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7.31소니후기

작성자
仙花
작성일
2017-08-06 17:37
조회
125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첫 번째 세미나 후기

 

우리가 논의한 내용들에서 니체를 정리하자면 그가 아포리즘을 통해 하고 있는 말은 한마디로 ‘절대성’에 대한 부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그가 스스로 일컬은 관점주의적 염세주의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가 논의한 ‘사적 체험의 보편화’에 대한 비판도 보편화를 통한 절대화의도에 대한 거부이며, 도덕주의자들에 의해 단지 개연적인 암시로만 생각됐거나 한 고장이나 도시에서 겨우 10여 년간 생각되어 오던 것을 ‘필연적 진리’로 증명하려고 함으로써 부패하게 만드는 철학자들의 원죄를 고발한다. 절대 가치를 지닌 진리란 없다. 그것은 ‘단지 항상 개연성과 그 개연성의 정도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엄밀하게 말하면 정신적 지평의 불확실성을 즐기고 있으며 진리의 확실성이라는 것 때문에 오히려 심연에서부터 진리를 지극히 싫어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개념의 명료성과 관련하여 나쁜 습관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반투명한 자, 불명료한 자, 노력하는 자, 예감하는 자들’을 불쾌하게 여기고 확실성(절대 가치를 지닌 진리)을 통해 이 불쾌감을 해소하려 한다. 이것은 ‘하나의 어떤 것’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니체는 그의 많은 저서에서 인간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사물은 끊임없이 생성하는 것이라 하면서, 그런 생성 속에서는 생성하고 있는 것이 고정되고 영속적인 것으로 비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그것’으로 비칠 수도 없다고 한다. 그러니 한 순간에 생성된 것을 붙들어 불변의 진리라 하는 것은 오류가 된다.

또하나, 우리를 격한 공감과 이질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킨 논제는 인간에게 사물을 비인격적으로 파악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인간은 모든 사물의 눈코입을 찾으려한다’는 말도 있다는 건화샘의 전언은 니체의 통찰에 대한 강력한 지지발언이 될 것이다ㅋ. 우리의 인격화 습성의 적용은 하나의 사상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닌데, 그 사상에 인격성을 부여하고 그것의 인격적 불멸성을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의 인격화, 인격적 불멸성을 믿는 신앙은 ‘지자의 악덕’ 즉 ‘교만’이다. 이런 우리의 습성은 또 ‘자연법칙’에 대한 미신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우리는 자연의 합법칙성에 어떤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고, 이러한 합법칙성이라는 표현을 통해 그것을 좀더 인간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건 인간중심적인 세계해석의 습성을 꼬집는 말로도 들린다.

니체는 인간적인 습성에 대하여 끊임없이 고민하고 비틀어서 마침내 이전에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사유들을 끌어낸다. 이른바 전복적 사유들이다. 그의 잠언들에서 우리가 주목한 또다른 전복적 사유들 몇 가지를 더 들어본다.

우리의 성격은 체험보다는 특정한 체험의 결여를 통해서 더 잘 규명된다.’(36)는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어떻게 체험이 아니라 체험의 결여가 우리의 인격이 되는 걸까? 짓밟혀보기 전에는 자신이 뱀이빨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를 알 수 없다는 말을 곰곰 생각해보면 자굼 는 짓밟힌 경험의 인격은 짓밟힌 체험이 결여된 상태에서의 뱀이빨을 갖지 않은(것 같은)인격인 것이다. 체험이 우리를 만든다고 생각해온 우리로서는 한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기막힌 사유가 아닐까.

계획을 세우는 것(70.85)에서는 계획은 언제나 우리의 정서와는 별개로 이루어진다는 것. 그래서 실행의 순간에 우리는 실수를 하거나 분노와 환멸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인간행동의 동기가 이성이 아니라는 뜻이 아닐까. 감각이나 정서가 이성에 앞서는 우리의 인간적인 면모를 통찰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의 행동이 이성적이라 믿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오해며 틀린 믿음이라는 걸 일깨운다. 니체의 죽음에 대한 사유(88)는 가장 전복적인 것이 아닐까싶다. 우리에게는 죽음에 대한 낭만주의적 태도가 있다. 그런데 니체가 볼 때 인간은 그 마지막 순간까지 허영심을 멈추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니체의 사유는 죽어가는 사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여기서 살아있는 사람의 허위를 읽을 수도 있다. 즉 우리는 주검 앞에서 숙연해지고 동정과 추모의 정을 가득 쏟아 그를 배웅한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선이었다고 추억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니체는 ‘죽어가는 자는 일반적으로 살아있는 자보다 더 정직하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니체에 따르면 죽음에 대한 낭만주의적 태도는 살아있는 사람의 허영심이고 위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성공은 동기를 신성하게 한다.’(91)는 미덕과 동기의 관계와 관련하여 미덕은 어떻게 실현되며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가로 이해하게 된다. 니체는 말한다. 미덕은 ‘천박한 동기->미덕 실행->달성된 미덕->심리적 쾌감->동기를 고상하게 만듦->고상한 동기를 배후로 또다른 미덕 실천’으로 이어진다고. 그리고 니체는 교육은 미덕을 강요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조건을 붙였다. ‘학생의 본성에 따라’.... 이것은, 아무리 미덕이라 해도 교육은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배우는 자에 초점이 놓여야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니체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니체를 읽으면서 드는 자괴감이 있다. 우리는 ‘매듭을 푸는 사람이 아니라 항상 사물에 매듭을 만들고 엉키게 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의심 때문이다. 그런데 니체가 말하는 우리의 결핍(36)이나 결함(86), 심지어 오류(2)나 허영심까지도, 때로 혹은 격렬하게, 우리 사유의 동력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런 것들이 뭔가를 움직이게 하지 않을까 하는... 이렇게 생각하는 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 인간성에 대한 합리화일까? 아니면 염세주의적 관점주의라 말해도 되는 걸까?

 
전체 2

  • 2017-08-07 16:03
    매번 후기로 감동을 주시네요ㅠㅠ 더 자주 부탁드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ㅋㅋ 마지막 질문은 같이 고민해볼 만한 것 같네요. 니체는 인간적인 오류, 결함, 허영심, 이런 것들을 버리라고 말하는 것인지? 혹은 그저 긍정하라고 말하는 것인지? 마저 읽으며 더 고민해보아요ㅋㅋ!

    • 2017-08-08 00:14
      오타를 미처 발견하지 못 하고 올렸네요, 부주의를 용서하소서;;
      그대로는 도무지 무슨 말을 하려했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오타인지라 수정하겠습니다.
      '자굼 는'ㅡ>'지금의 우리는'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