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소니 7월 2일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06-29 20:21
조회
123
“삶의 본능이 강요하는 행위가 옳은 행위라는 것에 대한 증거는 바로 기쁨이다 : 그런데 그리스도교적-독단적인 내장을 갖고 있는 허무주의자는 기쁨을 반박으로 이해했다……내적 필연성도 없고, 철저한 개인적 선택도 없이, 기쁨도 없이 일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보다 더 빨리 파괴하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의무’라는 기계보다 더 빨리 파괴하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니체, 《안티 크리스트》, 책세상 225쪽)

이번 주에는 본격적으로 《안티 크리스트》를 읽었습니다. 이번에 함께 읽었던 부분 중에서, 저는 이 구절이 진리(!)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가름 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바로 ‘기쁨’이 아닐까요? 물론 이때의 기쁨이란 우리의 존재역량이 확장되는 느낌이라는 의미에서의 기쁨이겠죠. 생각해보면 우리 몸은 그러한 기쁨과 무관한 활동을 잠시도 지속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몸은 정말 솔직한 것 같습니다. 어떤 자기 자신 안에서 그 행위에 대한 내적 필연성(즉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의무’로서 주어진 활동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우리를 지치게 하고 우리의 생명감을 감소시킵니다. 저는 이것을 군대에서 깊이 느꼈습니다. 제가 경험하기에 군생활의 가장 큰 어려움은 그곳의 어떤 활동에서도 ‘내적 필연성’과 ‘철저한 개인적 선택’과 ‘기쁨’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능동적 행위를 통해 기쁨을 구성할 수 없을 때, 권력과 위계질서에 스스로를 동일시함으로써 힘의 감정을 느끼려 합니다. 혹은 극도로 무기력해져버리죠. (진리나 도덕이 아니라) ‘기쁨’이야말로 삶과 생명의 근본적 법칙이라는 것. 이러한 사유는 어떤 종류의 예속도 거부하는 생명의 근본적인 혁명성을 긍정하게 합니다. 어떠한 올바른 도덕도, 완벽한 논리도, 객관적 공리도 우리의 기쁨의 역량을 봉쇄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한 허무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안티 크리스트》를 읽다보면, 기독교에 대한 니체의 비판이 실제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보편 도덕’(“비개인성과 보편타당성이라는 성격을 갖는 선”-225쪽)에 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니체의 그리스도교 신 개념 비판을 살펴보면 이런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니체는 신 개념 일반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 개념을 비판하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교가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일자(一者)로서의 신 개념을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 이전의 신들은 모두 민족 신이었습니다. 각 민족들은 “자신에 대한 기쁨을, 자신이 힘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그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존재에 투사”했죠.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감사하기 위해서 신을 만들어냈고, 때문에 “그런 신은 이로울 수도 해로울 수도 있어야 하며, 친구일 수도 적일 수도 있어야”(231)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그들 고유의 미덕은 온갖 것들일 수 있고, 그들이 삶에 감사를 표하는 형식 또한 한 가지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니체에 따르면 “긍지에 찬 민족은 희생하기 위해 신을 필요로”합니다. 이때 이들은 “분노와 복수와 질투와 조소와 간계와 폭행”(231)을 알고 있는 신을 만들어내게 되겠죠.

선하고 보편적이고 유일한 신이 출현하는 것은, “한 민족이 몰락할 때 ; 미래에 대한 믿음과 자유에 대한 그들의 희망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고 느낄 때”(232)입니다. 이때 그들은 감사의 형식이 아니라 복종의 형식으로서의 신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니체는 역사적으로 자기 고유성을 긍정하는 유대민족의 힘이 “내부적으로는 아나키, 외부적으로는 아시리아인에 의해 제거되었을 때”(245) 탈자연화된 신 개념이 탄생했다고 보았습니다. 삶을 긍정하는 고유의 형식을 만들어낼 수 없게 되어버렸을 때, 그들은 모든 행복을 복종에 대한 보상으로 불행을 불복종에 대한 벌로 해석하게끔 하는 추상적 ‘도덕적 세계질서’로서의 신을 발명해냈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렇게 신 개념이 탈자연화됨으로써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의 힘의 느낌 속에서 신을 발견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사제’ 계급이 급부상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사제는 신을 ‘성서’라는 텍스트 안에 가두고 그 해석의 권한을 독점함으로써 모든 이들 위에 군림합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 우리가 우리의 능동적인 행위 속에서 기쁨을 구성해내지 못하고, 삶에 대한 긍정의 형식을 만들어내지 못할 때,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권력에 대한 복종입니다.

다음 주에는 《안티 크리스트》를 끝까지 읽고 오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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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6-30 11:12
    기쁨의 느낌에 주목하는 것, 이걸 놓치는 순간 보상과 복종을 반복하는 '의무' 앞에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게 되는군요!
    <안티크리스트>를 읽으면서 '신을 죽인 니체'의 비판을 조금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탈자연화된 신과 싸우는 일. 좋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