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절탁Q 니체5주차 후기

작성자
서현희
작성일
2017-08-28 16:17
조회
136
내 공부의 영원회귀

다음 강의 시간에 공부할 텍스트를 읽을 때 알 듯 말 듯 또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아니 많다. 조별 토론을 하고 채운쌤의 강의를 들으며 몰랐던 부분을 이해하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에 드는 생각은 '아! 여전히 모르겠다!'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때 몰랐던 것과 지금 모르는 것은 좀 다르다. 책을 읽으며 여전히 니체에게 징징대지만 처음 질문과는 좀 달라진 것 같다. 처음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접하며 나는 어떤 표상을 정해놓았다. 눈에 잡히는 것. 하나의 문장으로 설명될 수 있는 개념적인 그 무엇. 하지만 책을 읽으며, 또 토론을 하고 채운쌤의 강의를 들으며 영원회귀 사상이 쉽게 내 손에 잡히지 않으리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깨닫는다. 어쩌면 그래서 나에게 더 많은, 또 깊은 질문을 하게 되리라는 것도.

니체의 영원회귀

1. 누구의 것이냐?

우리의 질문방식은 ‘그것이 무엇인가’로 본질을 묻는 방식이지만, 니체는 ‘그것이 누구의 것이냐‘라고 묻는다. 따라서 같은 단어이지만 니체는 그것이 누구의 것이냐에 따라 해석을 다르게 한다. 니체가 인간의 세 가지 악을 들어 설명을 할 때 약자가 그것을 가질 때는 악이 되지만 강자가 그것을 가지는 것은 덕이 된다고 하며 심지어 ’지배욕‘을 강자가 가지면 ’베푸는 덕‘이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떤 자가 강자이고 약자인가. 강자는 긍정적인 힘의지를 가진 자이다. 그는 고통 속에서도 배움을 찾으며 무의미한 삶 속에서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 자이다. 그는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결과는 고려하지 않는 실존의 결단을 하는 자이다. 고통 그 자체로는 무거움이지만 그것에서 배움을 찾으면 가벼워질 수 있다. 그에 반해 약자는 무슨 일을 할 때 결과를 먼저 생각하고 고통을 겪으며 배움을 찾지 못하는 자이다. 그들은 두려움 때문에 한 발 내딛는 것도 힘들어하며 중간치를 사랑하는 자들이다.

2. 들뢰즈의 영원회귀 해석

들뢰즈는 영원회귀의 주체를 존재론적 차원과 윤리론적 차원으로 설명한다. 존재론적인 차원에서의 영원회귀는 반복에 대한 것이다. 동일성을 유지한다는 측면에서 플라톤은 동일성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을 생각한다. 이 세상은 이데아를 본떴기 때문에 동일하게 유지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외적인 것들을 불안정성 즉, 안정의 결여상태로 인식한다. 이것은 항상 안정을 먼저 생각하고 카오스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와 니체는 우리가 동일하다고 믿는 것은 ‘준 안정성’이라고 하며, 이것은 모든 것의 본질은 멈춘 것처럼 보일뿐이라는 것이다. 세계의 본질은 흐르는 것이고 동일하지 않은 것들이 만들어 낸 동일하게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모든 것은 생성하기 때문에 동일성을 유지 한다’라는 것이 영원회귀의 존재론적 설명이다.

윤리적 차원은 허무주의와 연관되어 있다. 세상은 목적(의미)이 없음에도 계속 흘러간다. 삶과 죽음의 반복이고 생로병사애별리고(生老病死愛別離苦)의 반복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반복은 우리에게 무의미하다. 세상에 새로운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보장되지 않는다면 우리 삶에 의미가 있을까? 이 무의미의 지점에서 나는 몰락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의 삶을 긍정할 것인가. 그러나 끝도 없는 반복이 동일한 것의 반복은 아니다. 생성은 ‘지금의 멸(滅)’이 전제가 되고 모든 절멸의 순간은 생명의 순간이다. 그렇기에 나는 내 삶을 결단하여 살 수 있고 그것을 긍정할 수 있다. 열심히 해도 보장되는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살아가는 것. 그것이 ‘긍정의 힘의지‘다. 영원회귀를 이해한 자만이 생성할 수 있다. 그런 자가 니체가 말하는 강한자다.

여전히 유효한 니체의 진단

니체의 말대로라면 사람은 근본적으로 허무주의자이다. 철학의 의무는 진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진단만 할 뿐. 바꾸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신들과의 주사위놀이가 도박이 아닌 이유는 행위가 결과에 종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들은 놀이에만 관심이 있지 인간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다. 트로이전쟁에서 파트로클로스의 창에 맞아 죽음을 맞는 사르페돈을 살리려 하는 제우스는 ‘운명의 법칙을 거스르면 안 된’다는 헤라의 질책을 듣고 운명에 순응한다. 이처럼 운명은 제우스도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운명 앞에서 부정적인 허무주의에 빠져 살 것인가. 그럼에도 내 삶을 긍정의 힘의지로 살아낼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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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8-29 10:46
    영원회귀에 꽂히셨군요ㅎㅎ 사람은 근본적으로 허무주의자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그만큼 허무주의는 무수히 많은 양태로 드러나겠죠. 자기 자신의 허무주의를 치열하게 '진단'하는 것이 그 자체로 삶을 긍정하는 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