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카프카

8월 10일 일곱번 째 카프카 세미나 후기

작성자
보영
작성일
2017-08-11 23:43
조회
109

문학인지 편지인지 알쏭달쏭한 편지 묶음을 6주 동안 읽은 우리! 이번에는 편지인지 문학인지 알쏭달쏭한 카프카의 단편 작품 <선고>를 읽는 시간이었습니다. 분량이 짧다고 방심했건만… 읽어도 읽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카프카의 글이었지요.


자아


<선고>는 게오르크가 러시아에 살고 있는 자신의 친구를 떠올리며 편지를 쓰려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고향 친구이지만 고향을 떠나 사업을 벌이는 친구, 그리고 고향에 남아 살아가는 게오르크. 이 둘은 과연 어떤 사이일까요? 여러 측면에서 게오르크와 친구는 대응되는 점이 보이는 게 흥미롭습니다. 게오르크의 사업은 승승장구하는데 친구 사업은 미미한 이윤만을 내고, 게오르크는 아버지와 함께 사는데, 친구는 자립해서 살아갑니다. 게오르크는 약혼을 했고 사회 관계망을 형성하는데, 친구는 외국 교민 사회는 물론 고향 친구들과도 교류하지 않는 독신자 생활을 이어갑니다. 각자 재미있는 방식으로 둘의 관계를 해석했습니다. 저와 이응샘, 수경샘은 게오르크의 친구가 게오르크 내면(자아)의 일부라고 풀어보았습니다. 저는 이 둘이 서로 분리되어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공존하는데, 약혼이라는 사건을 계기로 이 둘이 만나 화합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여기에서 아버지와 충돌이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그 둘이 화합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죠. (혹은 애초에 둘이 분리되어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요) 자신의 삶에 끊임없이 침투하려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게오르크는 결국 방을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집을 나가버리는데, 그것이 선고를 통해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반면 수경샘은 이 두 자아가 서로 대립하고 투쟁하는 관계인데 아버지가 둘 중 한 명(러시아 아들)의 편을 드는 방식으로 내면의 투쟁에 개입한다고 보셨습니다. “물에 빠져 죽으라!“는 아버지의 무시무시한 선고를 듣고 그 선고를 수행하는 게오르크는 어쩐지 명랑하게까지 보이는데, 이는 글 쓰는 즐거움을 지속하려는 카프카의 출사표는 아니었을까요? 이응 샘은 나아가 카프카의 또 다른 단편 <변신>과 <선고>에 드러난 비슷한 구도에 주목하였습니다. 두 작품 모두 아버지와 아들이 등장하는데다가 <변신>에서 그레고르가 침대에 누워 보살핌을 받아야하는 입장이라면, <선고>에서는 아버지가 침대에 눕혀지는 등 겹치는 장면이 여럿 있기 때문이었어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변신과 선고. 이 둘은 서로 연관이 있지 않을까요?


선고와 죄


“나는 지금 너에게 빠져 죽을 것을 선고한다” 작품 속 아버지의 목소리를 통해 나오는 대사이자 작품 제목이기도 한 <선고>, 이 말에도 주목해보아야겠습니다. 과연 선고는 어떤 것일까요? 아버지가 ‘선고’라고 말하는 그 자체가 선고인걸까요? 혹은 난간을 뛰어넘어 물에 떨어지면서 “부모님, 전 항상 부모님을 사랑했습니다”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누가 그를 이해하겠냐만은) 말을 내뱉는 게오르크의 말이 선고인걸까요? 우리가 통념으로 받아들이는 선고의 의미가 카프카 작품 속 선고의 의미와 일치할까요? 선고가 있으려면 죄가 있어야하는데, 그렇다면 게오르크가 지은 죄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지니샘은 게오르크가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차지하려 했기에 ‘역모죄’를 저질렀고, 아버지를 자기 삶에서 제거할 수 있다 착각했다는 점에서 그에게 일명 ‘착각죄’가 있다고 보셨습니다. 그렇다면 죄를 판단하고 규정하는 주체는 누구일까요? 누가 보기에 게오르크가 선고받아 마땅한 죄인인걸까요?


