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들

영화들, 네 번째 후기

작성자
한역
작성일
2018-01-10 02:32
조회
221
혼자 머리 싸매고 읽을 때와, 같이 모여 얘기나눌 때가 다르게 읽히는 책. 『시네마』공부가 만만치 않습니다!
집에 돌아와 다시 천천히 읽어보니, 또 알듯 말듯 막혔던 부분들이 읽혀지는 듯합니다. 그러자면 또 다른 난관들이 보입니다.

좀체 딱 잡아떼기 어려운 철학자의 사유가 문장 단위로 꿈틀거립니다. 매주 새롭고 낯설게 읽혀지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때문인지,
외려 신기,방기한 책입니다. 들뢰즈가 "영화에 철학을 적용하려고 하지 않았고, 철학에서 영화로 바로 가려고"했던 것임을 한번 더 되내어봅니다.

지난 주에도 우리 모두는 토론..이라기보다, 들뢰즈가 대체 무슨 말들을 했는지 저마다 성실히(!) 추측해 보았습니다.^^
어김없이 종횡무진했던 그날, 후기를 서둘러 정리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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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장에서는 운동-이미지를 구성하는 미국/소련/프랑스/독일 유파의 편집 이론에 대해 공부했다면,
4장은 운동-이미지의 세 가지 양상(행동/지각/감화 이미지)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역시 만만치 않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 장에 이르러서 들뢰즈가 뭔가 하나씩 정리를 하고 있다는 인상이 느껴집니다.
관념론과 유물론의 비교에서 시작하여, 들뢰즈가 영향을 받았던 베르그송의 이미지 사유 방식을 현상학과 비교하며 전개하는 방식이 그러합니다. (건화)

들뢰즈가 영화에 대하여 새삼 힘주어 말하는 것 같은 부분이 보입니다. 예컨대 114p의 "영화는 세계를 통해서 비현실을 겨누는 다른 예술들과 혼동하지 않고 반대로 세계 자체를 한나의 비현실이나 이야기로 만든다"라는 문장, 115p의 "왜냐하면 바로 영화야말로 결착할 중심이나 지평의 중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 "라는 문장이 그랬습니다.

그 날 모두가 나눴던 논의들을 시간 순으로 정리하기보다, 해당되는 챕터에 맞춰서 다시 구성해보았습니다.



1. 이미지와 운동의 정체성 (112-120pp.)


들뢰즈는 이미지와 운동, 의식과 사물의 이원성을 극복하기 위한 출발을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에서 찾습니다.
관념론이란 "의식 안의 순수한 이미지들을 가지고 우주의 질서 재구성"합니다.
반면, 유물론은 "순수한 물질적 운동을 가지고 의식의 질서를 재구성"합니다.(113p.)

쉽게 이해하자면. 유물론에선 물질이 먼저 있고, 원자들이 운동하면서 의식은 사후적으로 발생함을 말하고,
관념론이란 이 세계를 구성하는 만물과 그에 수반하는 운동이 우리의 의식 내지는 관념에서 비롯한 것임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건화)

[베르그송]과 [후설] 역시 앞선 이원성을 자기 나름대로 극복하려 시도했던 사상가들입니다.
후설로 대표되는 '현상학적 이성'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의식은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다"
반면 베르그송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의식은 어떤 것이다" (113p.)

베르그송은 의식이 곧 물질이자, 이미지라고 할 수 있고, 의식조차 운동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대상과 주체를 따로 따로 나누면서 지각하는 주체의 특별함에 대해 말한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의식이라는 것의 독자성(외부 세계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특질)을 배제하고, 즉자적인 이미지를 강조한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이는 어쩌면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물질 자체에, 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것들이 이미 내재하고 있다는 인상을 전달하는 듯 보입니다. 아무쪼록 확실한 것은, '의식과 물질이 분리될 수 없으며 서로는 무관하지 않다는 맥락'에서 들뢰즈의 논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건화)

후설로 대표되는 현상학에 관하여 들뢰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현상학이 자신의 규준으로 삼은 것은 '자연적 지각'이라고 부르는 것과 그 지각의 조건들이다."(113p.)
"의식은 그 무엇에 대한 의식이다"(114p.)라는 현상학적 전제는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혹은 친숙하게?) 납득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연적 지각'이 아닐까요. 어떤 대상이 따로 있고, 관찰하거나 의식하는 사람이 이분화된 구도, 그러한 지각의 모델.

