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창 세미나

중계세미나 - 중용 3장까지 후기 및 4. 24 공지입니다.

작성자
중계
작성일
2021-04-21 17:47
조회
145
첫시간 중계세미나 소감은..... 줌이라는 세상 신기한 이런 통신으로 이런 세미나는 처음이라 긴장을 많이 했는데 시간이 그렇게 빨리 후딱 지났다는 사실에 놀랬습니다. 학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메모도 못했는데 끝나버렸어요. 제가 무슨 말을 했을까요? 우리는 중용3장까지 읽고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요? 저는 세미나가 끝나고도 지금까지 중용1장이 계속 맴돌고 있고, 아마 이런 말을 했겠지 하며 후기를 씁니다.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중용하면 대표적인 문장으로 많이 들었는데 딱 거기서 멈췄다고 했지요. 우리의 기억속에는 ‘천명지위성’을 제외한 나머지 중용 문장이나 중용이 왜 쓰여져야 했는지 남는 게 없습니다. 도올은 중용1장을 논어의 첫 문장과 비교하며 논어와 확실히 다르다고 했습니다. 논어를 편찬한 사람들이 공자에 대한 개념적 해석을 거부했다면 자사는 개념을 설정했고 그렇게 해야만 했던 핵심이 있었을 거라 합니다. 자사에게 1장이 요청되었던 이유는 ‘중용’이 무엇인지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20장부터 26장까지 성론(誠論)을 위한 포섭과정이라는 것이지요. 도올은 “『중용』을 읽고 ‘중용’만을 말하고 ‘誠’을 말하지 않는 자는 『중용』을 읽지 않은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자사의 誠론이 주역에서 말하는 ‘자강불식’(이것도 얼마나 광대한 의미인지 새삼;;)이라는 것만 말하고 뒤에 가서 논의하기로 하고 그렇다면 우리도 1장에서 말하는 性論을 무엇이라 정의내리기 보다는 과정으로서 이해하려고 애를 써야한다 했습니다.

쌤들은 도올의 글에서 기억에 남는 문장으로 ‘『중용』의 문장은 현대인에게 있어서는 ‘해석’의 대상일 수 밖에 없으며 어떠한 해석을 취하느냐에 따라 무한히 가변적’이다. ‘性은 오직 하늘이 명하는 것’이라는 동명사구로 환치되었을 뿐이다. ‘성은 천지와의 교섭 속에서 형성되어가는 과정적 성향이다.’ 를 언급하셨는데요, 인간에게 性이 있다는 것은 본성으로 주어진 신과 같은 목적이 아니라 ‘펼쳐냄으로써, 發하는 것으로서, 움직이는 것과 연관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性은 닭에게도 바위에게도 만물에 다 있다고 했을 때, 性은 形을 가진 만물이 形을 유지하려는 자기보존성향과 연결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맹자와 논쟁을 벌였던 고자는 타고난 그대로를 성(生之謂性)이라 했고, 도올도 공자시대에만 해도 性이라는 글자는 生 이라는 글자와 같이 쓰였다고 말합니다. 주역에서 자연이 ‘생생불식’한다 하였으니, 만물의 생생불식과 연관되어 말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도올은 ‘천명지위성’을 인간의 본성으로 보는 것에 대해 거부하며 본성에 자연을 동시에 사고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본성으로 性을 생각하게 되면 만물 중에 우월한 인간중심주의에 갇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늘에서 명한 성이 있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자연의 범위 안에 있음을 정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천명지위성에서 ‘네가 신이라는 것’이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가 아니라 ‘너는 자연과 교섭과정에서 무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이런 측면에서 요즘 생태학을 공부하고 있는 혜원샘은 중용1장이 생태와도 연결해 볼 수 있다고 하였지요. 아니 이게 어떻게 생태와 연관이 되는 걸까요?