낯설음


성연샘과 영우샘은 카프카가 놀라는 지점을 보고 놀라셨습니다. ‘뭐하냐’는 일상적인 질문과, ‘간식 먹고 있다’는 그에 대한 평범한 대답을 듣고 카프카는 그들이 ‘생을 영위해 나가는 확고함'에 놀랐다고 술회합니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조차 놀랍게 받아들이는 그런 카프카를 보고 우리 역시 놀라움을 느낍니다. 카프카에게는 통상적인 대화, 생활, 일상이 도대체 얼마나 낯설었던 걸까요? 카프카는 익숙해지기를 거부한 것일까요? 카프카의 작품을 보면 한 장면에서 형성된 관계가 다음 장면에서 뒤틀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한 장면에서 ’너한테는 그런 친구 없다‘고 외치던 아버지가 다음 장면에서 ’난 사실 그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라고 내뱉는 걸 보면 알 수 있지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인과관계를 다 무시하며 벌어지는 카프카 세계 속의 이야기. 익숙한 논리로는 결코 연결할 수 없는 상황들. ‘달리 살아야 한다'고 카프카가 끊임없이 강조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 관계에 고착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삶, 카프카는 이런 삶을 다른 삶이라 여겨 시도해 보았던걸까요?


가능성


“오래도록 아직 올바른 길은 나타나지 않고, 어쩌면 아예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우리는 완전한 불확실성에, 그러나 또한 이해할 수 없이 아름다운 다양성에 내맡겨져 있기 때문에, 희망의 성취라는 것은, 특히나 그러한 희망의 성취라는 것은 항상 뜻하지 않았던 기적, 그 대신 항상 가능한 기적인 것이야" 카프카의 이 말은 그의 작품을 해석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아닐까 합니다. 카프카의 작품은 읽어도 읽어도 낯설음을 자아냅니다. 그렇기에 그의 글은 때마다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글이고,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가능성, 그 자체야말로 카프카가 언급하듯 의미 있는 희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왜 저런 편지를 썼는지, 왜 이런 글을 썼는지 이 사람 도대체 왜 이러는지 아무리 카프카의 글을 읽어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다간 지 백 년도 더 지난 지금, 심지어 한국이라는 머나먼 곳에 사는 사람들이 모여 그가 언젠가 쓴 한 줄을 해석해보려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무슨 마음에서 이런 문장을 썼는지 이해해보려고 밤을 지새우고 네 시간 동안 세미나를 하고.. 각자가 해석한 하나의 가능성을 나누어보는 이런 모습이 아름답다고 여겨진다면 저는 이미 카프카의 마수에 빠져든 걸까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읽고 싶은 마성의 카프카! 다음 시간에는 <변신>을 읽고 만나기로 해요! 다음주에 (저와 이응샘은 다다음주에) 뵈어요!!

전체 4

  • 2017-08-12 14:32
    착각죄... 이 말 세미나 시간에는 그러려니 했는지 글자로 보니 진짜 웃기네요ㅋㅋㅋ 다음 시간 <변신> 읽기도 그렇고 작품 읽기에 돌입했을 때 어떤 해석들이 쏟아져나올지 기대됩니다아하하~ 여행 잘 다녀오시고 상상도 안 되는 카자흐스탄 특산물 꼭 가져오세요^^

  • 2017-08-14 01:10
    크 그러게요. 카프카는 짐작이나 했을까요? 백년이 지나 머나먼 한국에서 자신의 일기와 편지들을 이리 꼼꼼히 읽고 토론하고 있을 줄이야 ㅋ 한 줄기로 정리되지도, 해석되지도 않는 것이 카프카의 매력인가봐요ㅋ <선고> 한 작품만 가지고도 이리 저리 해석될 수 있는 불확실성이야말로 우리를 이 자리로 모으게 만든 힘인듯!ㅋ 여행 잘 다녀와요, 우리는 다다음주에 기쁜 이야기감을 들고 재회하기로 ^^

  • 2017-08-14 11:21
    지금쯤 카자흐스탄을 누비고 다닐, 우리 보영쌤의 일취월장! 더 많은 질문들 속으로 달려드는 우리가 '놀랍습니다' ^^

  • 2017-08-15 22:45
    카프카에 이어 샘의 후기에 또 한번 놀라며, 두 도반님의 양손 묵~직~함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