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창 세미나

중계세미나 3주차 후기

작성자
희진
작성일
2021-05-12 00:14
조회
196
이번에 읽은 텍스트 중 제가 가장 관심 있게 보았던 장은 [순기대효장]에 대한 도올의 해석입니다. 무심하게 읽다가 ‘효(孝)’를 해석하는 부분이 나오자 갑자기 제 눈이 반짝반짝해지더군요. 그동안 ‘효’를 무거운 짐처럼 여겼거든요. 그러면서 이런 의문이 계속 따라다녔어요. ‘부모님께 효도해야 한다는 주어진 도덕을 아무런 의심 없이 당연히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또 ‘효라는 것은 가족이라는 형태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을 억압하고 있는 가치야’라고 폄하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요즘 그것을 당연히 따라야 하는 도덕이라고 여기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요즘 많은 젊은이들이 효를 구태의연한 가치로 여기는 것 같기도 하고 어린 자녀를 둔 제 주변의 부모들이 ‘이제 아이들한테 효도 받길 기대하긴 어려워.’라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듣기도 합니다.

그런데 도올은 효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단박에 이렇게 말합니다. “효(孝)라는 것을 우리는 단순히 ‘효도’라는 매우 일상적인 덕목으로 이해하여 규범윤리의 말단적인 카테고리처럼 취급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인식의 부작용이다.”(224쪽) 제가 이해하고 있던 효가 딱 ‘효도’라는 수준이었죠. 일상적인 규범윤리로서 말이죠. 그렇다면 효도가 아닌 ‘효’가 무엇일까요?

도올은 ‘효’를 ‘생명의 원초적 충동’(230쪽)이라고 말합니다. 아니, 효를 다분히 인간이 만든 도덕이라고 여겼는데 원초적 충동이라니! 인간은 태어나면 엄마라는 ‘절대적 타자’로부터 ‘절대적 의존’을 체험하게 됩니다. “절대적 타자는 나의 몸의 생명영양체계를 가동시켜주는 절대적 양육, 그리고 모든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절대적 보호의 비언어적 체험의 주체”(228쪽)입니다. 다른 포유류 역시 젖을 통해 ‘한 몸’이라는 의식적 체험을 거치지만 (227쪽) 인간은 이와는 다른 체험을 거칩니다. 바로 가족이라는 단위의 존속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우선 가족이라는 단위의 존속이 문명 속에서 영속화된다. 그리고 인간은 엄마의 추억을 죽을 때까지 영속시킨다. 절대적 의존과 절대적 보호의 추억은 현실적 엄마와 무관하게 언어의 저변에 깔리게 된다.”(230쪽) 도올은 “아가페적 사랑은 ‘태양’과 ‘엄마’밖에는 없다.”(231쪽)라고 말하는데요. 태양과 같이 어떤 의도나 댓가를 바래서 베푸는 게 아니라 흘러넘치기 때문에 주는 것, 그것이 여기에서 말하는 절대적 보호인 것 같습니다. 이런 절대적 의존의 체험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에 감응하여 절대적 감사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요? 나의 존재를 있게 한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본능적인 감사함. 이것이 생명의 원초적 충동으로서의 효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충동으로서 효를 의식적으로 규범으로 만들어버리고 나를 억압하는 가치로 여겨 그것을 부정하려는 것은 왜일까요? 또는 그것을 지나간 옛 가치로 폄하하려는 충동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저에게 하는 질문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신장 투석 중인 아버지에게 느끼는 죄책감(자식으로서 아무것도 안하는..)에서 벗어나고 싶어 그런 것 같은데요. 작년 니체수업에서 배운 것을 상기해보면 죄책감은 내가 원해서 작동시키는 건데,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고수하고자 또는 다른 무엇을 시도하기 싫어서 죄책감을 발동시키는 건가 하는 의심을 해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효를 충동으로 긍정하면 저절로 우러나오는 감사함을 그대로 가지고 아버지를 대하면 그게 다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버지에 대한 죄송함도 이 감사함에 내포된 자연스런 감정이고 그렇다면 굳이 죄송한 마음을 부정할 것도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이러한 효는 제사와 관련이 있습니다.(231쪽) 절대적 타자는 어머니의 절대적 타자로 거슬러 올라가고 결국 역사의 연속성 속에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깊은 깨달음, 이것이 제사라는 의식을 통해 표현되는 것입니다. 은남샘은 이것을 내 존재가 모든 생명에 빚져 있다라는 자각, 그럼으로써 갖게 되는 생명에 대한 존중감. 이것이 효라고 표현을 하셨죠. 이러한 존재에 대한 인식은 필연적으로 미래세대로 이어지게 됩니다. “나라는 존재는 유구한 생명의 연속의 한 고리라는 자각, 그리고 나의 선업이 후세의 인간세의 복지를 가져온다는 이 과거 - 현재 - 미래의 연대감이야말로 인간이 존속하는 의미이며, 그것이 곧 제사의 본질”(244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각 때문에 중용에선 그렇게 수신, 신독, 성(誠)을 강조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존재가 유구한 생명의 연속선상의 한 고리일진대!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몸을 성실히 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중용에서 말하는 성(誠)에 대한 해석이 재미있었습니다. “부모님께 효순하는 것은 방법이 있으니, 자기 몸에 돌이켜보아 성실하지 못하면 부모님께도 당연히 효순할 수 없습니다. 자기 몸을 성실하게 하는 것은 방법이 있으니, 선(善)을 명료하게 인식하지 못하면 몸을 성실하게 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중략) 성(誠)해지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선(善)을 택하여 굳게 잡고 실천하는 자세이니 보통 사람의 경지라 할 수 있지요.”(255쪽)