다만, 베르그송은 후설을 위시한 현상학적 지각을 부정했던 것임을 재차 확인해봅니다.

베르그송의 지각 모형은 대략 이렇습니다. "그에게 있어 이 모형은 오히려 끊임없이 변하는 물적 상태이며, 어떠한 결착이나 준거의 중심도 부여될 수 없는 '물질-유동성'이다. 이러한 물적 상태로부터 출발하여,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순간적이고 고정된 시점을 부과하는 중심들이 형성되는지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115p.) 여기서 '순간적이고 고정된 시점을 부과하는 중심들'이란 '불확정적 중심'일까요?

베르그송의 견지를 바탕으로 들뢰즈가 강조했던, '물질과 빛의 동일성'을 설명하는 것도 역시 어렵습니다.
우리의 과학적인 상식 속에서 지각이란 빛이 사물에 반사되어 시신경에 닿는 과정을 동반하기 마련입니다. (혜원)

그러나 들뢰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베르그송에 있어 그것은 정반대이다. 사물들은 그것들을 비추는 아무 것도 없이 그 자체로서 빛나는 것이다."(119-120pp.)  무엇을 의식하고자 함이 결국 무수한 '작용'과 '반작용'으로 이루어진다면, 사물 따로, 빛 따로, (또는 관찰자 따로, 관찰 대상 따로)가 없습니다.

지각이라는 것을, 고정된 사물을 바라보는 일관된 시선의 구도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닌,  서로가 서로에 대해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받는 무수한 섞임의 과정으로 파악한다면? 그러한 과정 속에서 물질이 먼저냐 의식(관념?)이 먼저냐의 문제조차 와해된다면? 들뢰즈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여전히 심오합니다.
"간단히 말해 빛이 되는 것이 의식인 것이 아니라 물질에 내재하는 의식인 것이 바로 빛인 것이다."(120p.)
"달리 말하자면 눈은 사물들 속에, 빛나는 이미지들 자체 속에 있다" (119p.)


또한 "만일 사진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사물들의 내부 자체 안에, 공간의 모든 지점에서 이미 포착되어 있으며 촬영되어 있다"(119p.)는 말도 오묘합니다.
사진을 '실제로 존재한다면?'이라는 가정으로  이끈 까닭은? ... 이에 대한 언급도 쉽게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은서)

들뢰즈는 '내재하는', '내재성'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 듯 합니다.
'이미 포착되어 있으며 촬영되어 있다'는 말도 어쩌면 잠재적인 양태로 이해될 수 있는 표현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

그리고, 들뢰즈가 대체 왜 그렇게 '영화'라는 매체에 관심을 보였는지, 분분한 추측들이 있었습니다. 씨앗이 될만한 문장을 가져와봅니다.

(1) "그러나 영화는 커다란 이점 또한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왜냐하면 바로 영화야말로 결착할 중심이나 지평의 중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영화가 만들어내는 단절들은 자연적 지각이 지나내려온 과정을 영화가 거슬러올라가는 것을 막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탈중심화된 물적 상태에서 중심화된 지각으로 이행하는 대신, 영화는 탈중심화된 물적 상태로까지 거슬러올라가 그 상태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2) 근접에 대해선 말할 것도 없이, 이는 현상학이 상기시키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이 될 것이다. 그의 영화에 대한 비판 속에서조차 베르그송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영화와 동일면 상에 있다." (115p.)

같은 페이지에 기재된 문장들이지만, 제가 (1)번이라고 표시한 부분에선 영화가 가진 이점, 영화만이 해낼 수 있는 어떤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번에선 영화의 그러한 속성이, 현상학보다는 베르그송의 사유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들뢰즈는 후설로 대표되는 현상학적 견해에 대해서 짐짓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현상학은 자연적 지각에 우위를 부여함으로써 운동을 여전히 (본질적이라기보다 단순히 실존적인) 포즈들과 연결시킨 것이다."(114p.) 물론 단순히 현상학이 대상과 주체의 구분만을 강조했다고 말하기엔 살짝 조심스럽습니다. 어떻게보면 현상학도 관념론과 유물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시도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럼에도 현상학적 입장에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여전히 전제해있는 것 같습니다. (건화)

