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소니 7월 23일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07-21 22:02
조회
113
“기호의 속도를 포함해서 그 기호를 통한 파토스의 내적 긴장 상태를 전달하는 것―이것이 문체의 의미이다 ; 그리고 나의 내적 상태들이 특출나게 다양하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내게는 수많은 문체의 가능성이 있다―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었던 것 중에서 가장 다종 다양한 문체 기법들이 말이다. 내적 상태를 정말로 전달하는 문체, 기호와 기호의 속도와 제스처를―복합문의 규칙들은 모두 제스처 기법이다―잘못 파악하지 않는 문체는 좋은 문체이다. 내 본능은 여기서 실수하지 않는다. ―좋은 문체 그 자체라고 하는 것―이것은 ‘아름다움 그 자체’, ‘선 그 자체’, ‘물 그 자체’처럼 하나의 순진한 우매함이자 ‘이상주의’에 불과하다……”(니체, 《이 사람을 보라》, 책세상, 382~383)


이번 주에는 니체가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를 알아봤습니다. 읽고 쓰는 것에 대한 니체의 생각과 《비극의 탄생》에서부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까지의 저작들에 대한 니체의 후기(해설?)를 살펴보았습니다. 니체는 여기저기에서 글쓰기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는데, 여기에서도 문체에 대한 니체의 독특한 정의를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기호의 속도를 포함해서 그 기호를 통한 파토스의 내적 긴장 상태를 전달하는 것. 언어가 전달하는 것은 의미나 정보가 아니라 속도와 파토스라는 것. 언어에 엄청나게 민감한 사람이 아니면 이런 식의 정의를 내릴 수는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언어를 의심하지 않고 사용합니다. 언어가 세계를 투명하게 지시한다거나 언어 안에 어떤 의미가 내재한다고 믿죠. 그리고 “언어의 세계가 끝나는 곳에서는 존재의 세계도 끝난다고”(아침놀, 131쪽) 결론지어버립니다. 그렇게 우리는 언어가 포착하지 못하는 미세한 경험의 차이들을 모두 납작하게 만들어버리고, 익숙한 언어들로 이루어진 익숙한 사고의 모델에 갇히게 됩니다. 글을 쓰다보면 이런 것을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저는 늘 ‘말하려는 바’를 명확히 표현하려고 하다가 벽에 부딪히곤 합니다. 그러다보면 원래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니체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문제는 ‘말하려는 바’가 불분명하거나 그 ‘의미’를 표현해주는 언어를 포착하지 못하는 것이기 이전에 언어에 민감하지 못하다는 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기호라는 무기를 가지고 제 고유의 속도와 힘을 구성해내는 데에 실패했던 것이지요.

꼭 글쓰기의 문제에서만이 아니더라도, 자기 자신의 관점을 갖는다는 것,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언제나 언어를 의심하는 일을 동반하는 것 같습니다. ‘아름다움 그 자체’, ‘선 그 자체’, ‘물 그 자체’를 믿을 때 늘 주어진 관점, 전제, 도덕에 머물게 되는 것처럼, 순진하게 몇 가지 단어들이 세계를 충실히 재현한다고 믿을 때 우리는 언어가 만들어내는 규정성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세계를 이해하고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인식의 지평은 한없이 좁아지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니체의 계보학적 작업도 언어의 뉘앙스를 둘러싼 싸움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선과 악이라는 말이 그 자체로 지시하는 대상이나 본질 같은 것은 없으며, 그러한 단어의 배후에는 그것을 전유하는 특정한 힘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단어 자체의 뉘앙스를 다르게 느끼도록 하는 것. 니체를 읽을 때만큼은 감각을 총 동원하여 단어 하나하나의 뉘앙스에 민감해져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주에는 491페이지까지 읽고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제가 준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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