을 스스로 내려놓기를 결단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짐 지우기 위하여) 잠시 짐을 덜어주는 교회에 의존하고, 사제들에게 복종하는 것.

그런데 아직 문제가 남았습니다. 내면. 그렇다면 우리는 내면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할까요? 채운샘은 오히려 요즘은 내면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냐고,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우리의 밤은 프롤레타리아의 밤이 아니라 넷플릭스와 유튜브의 밤이 되었죠. 낮 동안의 번잡함으로부터 벗어나 홀로 남겨지는 시간, 어쩔 수 없는 그 고독의 시간을 우리는 스킵할 수 있고, 적극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기기와 와이파이만 있으면 전세계적으로 무한 송출 가능한 막강한 컨텐츠들에 의존함으로써요. 그래서 우리는 중독에 의해 성찰을 위한 시간조차 박탈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와 규창, 혜원누나가 함께 사는 광동빌라는 이러한 예속으로부터 빠져나오고자! 11시 이후 와이파이를 차단하는 규율을 실험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기독교인들의 비대한 내면과 우리 시대의 빈약한 내면.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저는 어쩐지 여기에 비슷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이 두 가지 의식의 상태에는 ‘타자’가 들어올 틈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 없음은 우리의 욕망이 자본이 제공하는 상품들에 밀착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자본은 우리의 한정적인 관심과 에너지를 끌어당기기 위해 우리가 가장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익숙한 감각을 자극하죠. 여기에는 관점이 변형될 여지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도 타자들에 대해, 외부 세계의 작동방식과 자기 자신을 이루는 외부성들에 대해 지독하게 무관심한듯 보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육체의 고백》 3장으로 돌입합니다. 1번 부부의 의무를 읽고 과제를 작성해오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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