"우리는 이제 이미지 = 운동인 세계의 노출에 직면하게 된다. 나타나는 것들의 집합을 이미지라 부르기로 하자."(115p.)는 말과 함께 들뢰즈의 사유는 점차 아득한 영역까지 뻗어나갑니다. 들뢰즈는 원자적인 차원에서 이미지론을 풀어냅니다. "하나의 원자란 그 작용과 반작용들이 이어지는 데에까지 나아가는 이미지이다. 나의 몸 역시 이미지이며, 그러므로 작용과 반작용들의 집합이다. 나의 눈과 나의 두뇌도 역시 이미지들이며 내 몸의 부분들이다."(116p.)

덧붙여,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에 대하여 작용한다든지 반응한다든지 한다고 말할 수가 없다. 완료된 것과 구별될 수 있는 동적인 것도 없으며, 수용된 것과 구분될 수 있는 움직여진 것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은, 즉 모든 이미지는 그것들의 작용이나 반작용과 혼동된다"(115p.)
이 말은, 계속되는 운동의 장에서 실행된 이미지와 완료된 이미지의 구분 또한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건화)

들뢰즈의 사유는 우리를 아주 미시적인 세계로 견인합니다.

"즉 내 몸은 끊임없이 재생이 이루어지는 분자와 원자들의 집합일 것이다. 원자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을까? 원자들은 세계들, 원자 간의 영향들과 구별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물질의 너무도 뜨거운 상태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단단한 실체들을 구별해낼 수 없다. 그것은 보편적 변주의 세계, 보편적 파장, 보편적 물결침의 세계이다. 거기에는 축도, 중심도, 좌우도, 상하도 없다 ..." (116p.)

생각해봅시다. 책상 위에 컵이 놓여져 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이 있는 구도.
그러나 아주 미세한 현미경으로 이러한 구도를 재편해본다면, 그저 원자적이고 분자적인 떨림들만 존재하지 않을까요.
컵이라는 사물과 그것을 관찰하는 사람의 눈은 당연하고, 그 사이의 허공에 존재하는 무수한 기체들, 공기를 구성하는 분자들까지도.
그 세계에선 누가 주체이고 대상인지가 분간이 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앞서 인용한 들뢰즈의 말은 대략 그러한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지은)

이해될듯 말듯한 마음을 뒤로하고, 1번 챕터는 여기서 마무리 짓겠습니다. ^^;;

2. 운동-이미지로부터 그 변주들로 (120-129pp.)

들뢰즈는 '생 이미지'라는 개념을 매우 중시했으며, 이것을 "운동-이미지의, 중심이 부재하는 우주 속에서 형성되는 '불확정적 중심들'이 될 것"(122p.)이라고 정의합니다. "생 이미지는 어쩔 수 없이 불확정적 중심이자 검은 화면"(122p.)이라는 말도 합니다. 동시에 "생 이미지 혹은 생물들을 정의하기에 충분한 조건이 될 것이다."(121p.)는 말을 합니다. 어쩌면 간단하게는, [생 이미지 = 생물]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건화)

방금 인용한 문장의 바로 앞에 베르그송의 논의가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베르그송에게 있어 틈, 간격은 여러 이미지의 유형들 가운데 매우 특별한 한 가지 유형, 즉 생 이미지 혹은 생물들을 정의하기에 충분한 조건이 될 것이다."(121p.)  여기서 틈이란, 간격이란 무엇일까요? 역시 어렵습니다만, 121p의 처음 부분에 이러한 언급이 있습니다. "쁠랑의 불특정한 점들에 작용과 반응 사이의 틈인 간격이 나타난다. 베르그송은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 운동들 및 단위로 쓰일 수 있는 운동들 사이의 간격들이 그가 요구하는 것이다." (120-121pp.)  말하자면, 간격내지 틈이란 '운동들 사이'에 존재하며, '작용과 반응 사이'에서 나타납니다. 이것은 어쩌면, 아직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곧 일어나게 될, 가정될 결과에 의해 윤곽이 지워질, 어떤 잠재태 같은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지은)

"단지 이런 면 위에서만 운동들의 단순한 간격이 생겨날 수 있다."(123p.) 여기서의 면은 '내재성의 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것을 운동들이 벌어지는 무대라고 이해해도 좋을까요? 들뢰즈에 의하면, '내재성의 면'조차 결국은 "모든 이미지들의 무한한 집합"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이미지들의 무한한 집합은 일종의 내재성의 면이 된다. 이 면 위에서 이미지는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이러한 이미지의 즉자성, 이것이 물질이다 : 이미지 뒤에 숨겨져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반대로 이미지와 운동의 절대적 동일성이다."(116-117pp.)

