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창 세미나

4. 24 중용 2회 세미나 후기 및 공지

작성자
중계
작성일
2021-04-28 14:04
조회
184
중용 두 번째 세미나에서는 중용의 맛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중용을 산다는 것이 무엇이냐고요? 중용이 뭐길래 공자는 그토록 중용이 어렵냐고 한탄하시는 걸까요? 중용에서도 군자와 소인이 나옵니다. 2장에서 군자는 중용을 지키지만 소인은 반중용으로 거리낌이 없다고 합니다. 3장에서 공자는 ‘사람들이 중용의 덕을 지속적으로 실천하지 못하는구나!’ 탄식을 합니다. 4장에서는 중용을 행하지 못하는 知者와 遇者, 賢者와 不肖者의 과불급을 이야기하면서 공자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마시고 먹지 않는 이가 없지만 맛을 제대로 아는 이는 드물다’고 하십니다.

공자는 중용을 과불급이 없는 상태라고 규정하지 않습니다. 중용을 산다는 것은 맛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이구동성으로 그 어떤 말보다 맛을 아는 것이 중용이라는 ‘知味’라는 단어에서 중용이 무얼 말하려는 것인지 느낌이 팍 오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매일 음식을 먹듯 중용은 일용할 양식인데, 정신이 다른 곳으로 팔려있으면 된장국이 짠지 싱거운지 맛을 모르듯이 내가 지금 어떤 과불급으로 치닫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죠. 먼저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절제 없는 맛이란 존재하지 않고, 맛은 훈련의 결과로만 달성되는 것이라는 말에도 공감을 하며, 맛에도 앎과 연습이 필요하겠구나 했습니다. 된장국을 끓일 때 어떤 재료를 과하게 쓰거나 조금만 부족해도 맛이 이상하기도 하고, 요리 고수들은 알아서 적당히 끓여도 초보가 요리하는 음식보다 어딘가 모르게 감칠맛이 나기도 합니다. 맛과 관련해서 군자의 ‘和而不流’와 연관 짓기도 했습니다. 국간이 전체와 합해지면서 조화롭지만 재료는 재료대로 자신의 맛을 잃지 않더라는 것이지요.

공자는 군자가 조화롭게 어울리지만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진짜 강함이라고 말합니다. 자로가 강함을 묻자 공자는 ‘남방지강, 북방지강’으로 풍토와 기질에 따른 강함을 이야기합니다. 남방의 강함이 좋고 북방의 강함이 한단계 떨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은 자기가 살고 있는 풍토와 기질을 떠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기질 대로만, 사는 곳의 습관대로만 살려고 하면 과불급을 불러올 것이고, 이것이 강함의 반대인 허약함입니다. 공자는 도가 행해지지 않는구나! 국가를 평등하게 다스리고 녹봉을 사양하고 서슬퍼런 칼날을 밟을 수는 있어도 중용을 능히 할 수 없구나! 하며 탄식을 다시 합니다. 그러면서 순임금과 안회라는 두 인물의 중용에 대해서는 감탄해마지 않습니다. 중용을 살었던 순임금과 안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순임금에게는 '大知'라는 표현이 먼저 보였습니다. 중용에서 앎이 필요하다고 할 때 그 앎은 순임금의 대지와 연관되는 것 같다고 했지요. 순임금은 묻기를 좋아했고, 일상의 말에서도 살피기를 좋아했습니다. 우리끼리는 '不恥下門'을 말하면서 자신을 낮출 수 있는 겸허함이 공부더라고 했지요. 순임금은 몰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앎을 독단화하지 않고 현장에서 끊임없이 교섭하는 것으로서 앎을 생산해내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관념에 머물지 않는 앎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고 할까요. 순임금이 가까운데를 잘 살폈다는 것도 일상에서 숨어 있는 도를 볼 수 있는 눈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일테구요. 순임금은 ‘사람들의 추한 면을 덮어주고 좋은 면을 잘 드러냈다(隱惡揚善)고 합니다. 惡이 도올은 추함으로 해석하지만 보통은 나쁜 것을 숨기는 것으로도 해석한다는 말에서 선생님의 고민이 나오기도 했답니다. 반 아이가 물건 훔치는데 나쁜 것을 어떻게 숨기냐고요. 장점이 보이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나요. 저는 순임금이 추함을 덮어주었다는 말이 벌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미움의 감정이나 내 감정을 투사해서 상대를 보지 않았다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줄줄 말은 쉽다 만은 현실에서는 보통일은 아니겠구나 싶습니다. ‘신독’차원에서 존재를 이해하는 데까지 가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은악양선’을 하려면 나타난 것만이 아니라 전체와 연관성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도 말했지요. 순임금은 일상의 세계에서 은미한 도를 잘 보았다는 말입니다. 또한 안회의 하나의 선한 일이라도 깨닫게 되면 진심으로 고뇌하는 모습에서 중용이 일상의 작은 문제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得一善’ 하나의 선이라도 얻게 되면! 중용은 결코 거창한 덕성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것을 하지 않음으로 중용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구요. 계사전에서 ‘소인은 작은 선은 이로울 것이 없다하여 행하지 않으며, 작은 악은 해로울 것이 없다하여 고치지 않는다’는 말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중용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작은 것을 시시하게 여기는 오만함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장에서 공자는 ‘나는 능하지 못했어(未能也)’라는 말을 여러 번 하셨는데, 공자의 이런 모습에서 공자가 얼마나 우리더러 중용을 살길 바라는지 심정이 전해지도 했습니다. 학인들은 공자처럼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스스로 낮아지는 차원이라고 했습니다. 상대를 높여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상대에게 기준을 두고 자신을 낮추게 되면 어떤 감흥도 느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도의 費와 隱에 대해서는 다음시간에 계속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은 279쪽 중용 20장까지 읽습니다. 19장까지는 중용의 일상성의 주제가 계속 등장하고 있고, 20장이 ‘애공문정장’으로 내용이 긴데 誠이 최초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번 읽어오시라고욤. 그럼 다음시간에 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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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4-28 22:09
    유쾌한 은자씨~^^ 일목요연한 정리로~ 세미나 시간이 다시금 머리에 스쳐지나갑니다~ 맛있는 중계세미나 한주쉬고 담주에 봬용~^^

  • 2021-04-29 10:59
    세미나도 이렇게 후기를 쌈박하게 쓰시는 군요. 저는 중용의 한자는 일단 패스하고 읽고 있는데 은악양선 음음음... 셈나하던 기억이 다시 떠오르네요.
    일상에서 맛을 생각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중용 실천은 못하더라도 조금씩 여러 맛을 생각해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