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비기너스 세미나

뉴비기너스 시즌3 : 8주차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10-13 02:23
조회
166
지난 시간엔 《국가》 5, 6권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5권의 주된 내용은 철학자의 존재 규정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자가 통치하거나 통치자가 (제대로) 철학을 하지 않는 한, 인간들 사이에서 나쁜 것들의 종식은 없을 것이다! 라는 플라톤의 유명한 철인통치론을 주장하자, 아데이만토스와 글라우콘이 다시금 성실하게 딴지를 걸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딴지의 골자는 현재 철학자라고 불리는 자들의 평판은 그다지 훌륭하지 못하며, 그들이 정말로 이상국가를 실현할 만한 존재들인지도 미심쩍다는 것입니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이것이 사실 철학 자체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철학을 참칭하는 자들에 의해 철학이 더럽혀졌기 때문이라고 응수합니다. 대중이라는 곰을 조련하는 기술을 지식 그 자체로 둔갑시키는 소피스트들과 그들에 의해 현혹된 우중들 사이에서, 진정으로 철학에 어울리는 뛰어난 재능과 도덕적 자질들을 지닌 사람들은 자연히 철학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여기서 흥미로웠던 것은,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의 자질로 뛰어난 지능(쉬이 외우는 능력 등)만이 아니라 용기와 절제 같은 윤리적 덕목들 또한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철학자’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철학자’가 혹시 동일한 이름을 공유하고 있을 뿐 실은 전혀 다른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철학자는 인식을 추구하는 자이지만, 그에게 인식행위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존재의 여정에 의해 규정되는 듯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철학자는 자신이 추구하는 진리에 따라 사는 자, 말하자면 진리와 닮은 자입니다. 진리가 항상되고 변함이 없으며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철학자 또한 자신의 삶으로 그러한 진리를 구현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대목들을 접하면 새삼 스스로가 철학에 합당한 인간인지 돌아보게 됩니다. 소크라테스가 거품을 물고 비난하는, 철학의 이름을 오염시키는 부류에 속하는 건 아닌지!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다시 하게 되네요.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면 스무스하게 이데아에 관한 논의로 넘어갑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자가 변치 않는 것을 추구하는 자라고 정의하면서, 철학자가 추구하는 그 진리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하죠. 이데아. 플라톤을 직접 읽기 전에도 여기저기서 접해본 개념입니다. 그렇지만 워낙에 요상한(?) 개념인지라 다시금 살짝쿵 당황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이데아의 모상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그렇다면 이데아는 하나인가 여럿인가? 우리가 보기에 하찮은 것들, 예를 들면 먼지의 이데아 같은 것도 존재하는가? 플라톤은 이데아가 정말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걸까, 아니면 그것을 가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걸까? 이렇게 혼란스러워질 때에는, 뉴비기너스 첫 번째 시즌에 읽었던 군나르 시르베크와 닐스 길리에가 쓴 《서양철학사》 맨 앞 장에 나오는 팁을 떠올립시다. 어떤 철학적 주장이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것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와 더불어서 그것을 보아야 한다는 팁. 그 책에서 예를 든 탈레스의 ‘만물은 근원은 물이다’의 경우에,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탈레스의 결론뿐만 아니라, 그의 질문방식이기도 했습니다. 즉 그는 변화하는 것들 가운데 변하지 않는 근원적 요소를 찾고자 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초월적인 요소들을 개입시키지 않고 세계를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제기하는 문제는 인식론적이고 윤리론적인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우선 이데아가 없다면 우리는 지성은 개별적인 대상들만을 지각하는 차원을 넘어서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많은 대상들을 인식하는 것, 더 많은 정보를 소유하는 것을 ‘지성’과 동일시하진 않죠. 어떤 참된 것, 참된 원리가 이 변화무쌍한 경험세계 너머에 존재하고 있어야 인간은 그것을 향해 자신의 지성을 도야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데아가 없다면, 예를 들어 소피스트들처럼 자신의 필요에 따라 상대를 설득하고 상황논리에 입각하여 그럴듯한 논변을 늘어놓는 것이 지혜라고 불리더라도 뭐라 반박할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이데아가 없다면 우리는 윤리의 문제를 규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럴 경우엔 개별적인 좋음들만이 있을 뿐 우리는 윤리적인 합의를 이뤄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위가 좋은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으려면 그것을 어떤 원형이나 규범과, 즉 좋음과 비교해야만 한다. 그 행위가 이 원형과 유사한 한, 그 행위는 좋은 것이다.”(군나르 시르베크, 닐스 길리에, 《서양철학사》, 이학사, 92쪽) 플라톤은 이데아 개념을 통해 보편적 윤리의 문제가 작동할 수 있는 영역을 구축합니다.

다음시간에는 《국가》 7, 8권을 읽고 모입니다. 드디어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가 나옵니다. 기대 됩니다! 그럼 곧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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