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회 세미나

[청문회] 2학기 에세이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1-08-17 19:19
조회
112
이번 시간에 《농경의 배신》까지 읽으면서 이제 저희에게는 에세이 발표만 남았네요. 와~ 결과야 어쨌든 이번 학기에도 참 많은 텍스트들을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합니다. ㅎㅎ 철학적으로 국가를 비판하는 《장자》의 여러 에피소드, 국가로 환원되지 않는 정치적 운동을 보여주는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국가가 인류의 진보된 생활양식 혹은 발명품이 아님을 인류학적으로 분석한 《농경의 배신》. 저번 학기에 읽었던 텍스트들처럼 하나하나가 두고두고 곱씹어 볼 만한 텍스트들이었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발표할 에세이들도 당장은 정교하지 않아도 계속 발전시켜 볼 만한 주제들로 정리됐으면 좋겠네요.

이번에는 따로 후기 없이 제가 간단하게 토론 내용을 정리해볼게요!

 

국가의 붕괴를 기뻐하며

장자가 국가를 비판하는 대목을 읽으면서도 해결되지 않는 찝찝함이 있었죠. 국가가 어떤 점에서 폭력인지는 대략 알 것 같은데, 그렇다면 국가가 없어도 된다는 얘기인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죠. 아무리 국가의 폭력성을 비판하고, 거의 모든 정권의 무능력함을 지적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국가 안에서, 정권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제도와 정책이 보편적으로 큰 효력을 발휘하지는 못해도, 그것들이 없는 것보다는 나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장자의 논의가 구체적으로 소화되지 않았던 것도 그가 어떻게 국가를 넘어가려는지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농경의 배신》에서 ‘국가의 붕괴’를 특별하지 않은 사건으로 설명했던 부분이 힌트가 되는 것 같습니다. 제임스의 분석에 따르면, 국가 안에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은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존을 무엇보다 우선하며, 국가가 자신의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국가 밖으로 도망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국가의 붕괴는 그렇게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국가는 전쟁이든 전염병이든 식량 부족이든 아주 다양한 요인으로 숱하게 해체됐습니다. 그러나 한 국가의 붕괴는 동시에 새로운 국가(중심)가 형성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합니다. 저자는 이런 관점에서 ‘붕괴’를 다르게 바라봅니다.

“내가 도전하려는 것은 이제껏 거의 검토된 적이 없는 한 가지 선입견이다. 이 선입견에 따르면, 국가의 중심이 절정에 이르러 인구가 집결되어 있던 것은 문명의 승리인 반면, 이 인구가 탈중심화되어 더 작은 단위들로 나뉘는 것은 정치 질서의 좌절이나 실패다. 나는 이 선입견에 도전하려 한다. 나는 우리가 붕괴를 ‘정상화’하고 오히려 그것을 정치 질서의 주기적이며 어쩌면 유익하기까지 한 재공식화라고 보아야 한다고 믿는다. 우르 제3왕조, 크레타, 진(秦)과 같이 더욱 집중화된 명령 및 배급 경제 체제들에서는, 문제가 더욱 복합적이었고 집중화에서 탈집중화 그리고 재결집으로 이어지는 순환이 흔하게 일어났던 것 같다.”(266~267)

국가와 같은 중심적 세계의 관점에서 붕괴는 질서가 해체된 아비규환의 사건이지만, 외부의 다중심적 세계의 관점에서는 새로운 중심을 회복할 수 있는 사건입니다. 국가 안에서 살아가는 문명인은 국가 밖에서 살아가는 야만인을 멸시하고 깔보지만, 이들의 관계는 언제든 전복되고 반대가 될 만큼 유동적이었습니다. 여기서 저자가 주목한 점은 국가와 외부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역동적인 관계를 가능케 하는 데에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어떤 집단에 속해있어도 빠져나올 수 있다는 각 개인의 원초적 본능, ‘어떤 사람도 자신의 자연권을 전부 양도할 수 없다’는 스피노자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한 사회가 형성되고 유지되는 것은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공동체 구성원 각각의 생존에 이롭기 때문이고, 해체되는 것은 반대로 구성원 각각의 생존에 해롭기 때문입니다. 비약이지만, 어쩌면 장자의 반국가적 얘기들은 어떤 국가에서도 불화할 수밖에 없는 기본적 조건을 지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가가 성립하고 해체하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가능케 하는 힘에 주목한 스피노자와 반국가를 말하면서도 이상하게 정치적인 장자가 《농경의 배신》에서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지도를 그리자

제임스나 장자의 관점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서구역사-국가-중심적 관점을 버리면 완전히 새로운 역사와 지형의 배치를 그릴 수 있습니다. 토론 때 《농경의 배신》에서 ‘암흑기’에 대해 분석한 부분이 재밌다는 얘기가 나왔죠. 은연중에 기록된 집단의 이야기를 믿고 기록되지 않은 집단을 판단하게 되는데요. 이미 저자가 밝혔듯이, 수렵·채집민의 삶 혹은 국가 밖에서 정착하며 살아갔던 사람들의 삶이 국가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보다 열등하다고 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는 역사에서 우월하게 기록된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진 시기와 그렇지 않은 시기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르네상스 이전의 중세시대는 ‘암흑기’로도 불립니다. 왜냐하면 어떤 문화적 유물도 발견되지 않고 정치적으로도 발달되지 않았다고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르네상스는 ‘재생’이란 뜻의 단어인데,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화가 다시 나타났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흔히들 르네상스에 이르러 종교적 미신에서 벗어나 합리적 이성을 사용하고, 인권 같은 개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말하죠. 그러나 이는 르네상스를 중심에 두고 일방적으로 중세시대를 평가한 결과입니다. 크로포트킨 같은 아나키스트는 오히려 중세시대에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정치 모델이 있다고 봅니다. 그는 생산량 같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이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는 관계에 주목합니다. 그로부터 단순히 더 많은 생산량을 위한 발전이 아닌 다른 가치들을 상상할 수 있는 정치적 공동체를 제시하죠. 갑자기 든 생각이지만, 저희가 잃어버린 것은 기록되지 않은 집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 집단의 정치적 수준과 그것을 형성하는 여러 요소들에 대한 상상력인 듯 합니다.

새로운 사회의 건설은 아니어도 새로운 시민 주체와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정치 영역을 만드는 게 지금 저희가 당면한 문제입니다. 국가 밖의 야만인들은 국가로 환원되지 않는 장애물인 동시에 국가가 자신의 내부로 포섭해야 할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야만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국가도 계속 유지·확장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지금 점점 지구 사회에는 그런 야만인들이 없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있는데 내부로 포용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요? 난민, 이민자들 같은 이방인들은 어디에서도 적극적으로 환영받지 못합니다. 혹은 그럴 준비가 안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야만인들을 일절 수용하지 못하는 사회는 어떻게 될까요? 이는 사회 내적으로도 이질적인 시민에 대한 태도와도 어떤 연관이 있을 듯 합니다. 장자에게서 정치라는 주제를 도출한다면, 소수자의 정치 혹은 이방인의 정치 이런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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