중용 1장의 키워드는 ‘中’와 ‘和’입니다. ‘喜怒愛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희노애락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를 중이라 일컫고, 그것이 발현되어 상황의 절도에 들어맞는 것을 화라고 일컫는다.’  이 문장에서 도올은 ‘性은 타고난 그대로의 모습이며 그것은 희노애락의 성정의 문제’라고 밝힙니다. 무덤발굴자료인 『성자명출』을 근거로 하여 性은 心과 관련해서 논의가 되어 집니다.
『성자명출』에서는 ‘희노애비의 氣야말로 性이다.(喜怒愛悲之氣 性也)’라고 하였고, 중과 화에 대한 위의 설명으로 『성자명출』의 자료를 살펴보면
“모든 사람은 비록 性을 가지고 있지만 그 心 자체는 하나로 정해진 지향성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다. 그 心은 외계의 사물과 접촉이 이루어진 후에야 비로소 지향성의 원형이 생겨나기 시작하며, 기쁨의 감정을 맞이한 후에나 비로소 발출하는 활동이 시작하며, 또 학습을 거친 후에 비로소 그 지향성은 안정된 틀을 갖게 된다.”

그러니까 ‘희노애락미발 위지중’에 性이 편벽되거나 치우치지 않는 상태로 완전하게 구비되어 있으나, 性은 ‘희로애락의 氣’라는 즉 마음이 정서적으로 동하였을 때 지향성을 갖게 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희노애락미발 위지중’을 계사상전 제10장-易 无思也 无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과 연관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중의 상태가 ‘적연부동’함을 말하는 것이며, 희로애락이 발현되는 것이 ‘감응하여 천하의 일에 통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감정은 감응이라는 차원에서 즉 나와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타자들로 인해 끊임없이 슬프고, 기쁘다는 것이 증명되기도 하니까요.
주희는 性이 움직여 드러난 것이 희노애락의 情이라고 하였으며, 맹자도 性에 마음의 네가지 단서(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가 있기 때문에 ‘인의예지’를 실천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도올은 ‘率性之謂道’를 ‘인간의 감정상태를 바르게 선택하는 문제’로 ‘솔성’을 말합니다. 솔성에서 도는 길로서, ‘길道’ 이라는 것은 반드시 선택되어 반복적인 습성을 통하여 형성되는 것으로 말합니다. 감정의 발현이 매번 상황에 적중하는 문제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양에서는 인간의 감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達道라는 평생의 도를 달성하는 과정으로 수행의 문제로 보는 것입니다.  1장 마지막 중과 화의 다음 문장은 이렇습니다.

'中이라는 것은 천하의 근본이요, 和라는 것은 천하사람들이 달성해야만 하는 길이다. 中과 和를 지극한 경지에까지 밀고 나가면, 天과 地가 바르게 자리를 잡을 수 있고, 그 사이에 있는 만물이 잘 자라나게 된다.(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중과 화의 마지막 문장에서 도올은 ‘인간이 절제를 통하여 천지와의 조화를 이룩해야 하는 당위성을 갖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특히 환경과 연관해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생태학세미나에서 중용과 연관해서 정밀하게 연결해주시리라 믿어요) 도올은 원전을 만들지 않고 사는 문명의 방식을 힘쓰는 것을 '심성의 문제, 정감의 문제, 중절의 문제'에서 고민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주희는 ‘萬物育焉’을 ‘育者 遂其生也-육이라는 것은 그 가지고 태어난 삶을 완수한다’로 풉니다.  좋다, 나쁘다, 편하다, 혐오스럽다 등등 이런 마음에서 뒤따르는 행위들이 천지만물의 기름과 더불어 나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주역에서 말하는 천지의 생생불식과 인간의 생이 상호의존으로 생태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구요.

2장에서는 소인의 ‘기탄없음’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도올은 거리낌 없다는 것이 신중함이 없다고 하고,  거리낌은 인간에게 ‘거리’와 ‘여유’를 허락하며, 실수의 가능성을 줄여준다고 합니다. 역시 거리를 두지 못할 때는 감정에 푹 빠져있거나, 상대를 전혀 모르거나, 내가 갇혀 있을 때인 것 같습니다.  이외도 많은 말들을 했지만 - 아무말 대잔치?가 아니고요- 여기까지 할께요^^

다음시간 공지입니다.
『중용 인간의 맛』 4장부터 10장까지(201쪽까지) 읽습니다. 같이 토론하고 싶은 내용을 메모해 옵니다. 예를 들어 순임금의 大知에 대해서 나오는데요, 중용에서 말하는 앎에 대해서 미리 고민해보자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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