제1장 천명장에서 천명이 인간의 성(性)이고 성(性)을 따르는 것이 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제20장 애공문정장에서 도를 행하게 하는 덕이 성(誠)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性)이란 생, 생성이므로 몸을 성실히 한다는 것은 곧 천지만물의 생성에 따라 몸을 닦는다는 것, 혹은 생성으로서의 몸을 닦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위에 언급한 것처럼 성(誠)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선(善)을 택하여 굳게 잡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선이 무엇인지 책에서 정확히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나 니체가 말하는 주어진 도덕으로서 선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성(性)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선을 택하여 굳게 잡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천명, 성(性)에 따르는 삶은 아무 노력 없이 되는 게 아니라 그러한 충동을 기르고자 하는 실천, 즉 몸을 성실히 하는 게 필요한 것이죠.

그리고 이렇게 몸을 성실히 할 때 이것이 자유로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제14장 불원불우장에서는 “자기를 바르게 하면서 나의 삶의 모든 책임을 타인에게서 구하지 말아야 한다.”(205쪽)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도올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사의 요청은 인간 자체로 회귀된다. 모든 나의 존재의 책임을 타(他)에게서 구하지 말라! 그러므로 하느님을 원망하지 말라! 인간에게서 자율의 범위는 충분히 확보되어 있다. 인간 그대가 곧 하느님이요 대자연이다.”(206쪽) 성에 따르는 삶, 이것은 몸을 성실하게 하는 나의 실천에 달려 있는 것이지 다른 누군가에게, 하느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나의 존재가 실체적 외부에 달려있지 않기에 나에게는 자율의 범위가 충분히 확보되어 있는 것입니다. 몸을 성실히 함으로써 자율을 확보하는 것. 이것이 자유로운 삶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서 또 니체가 떠올랐는데요. 니체는 매 순간이 내가 원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게 펼쳐지는 삶은 나의 원함으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긍정하는 것이 중용에서 말하는 자기책임인 것 같습니다.

어쩌다 중계세미나에 참여하게 되었다가 어쩌다 효를 만나게 되어 반가운 마음으로 후기를 작성했네요. 세미나에서 오고 간 많은 얘기를 담지 못했지만(솔직히 못 알아듣는 얘기도 많았구요ㅋㅋ) 후기는 쓰는 사람 마음대로라 생각하고^^ 학인 분들이 이해해줄 것이라 믿쑵니다! 토요일 이른 아침, 우리 눈곱 떼고 만나요~~
전체 3

  • 2021-05-12 09:40
    아이구 희진쌤~~ 이렇게 후기도 잘 쓰시고 니체 공부한 것도 이렇게 저렇게 고민 하고 계시구만 그동안 어떻게 참으셨어요. 얼렁 공부로 돌아오십시오^^ 반장보다 훠~얼 백 배 나은 정리입니다. 이번시간에는 효와 제사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나누셨는데 저도 샘 말씀처럼 바빠서 코빼기도 잘 못비치는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이 부정할 것이 아닌 그냥 그 마음대로 전화라도 드리고 살면 되겠다 싶어 편안하더라구요. 중용의 철학은 참으로 귀하고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불어 일상에서 내 몸을 성실하게 하는게 진짜 전부로구나로 하는 자각도 들고요. 요즘은 주변에 중용 귀신 cctv - 꼼딱마!!가 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삽니다.

  • 2021-05-12 10:04
    자진해서 후기쓰신다 하실때 멋찜 폭발이었는데...이런글을 쓰시다니...중계세미나 끝나고 중용이 머리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ㅋㅋ 복기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아버님의 구체적 사례에 저도 다시금 돌아보는 기회도 갖고 니체의 죄책감 얘기에 오늘 사유할게 생겨서 감사합니다~^^ 토욜날 만나용~^^

  • 2021-05-14 11:06
    희진샘, 자진해서 내맘대로 이런 멋진 후기 쓰시기 있기 없기?! 구린 유머는 용서를 ㅎ
    효와 제사를 당위나 그리움, 또는 후대의 화합 정도로 여기고 있었는데, '연속성'이라고 해석함으로써 인간의 본능적이고 영적인 부분까지 설명해 주는 것 같아 저도 아주 좋았습니다.
    그 죄책감도 연속성을 잘 펼치고 싶은 마음의 발로이겠죠. 아~ 좋네요. 희진샘께 하트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