*아무쪼록 내재성의 차원과 떨어져 얘기할 수 없는게 의식이자 지각이고, 운동이라는 점만은 분명해보입니다. (건화)

이어서 들뢰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두뇌는 다름 아닌 작용과 반응 사이의 간격, 틈이다. 두뇌는 뭔가 시작될 수 있는 이미지들의 중심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다른 것들 가운데서 하나의 특별한 이미지를 구성하며,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중심 없는 우주 안에서의 불확정적 중심이다."(123p.) 다시 틈/간격이 등장합니다. 물질 = 운동 = 이미지라는 등식은 말로는 쉬워도, 이해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이 모든 것들의 틈/간격에서 벌어지는 '작용'과 '반작용'은, '불투명'하다거나 '반사된다'거나 하는 표현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운동-이미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될 것입니다. (예슬)

이 밖에도 "생명 이전의 수프 상태 속의 미세-간격들", "최초의 화면들과 상관적 관계를 지닌 내재성의 면의 냉각", "더욱 더 빠른 운동들 사이에서 좁은 간격들은 더욱 더 좁아진다"는 언급에 대해 함께 의견을 나눴으나, 역시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보영, 지은 등등)

그리고 124p. 이후에서야, '지각-이미지', '행동-이미지', '감화-이미지'에 대한 각각의 설명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모두 운동-이미지의 전신들이자 세 가지 양상/변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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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지각-이미지]입니다.  들뢰즈는 사물(A)과 사물에 대한 지각(B)을 구분합니다.
사물이 "즉자적 상태의 이미지"라면, 사물에 대한 지각은 "사물로부터 이해관계가 없는 것을 빼"는 "감산적 방법"입니다.

(A)

"그러나 역으로, 사물 자체는 즉자적으로 스스로를 지각으로서 나타내야 한다. 완전하고 즉각적이며 모호한 지각으로서 말이다. 사물은 이미지이고, 이런 점에서 스스로를 지각한다. 그리고 그것에 작용이 가해지고, 모든 면 위에서 그리고 모든 부분들 속에서 그 작용에 반응하는 만큼 사물은 다른 모든 사물들을 지각하는 것이다." (125p.)

(B)

"우리는 사물을 지각하면서 우리의 필요에 따라 관심을 적게 끄는 것은 적게 지각한다. 필요나 이해관계란 우리의 수용적 면에 의거해 사물로부터 포착하는 선과 점들, 그리고 우리에게 가능한 지연된 반응을 통해 우리가 선별하는 행동들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125p.)

편의상 A와 B로 나눠보았습니다. A가 객관적이고 총체적인 포착들이라면, B는 부분적이고 편파적이며 주관적인 포착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에선 '사물에 대한 지각'을 '사물들의 지각'과 혼용합니다. 다시 말해, "사물과 사물에 대한 지각"(124p.) "사물과 사물들의 지각"(124-125pp.)입니다.
(어감이 자칫 혼동하기 쉽다고 느껴집니다.)  "지금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관점"에서 이것은 A에서 B로 나아갑니다. (이러한 단일 중심의 주관적 지각이 고유한 의미에서 지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관점"이란 '사물에 대한 지각'이자, '사물들의 지각'인 것 같습니다.  그것이 "불확정적 중심"과 결부될 때, 지각-이미지가 된다고 합니다. (125p.)  영화는 "총체적이고 객관적이며 모호한 지각에 합류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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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운동-이미지는 지각-이미지에 그치지 않고, [행동-이미지]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운동-이미지들의 우주가 자기 안에 중심을 형성하는 특별한 이미지들 중 하나와 결부될 때 우주는 안쪽으로 휘어져 그 중심을 둘러싸면서 스스로를 조직한다." (125p.) 이는 "세계가 지각적 중심을 둘러싸고 휘어진다면, 그것은 이미 지각과 불가분한 행동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126p.)라는 설명으로 이어집니다.

