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소니 6월 25일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06-24 18:11
조회
126
하와이에서 복귀하신 경아샘과 함께, 지난주에는 《우상의 황혼》을 끝까지 읽었습니다. 《우상의 황혼》의 후반부에서 니체는 ‘자유’나 ‘평등’과 같은 현대적 가치들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전개하는데요, 이에 따라서 저희도 민주주의나 정치적 올바름, 자유주의 등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평등은 본질적으로 쇠퇴에 속한다 :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간격, 계층과 계층 사이의 간격, 유형의 다수성,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의지, 자신을 두드러지게 하고자 하는 의지, 내가 거리를 두는 파토스Pathos der Distanz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강한 시대의 특성이다.”(《우상의 황혼》, 176쪽)

니체는, 우리에겐 ‘가치 그 자체’나 다를 바 없는 ‘평등’을 가볍게 부정합니다. 평등은 쇠퇴에 속한다, 라고 말함으로써. 이 구절을 읽으며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평등을 가치 그 자체로 여길 때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의지가 평등을 ‘선’으로 출현시키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의지’의 결여로부터 평등이라는 신념에 이르게 되는 건 아닐까요? 우리가 고유한 차이를 구성할 수 없을 때 ‘차이’는 문제로, 참을 수 없는 것으로 출현합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같은 것을 욕망할 때 재벌의 라이프스타일과 우리의 라이프스타일 사이의 ‘차이’는 ‘결여’로, ‘불평등’으로 인식이 되는 것이죠. 자본주의 사회는 계층과 계창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거기에 이러한 ‘상대적 차이’를 다시 도입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화폐적 척도에 따른 상대적 차이를 재도입함으로써 계급·성별·인종을 막론하고 모든 개인들을 자본주의적 공리에 복종하는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죠.

평등은, 자본주의 내에서 결코 실현되지도 포기되지도 않을 도그마 같은 것으로 기능하는 게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를 왜소하게 만드는 평등이라는 공리가 아니라 우리의 고유한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자본주의에 저항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이와 관련해 40절에서 니체는 ‘노동 문제’란 “노동자를 계층으로 만드는, 독자적이게 만드는 본능을 가장무책임한 무분별함이 철저히 파괴해버렸다”(181)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노동자는 자본가의 욕망을 그대로 내면화했을 뿐, 계층으로서의 어떤 독자성도, 윤리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노동자가 더 많은 임금과 더 많은 보장을 위해 투쟁할 때, 그를 추동하는 욕망은 자본가의, 가장 자본주의적인 욕망이 아닐까요? 귀족노조의 문제도 역시 이러한 딜레마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더 많은 임금과 더 좋은 조건이 아니면 무엇을 위해 싸울 수 있을까요? 저는 최근에 ‘비기너스’에서 읽은 이반 일리치의 관점이 유용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리치는 부의 양극화와 같은 자본주의의 부정적 속성만을 지적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더 이상 상품 소비를 벗어나서는 능동적으로 우리의 삶을 구성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 상품과 전문가의 노예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고 말했죠. 그러니까 일리치는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될 수 없도록, 특정한 방식으로 욕망하고 생각하고 행위하도록 규정하는 조건과 싸우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항이란 기업이나 정부에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들이 주입하는 상품에 대한 필요로부터 자유로운 삶의 양식을 실험하기 위해서 함께 연대하는 것일 수 있겠죠.

“오늘날 개인은 잘라내버리는 일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어야 했다 : 여기서의 가능은 완전을 의미한다……하지만 정반대의 일이 발생했다 : 어떤 강한 고삐라도 그들에게는 지나치지 않을 만한 자들이 독립과 자유로운 발전과 방임을 가장 열렬히 주장한다―정치에서도 그렇게, 예술에서도 마찬가지다.”(《우상의 황혼》, 182쪽)

니체의 ‘자유’ 개념 또한 우리의 자유주의적 신념에 금이 가도록 합니다. 니체가 생각하기에 자유는 보장되거나 소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거듭 쟁취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178쪽). 왜냐하면 니체적 의미의 자유란, 자기 자신의 충동, 욕망, 사유, 행위에 고유한 양식을 부여하는 일을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신념화된 ‘자유’는 니체적 의미의 자유를 탄압하고, 니체적 의미의 자유인이 탄생할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고 있는 자유 개념은 우리 자신을 ‘그 자체로 주어진 것’으로 여기는 데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 무언가를 원하게 된 원인에 대한 인식,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조건에 대한 숙고가 결여된 채로 그저 의심을 거두어들이고 즉각적인 충동과 욕망을 따르는 것. 혹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태를 우리는 자유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물론 이런 의미의 자유는 소비를 통해서 밖에는 충족될 수가 없죠. 니체의 현대성 비판을 함께 읽으면서,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나의 권리, 나의 자유, 나의 자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고유한 차이와 고유한 삶의 양식을 구성할 수 있는 힘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벌써 내일이네요(^^;). 《안티 크리스트》를 266쪽 까지 읽고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제가 준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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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6-27 18:26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의지를 결여했을 때 평등이라는 공리를 요청하게 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상대적 차이에만 분노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