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소니 7월 16일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07-14 11:13
조회
106
“내가 조만간 인류에게 역사상 가장 어려운 요구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기에 내가 누구인지를 밝혀두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 근본적으로 내 습관이 거부하고 내 본능의 긍지는 더욱 거세게 저항을 해대지만, 말하자면 다음처럼 말할 의무가 있다 : 내 말을 들으시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기 때문이오. 무엇보다도 나를 혼동하지 마시오!”(니체, 《이 사람을 보라》, 책세상, 323쪽)

‘니체한테 자서전은 좀 안 어울리지 않나?’ 《이 사람을 보라》를 처음 접한 우리의 반응이었습니다. 경아샘은 ‘니체가 자서전 쓰는 사람들 욕한 적 있지 않던가?’라고 하셨고 민호는 자신의 독자들에게 적극적인 오독을 요청하는 것처럼 보였던 니체가 ‘나를 혼동하지 마시오!’라고 말하는 게 영 낯설게 느껴진다고 했습니다. 저도 혹시 니체가 자기 사상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침묵과 무반응 속에서, 이해되지 못한 채로 남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니체 본인도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분명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며 원하지 않는지를 “소리 높여 열심히”(아침놀, 16) 말하는 것은 니체 스타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보라》를 일종의 자전적 에세이라고 간주한다고 해도, 이것은... 참으로 독특한 자서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니체라는 자아가 아닙니다. 니체는 자기 자신의 의사로서 (니체는 자기 자신이 환자이자 의사라고 말하곤 하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의 의사로서 그는 자신의 사상이나 사물들을 보는 자신의 관점을 일종의 생리적 현상처럼 묘사합니다. 니체-자아에 속하는 무엇이 아니라 병의 치료제로서, 특정한 생리적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요청된 무엇으로서 바라본다고 해야 할까요? 니체는 《인간적인 Ⅰ》에서 예술가들의 허영심이 자신이나 자신의 작품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원인 없는 결과처럼 제시하도록 부추긴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야 자신과 자신의 작품이 신비롭고 천재적인 무엇으로 보이기 때문이죠. 니체는 이와는 정반대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니체는 자신의 사상이 어떠한 토양 위에서 자라났는지, 자기 자신이 어떠한 힘들과의 관계 속에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보라》를 읽다보면 ‘니체’라는 개인에 대해 알게 된다기보다는, 어떠한 힘들이 니체를 관통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의 철학은 그러한 힘들에 대한 어떠한 해석의 결과인지를 알게 됩니다.

저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는 건강하다”(334)라는 니체의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리고 새삼 우리가 현대의학의 시선으로 우리의 몸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온갖 세균들과 바이러스들에 노출되어 있고, 언제 어디에서 병이 발발할지 알 수 없고, 전문가의 도움 없이는 언제든 쉽게 망가져버릴 수 있는 섬세하고 취약한 기계처럼 저 자신의 몸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니체는 기본적으로 생명의 근본적 작용이기도 한 ‘건강에의 의지’를 믿습니다. 그에게는 ‘부분적 퇴화’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부분적 퇴화란 전체적인 힘의 저하의 결과일 뿐이고 니체 자신의 신체가 전체적으로 능동적인 한 부분적 퇴화란 없다는 것이지요. 물론 신체가 능동적인 동안에도 어딘가 아픈 곳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치료의 대상이나 병적인 징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신체의 변이의 일부분일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는 우리 신체의 능동/수동에 대한 감각과 무관하게 전문가의 시선이나 정상의 규범에 따라 우리의 신체를 재단합니다. 자기 자신을, 신체를, 생명을, 삶을 믿지 않는 것이죠.

“이 모든 것에서―영양 섭취, 장소와 풍토, 휴양의 선택에서―자기 방어 본능으로서 스스로를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자기 보존 본능이 명령을 내린다. 많은 것을 보지 말고, 듣지 말며, 자기에게 접근하게 놔두지 말라는 것―이것은 첫째가는 현명함이자 인간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의 필연이라는 점에 대한 첫째가는 증거이다. 이런 자기 방어 본능에 대한 관용적 표현은 취향Geschmack이다.”(니체, 《이 사람을 보라》, 책세상, 366~367쪽)

니체에게 철학이란 ‘건강에의 의지와 삶에의 의지’를 번역해낸 결과물입니다. 그에게 근본적인 문제는 진리의 탐구나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영양섭취, 장소와 풍토, 휴양의 선택’입니다. 본능을 부정하고 감각과 본능 너머의 어떤 관념적 실재를 추구하거나 인식을 통해 본능을 개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본능을 더욱 강화하고, 더욱 예리하게 만들고, 능동적으로 되도록 하는 과정이 니체의 철학입니다. 아니, 그에겐 철학 자체도 스스로를 보존하고 방어하려는 본능에 의해 수행됩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취향’이야말로 철학적인 문제인 것이죠. 새삼 우리가 얼마나 ‘취향’이라는 말을 협소하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영화 취향, 음악 취향, 음식 취향 등등을 말할 때 그 취향의 주체는 항상 ‘나’라는 의식과 자아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취향은 항상 어딘가에 고착되고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죠. 그런데 취향의 문제를 훨씬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본다면 어떨까요? 스스로를 보존하게 하고 확장하도록 하는 것들을 취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것들을 차단하려는 생명의 근본적인 작용으로 본다면 우리는 우리가 매일매일 마주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훨씬 더 다양한 관점을 적용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주에는 437페이지까지 읽고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경아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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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7-15 09:50
    “자기 방어 본능에 대한 관용적 표현은 취향“ 이라는 니체의 말과 그 취향을 생명의 근본작용이라는 건화샘의 해석, 둘다 멋지네요~ 멋지다는 건 그만큼 제겐 아직은 낯설다는 것이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