'내적 만곡'에 의해 "이용 가능한 면들을 뻗어오는 사물들"로 인해, "행동이 된 나의 지연된 반응은 그것들을 이용할 줄 알게 된다"는 설명 ... 기하적인 상상을 동원한다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까요? 여기서 '행동'은 "운동을 하나의 항이나 가정된 결과의 윤곽이 될 '동작'들(동사)과 결부시킨다"고 합니다. (126-127pp.) 행동-이미지는 지각-이미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발현됩니다. "우리는 느끼지 못한 채 지각에서 행동으로 옮아간다."(126p.) 살짝 이해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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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간격은 두 면-경계, 즉 지각적인 면-경계와 행동적인 면-경계의 특화로만 정의되지는 않는다. 그 사이의 것이 있다. ... 그것은 불확정한 중심, 즉 어떤 점에서 혼란스런 지각과 주저스런 행위 사이에 있는 주체 안에서 떠오른다."(127p.)

여기서 등장하는 '그것', 즉 감화작용에 대한 설명은 [감화-이미지]로 나아갑니다. (방금 인용한 문장이 제게는 가장 이해가 될 듯 말 듯한 부분입니다.)  "감화작용은 운동을 체험된 상태로서의 어떤 '특질'과 결부시킨다(형용사)"는 말도 아리송 합니다. 그러나 편의상 주체를 인간으로 놓고 본다면, 사람의 감정을 드러내는 표정은 때론 그것만으로도 이미 체험된 상태를 예기할지도 모릅니다. 학생이 선생에게 매를 맞기 전에 울상인 표정, 그러한 표정이 나타내는 우울한 감정은 이미 '체험된 상태로서의 특질'과 결부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감정 자체는 이미 '영향이 미치는 바'를 내포한 무엇일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매우 편의적인 이해입니다. ^^)

여기서 불어의 affction은 감정과 영향을 미치다는 의미의 affecter의 의미를 모두 지닌다고 합니다. 특정 행위나 지각으로 아직 현실화 되지 않는 운동으로서 '정동'으로 이해해도 될 것 같습니다. 현실화되지 않은 차원에서의 정동은, 잠재적이지만 실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 어떤 것이자, "자신을 체험하거나 '안으로부터' 느끼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건화)

그럼에도 베르그송이 "민감한 신경에 대한 일종의 운동적 경향"으로 정의했다던 '감화 작용'은, 이것이 "'부동화된 수용판 위에 가해지는 운동 노력인 것"이라는 들뢰즈의 설명 앞에서 다시 모호해집니다. 여기서 '부동화된 수용판'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흡수하거나' 굴절시키기는 하지만 지각의 대상이나 주체의 동작으로 변형되지는 않는 외재적 운동들의 일부"(127p.)인 감화-이미지에 대한 이해가 유독 어렵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여기서 잠시, 운동-이미지의 세 가지 변용을 간략히 정리해보겠습니다.

운동-이미지
= 지각/행동/감화-이미지의 견고한 통합

[지각-이미지] :
A.사물 - 사물들과 혼동되는 총체적이고 객관적인 지각
B.사물에 대한 지각 - 단순한 생략이나 감산에 의해 사물과 구분되는 주관적 지각
// "우리를 사로잡은 관점"은 A에서 B로 나아가고 옮아가는 과정에 있으며, 영화는 이러한 경향성에 편승하되, '불확정적 중심'과 결부됨.
지각-이미지는 '실체들'과 결부.

[행동-이미지] : 우리에 대한 사물들의 잠재적 작용과 사물에 대한 우리의 가능한 행동이 비롯되는 우주의 휘어짐, 만곡 같은 것.
행동-이미지는 '동작(동사)들'과 결부.

[감화-이미지] : 혼란스런 지각과 주저스런 행위 사이에 있는 주체 안에서 떠오르는 감화작용에 의거함.
감화-이미지는 '형용사들'과 결부.

3. 반대의 증거 : 어떻게 세 가지 변주를 소멸시킬 것인가 (129-135pp.)


