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소니 7월 30일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07-28 10:51
조회
126
“정치적 차원에서, 니체는 독일의 확연한 불운에 대한 예언자이자 전령이었다. 그는 그것을 처음으로 고발했다. 그는 1870년 이후 독일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폐쇄적이고 우쭐해하며 증오에 찬 어리석음을, 지금은 히틀러적 광기 속에서 스스로를 고갈시킨 그 어리석음을 혐오했다. 그 정도로 모든 사람이 치명적인 오류 속에서 타락해간 전례는 없으며, 그토록 잔혹하게 심연으로 인도된 적도 없다. ‘자기만족self-satisfaction’의 축제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니체는 행진 속에서 파멸해간 이 군중들로부터 거리를 뒀다. (…) 독일은 자신에게 아첨하지 않을 천재를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오직 니체의 해외에서의 명성만이 독일인들의 관심을 끌었을 뿐이다. 나는 한 사람과 그의 나라 사이의 철저한 무관심에 관해 이보다 더 좋은 예를 알지 못한다. 국가 전체가 15년 간 이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심각한 일이 아닌가? 독일이 재앙의 길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현명하고 열성적인 독일인이 제지할 길 없는 공포 속에서 그로부터 등을 돌렸다는 것에, 오늘날 독일의 몰락에 대한 증인으로서 우리는 경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조르주 바타유, 〈On Nietzsche: The Will to Chance〉 中)

위에 인용한 부분은 조르주 바타유가 니체에 관해 쓴 논문 중 일부를 번역한 것입니다. 여기서 바타유는 니체와 히틀러의 사상을 혼동하는 자들을 비웃으면서, 오히려 니체는 이후에 히틀러적 광기로까지 이어지게 될 19세기 후반의 독일적 어리석음에 대한 통렬한 비판자였으며, 그런 점에서 그가 “독일의 확연한 불운에 대한 예언자이자 전령”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에 대한 근거로 우리가 이번에 읽은 《이 사람을 보라》의 한 구절을 인용하기도 하는데요, 바로 니체가 “독일인에 대한 탁월한 경멸자로 간주되고 싶은 것은 심지어 내 야심의 하나”이며 “내 모든 본능에 역행하는 어떤 인간 유형을 생각해내면, 언제나 독일인이 등장한다”(《이 사람을 보라》, 452쪽)라고 말한 부분입니다. 이번에 읽은 부분, 특히 《바그너의 경우》에 대한 후기에서 니체의 독일적 어리석음에 대한 혐오와 반유대주의적 경향에 대한 경계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나치는 니체를 어떻게 도용할 수 있었던 것인지...!?

니체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독일인들의 선량함이었습니다. “독일인은 동등하게 대한다”(《이 사람을 보라》, 453쪽)는 것. 신앙과 학문성과 그리스도교적 사랑과 반유대주의와 독일제국과 하층민의 복음 등등의 대립되는 것을 가리지 않고 계속해서 삼켜버리는 위장의 중립성과 무사성selbstlosigkeit. 한 마디로 말해서 니체가 혐오했던 것은 자기 자신에게 한 가지 양식을 부여할 줄 모르는 비천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니체는 앞서 영양섭취, 장소와 풍토, 휴양의 선택이야말로 윤리의 문제라고 강조했는데, 독일인이 바로 그러한 의미의 윤리를 결여하고 있는 극단적인 예시였던 것이죠. 여기서 니체는 자신이 한 인간을 ‘철저히 검사’할 때 무엇을 먼저 보는지 이야기하는데요, “그가 거리감을 갖추고 있는지, 그가 어디서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위계와 단계와 서열을 보는지, 그가 구별하고 있는지라는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위계와 단계, 서열, 거리감. 이것이 니체가 이해하는 귀족성을 측정하는 척도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판단하지만, 그 판단은 언제나 너무나 수동적일뿐입니다. 단지 누군가 우리에게 이득을 주었다는 이유로 그를 선하다고 판단하거나, 해를 끼쳤다고 악하다고 규정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죠. 우리는 끊임없이 평가하지만, 우리 자신의 기준과 척도를 가지고, 상대의 고귀함과 비천함을 측정하는 일은 드문 것 같습니다. 단지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도덕적 척도를 들어대며 상대를 선/악으로 심판할 뿐이죠. 사실은 자기 기준을 갖지 못한 자, 스스로의 힘으로 ‘거리감’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자야말로 쉽사리 심판자와 재판관을 자임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어떻게 독일적 ‘어리석음’은 히틀러적 광기로 변한 것일까요? 니체가 비판한 독일인들의 선량함, 중립적 위장에 파시즘으로 변모할 잠재성이 갖추어져 있었던 걸까요? 저는 니체가 독일인들의 ‘자기 인식의 결여’를 비판함으로써 그러한 잠재성을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니체는 꾸준히 독일에 국가가 있을 뿐 문화는 없다거나, 현재 독일인들 중 철학자라고 불릴 수 있는 자는 한 명도 없다거나, 독일에는 심리학자가 없었다고 비판해왔습니다. 이 비판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바로 ‘자기 인식의 결여’입니다. “독일인은 자기 자신을 명료하게 보기를 원치 않는다”(《이 사람을 보라》, 451쪽)는 것. 우리가 만약 쉽사리 도덕의 포로가 되어버리는 우리의 의식과 싸우며 우리 안에 작동하고 있는 수많은 모순적 충동들과 일관되지 않은 욕망, 단순화할 수 없는 감각들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이해한다면, 다시 말해 우리가 자기 자신을 명료하게 보려고 시도한다면, 우리는 타자를 심판하고 배제하고 절멸시켜야 한다는 식의 논리에 빠질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모순성을 이해하고 감당하지 못하는 자가 광신도가 되고 파시스트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니체가 “독일의 확연한 불운에 대한 예언자이자 전령”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독일인들의 자기 인식의 극단적인 결여에 본능적으로 참을 수 없는 저항감을 느꼈고 그것을 표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주면 벌써 이번 책도 끝이 나는군요. 끝까지 읽고 오시면 되고, 간식은 민호입니다. 그리고 에세이를 무엇을 가지고 어떤 주제로 쓸 것인지 생각해오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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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7-29 20:05
    드디어 내일 책이 끝나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위에 인용해주신 바타유의 글에서 '폐쇄적이고 우쭐해하며 증오에 찬 어리석음'이라고 한 부분도 결국은 '자기 인식'의 문제와 관련이 되겠군요. 이번주 절탁 NY에서 읽었던 <아침놀>도 함께 떠오릅니다. 너는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나는 왜 하필 그것을 하고자 하는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자는 사자도 두렵지 않다고 했던 인디언 '베어하트'도 떠오릅니다. 계속 Go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