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읽기

5월 11일 후기 및 18일 세미나 공지

작성자
현옥
작성일
2017-05-16 08:23
조회
294
사실 속성이나 표현, 구별, 본질, 형상, 인식 같은 단어들은 우리가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고 써오기도 했던 말들인데, 바로 그런 문제를 다루고 있는 스피노자나 들뢰즈의 사유가 우리에게 왜 이렇게 어렵게만 느껴질까요? 생각해보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고 이렇게 저렇게 사용해왔었다는 것- 그게 바로 걸림돌이 아닌가 싶어요. 차라리 아예 몰랐던 거라면 그저 받아들이면 될 텐데, 몸과 마음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용법을 바꾸려니 어려울 수밖에요. 그동안 우리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등의 감각작용에 의해서만 세상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데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위의 단어들 역시 그런 방식으로만 표상되는 듯해요. 속성은 어떤 성격 같은 것으로, 표현은 겉으로 드러나는 표식으로, 구별 역시 눈으로 보기에 다른 것을 나누는 것으로, 본질은 한 사람(혹은 사물)의 정체성이나 특이성 같은 것으로, 인식은 어떤 확정된 진리를 내 머리 속에 옮겨오는 것으로요. 다시 말해 그동안의 우리에게는 감각에 의해 확인되는 세계만이 현실적이고 실재적인 세계였다는 거죠. 그런데 스피노자는 이 ‘실재(성)’에 대해 전혀 다른 퍼스텍티브를 우리에게 제시하고자 한다는 것! 범박하게 얘기해 보자면, 그동안 우리가 진짜(실재)라고 굳세게 믿어왔던 것(내 생각이 옳다는 것, 혹은 내 생각이 대상과 일치한다는 것)은 가짜(내 신체변용의 관념, 1종의 인식 혹은 상상, 수적구별, 양태적 구별)였고, 진짜 세계(‘신 즉 자연’이라는 원인으로부터 발생하는)는 따로 있는데 이거야말로 ‘리얼한 실재의 세계’라는 거죠. 우리가 이처럼 전도된 세계에서 망상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한은 예속된 삶에서 벗어날 길이 없으므로 ‘실재의 세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게 스피노자가 정말 하고 싶었던 얘기가 아닐까 싶어요.

들뢰즈 역시 그 실재의 세계를 얘기하기 위해 ‘표현’이라는 개념을 요청한 셈인데요, 이 역시 우리에게는 황당하죠. 들뢰즈의 ‘표현’이 ‘속성이 실체의 본질을 펼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제쯤은 다들 이해하셨을 텐데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펼치는 것’을 표현이라고 하고 있으니.... 그동안 ‘옷으로, 화장으로, 표정으로, 색깔로, 솜씨나 능력으로 나를 표현한다’ 는 식의 표현 말고는 상상해본 적이 없는 우리로서는 어려운 게 너무나 너무나 당연하다는....^^

그런데, 리얼한 실재의 세계가 이처럼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이 세계를 알 수가 있다는 말일까요? (저도 이번에야 발견한건데^^) 사실 들뢰즈는 표현의 문제 <서론>에서 이 방법을 명확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무한한 본질은 지성 속에 표상적으로 스스로를 현시하지 않고서는 표현되지 않는다.”(p.27)

"절대자에게서 특성들은 하나의 무한한 집합적 존재를 획득한다. 특성들을 하나하나 도출하는 것, 사물을 다른 대상들에 관계시켜 반성하고 펼쳐내는 것은 더 이상 유한한 지성이 아니다.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 스스로를 펼치는 것은 바로 사물이다. 그때 특성들이 동시에 ‘무한한 지성 아래 놓인다.’ 따라서 표현은 증명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다. 증명을 절대자 속에 들이는 것, 증명을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의 직접적 현시(드러냄)로 만드는 것이 표현이다. 증명 없이 속성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증명은 가시적이지 않는 것의 현시이자 또한 스스로를 현시는 하는 것이 그 아래 놓이는 시선이다. 증명은 ‘우리가 무언가를 지각하는 정신의 눈’이라고 스피노자가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p.33)

그러니까 그동안 우리가 ‘표현’이라고 생각했던 ‘특성’들은 신에 의해 사물이 스스로를 펼치는 과정(생산)이었을 뿐인데, 神은 이처럼 자신이 생산한 것을 동시에 인식하므로 사물이 펼쳐짐과 동시에 그 발생과정은 무한지성 속에 표상된다는 겁니다(무한지성 속에 표상되기 때문에 같은 속성을 가진 우리가 인식할 수도 있다는 것). 이 자체가 바로 神존재의 증명이기도 하며 리얼한 실재세계인 셈이죠. 그런데 이 세계는 그동안 우리가 사용해온 유한지성(감각에만 의존하는 인간주의적인 관점)으로는 파악이 불가하고, 반드시 무한지성(신의 관점)으로만 인식할 수 있다는 거죠. 그렇다면 ‘무한지성의 관점’으로 인식한다는 건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사유속성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특성들의 발생과정을 증명해가는 것’에 다름이 아니라고 들뢰즈는 얘기하고 있습니다. 증명을 통하지 않고 속성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증명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도록 하는 것이 곧 ‘표현’이며, 그런 과정 속에서 스스로가 놓인 실재의 세계 역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요.

정리해 보죠. 무한양태의 관점(우주적 관점)에서 보자면 神은 속성을 통해 직접적으로 자신의 본질을 ‘표현’하지만, 유한양태인 우리의 입장에서는 神이 그렇게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을 (눈으로 보고 내 좋을 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번역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엄격한 증명의 과정(무한지성이 발동되는)이고, 이 증명의 과정을 통해 사물이 펼쳐놓은 특성들을 절대자 속에 다시 들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실재세계가 리얼하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며 이것이 ‘표현’이라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전도된 세계의 망상에서 깨어나 리얼한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 그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확실히 쉽지 않은 일임에 분명한 듯합니다. 붓다도 내내 같은 말씀을 하셨고(매순간의 초발심과 수행의 과정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은 일..), 장자도 거꾸로 매달린 삶에서 풀려나는 것을 ‘현해(懸解)’라고 했거든요. 결국 우리가 하는 공부라는 것도 이 전도된 세계를 바로잡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보면 어렵다는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게 아닐까 싶죠. ‘어렵다’는 것 역시 그간의 習에 익숙해진 우리의 신체가 느끼는 ‘신체변용의 관념’일 뿐이니까요!

앞으로 <표현의 문제>를 읽어 가시는 동안은 ‘실재세계’와 ‘표현’에 대한 내 기존의 관념을자꾸 의심하시면서, 들뢰즈가 실재세계를 어떻게 표현(증명)하고 있는지(더 나아가 나는 지금 신이 펼쳐놓은 세계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시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다음 시간은 4장과 5장입니다. 발제는 희동쌤과 하동쌤, 간식은 은하쌤.

이사할 터전 청소를 할 예정이오니, 시간 되시는 분들은 3시 반까지 와주세요. 일단 규뮨에 모여 이동해 청소하고 (시간되면 짜장면도 한 그릇씩 먹고^^) 세미나 시작하려고요! 오랜만에 뵙는 분들이 많겠네여~ 반갑게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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