마치 빅뱅 이전의 세계라도 탐사하려는 듯이, 들뢰즈의 사유가 점점 더 비범해집니다.
들뢰즈의 비범한 사유는 베케트의 <필름>을 만나서 만개합니다.

"이 세 가지 유형의 이미지들의 구분선들을 거슬러올라가 그 모태 혹은 즉자적 상태의 운동-이미지를 탈중심화된 순수함 속에서, 그 변화의 맨 첫 상태 안에서, 그 열기와 빛 안에서 되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무런 불확정적 중심도 그것[그 모태... 운동-이미지]을 동요시키지 않을 때 말이다. 어떻게 우리를 우리로부터 해체하고 그 다음 우리 자신 역시 해체할 수 있을 것인가?" (p.129)

세 번째 챕터의 절반 정도는 사무엘 베케트의 작품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들뢰즈는 영화 속의 주요한 장면들을 중심으로 운동-이미지의 세 가지 변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책에 언급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참고 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O1_515X0xaY)

(1)

"인물 O가 뛰어나와 벽을 따라 수평으로 도주한다. 그리고 수직의 축을 따라 벽쪽에 붙은 채로 계단오르려고 한다. 그는 '움직인다' 그것은 행위의 지각이며 또는 [행동-이미지]로서..." / "여기서 45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의 각도 하에서 그를 잡는 카메라 OE..."

(2)

"O는 (주관적으로) 방, 사물들과 그 안의 짐승들을 지각하고, 반면에 OE는 (객관적으로) O 자신과 방, 그리고 그 내용물들을 지각한다."
- "그것은 지각의 지각, 또는 이중의 체계 하에서, 지시관계의 이중적인 체계 안에서 파악된 [지각-이미지]이다.
/ "인물은 실내로 들어가 더 이상 벽을 마주보지 않게 되므로 .. 카메라의 보호각은 90가 된다."

** (2)에서 (3)의 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설정이 추가됩니다.
"인물은 방 안의 모든 짐승들을 몰아내야 하고 거울이나 심지어 틀로 사용될 수 있는 모든 사물들을 덮음으로써 주관적인 지각이 사라지고 객관적인 지각인 OE만이 남도록 해야한다. 그리고 O는 요람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눈을감고 가만히 흔들거릴 수가 있다."

(3)

"그러면서 매번 주관적 지각을 조금씩 되찾으려 하는 인물을 깨우게 되며 그로 인해 카메라는 숨거나 웅크리면서 다시 뒤로 되돌아나오게 한다. 결국 O의 혼미상태를 틈타 OE는 그의 정면에 도달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는 점점 다가간다. ... 카메라 OE는 O의 분신이면서, 눈 한쪽이 가려진 얼굴이다. ... 유일한 차이점은 O의 괴로운 표정과 OE의 주의 깊은 표정, 한 쪽이 무력한 운동의 노력이고 다른 한 쪽은 감광면이라는 것이다."
/ "주관적 지각의 소거는 카메라에 대한 90도의 금제를 풀어준다. 매우 조심스럽게 카메라는 그 너머의 270도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영화에서 구현된 카메라는 O의 행적을 쫓습니다.  몇몇 장면은 마치 오브제와의 대화나 교감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시선은 때때로 남자가 되었다가, 남자를 뒤에서 지켜보는 무엇인가가 되었다가 합니다. 영상 안에서는 사물들의 확대된 눈 자체를 계속 제시합니다. 영상을 구성하는 지각의 주체는 O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신후)

영화에서는 주관적인 지각인 O와 더불어 객관적인 지각인 OE가 교차합니다. 그리고 점차 주관적인 지각에서 객관적인 지각으로, 마침내는 자아에 의한 자아의 지각('감화-이미지')을 넘어서면서, 운동-이미지의 세 가지 유형이 차례로 소거됩니다. "다른 모든 것을 해체시켜도 끝까지 남을 감화작용의 지각의 영역"인 "감화-이미지"에 봉착한 영화는,  (O와 OE로 설정되는) 이중의 얼굴이 무(無)화되면서 "죽음, 고정성, 암흑"에 도달합니다.  영화는 "빛나는 내재성의 면 쪽으로, 물질 및 물질이 발생시키는 운동-이미지의 우주적 물결 쪽으로 거슬러올라"갑니다. 들뢰즈가 이를 "인류 이전의, 새벽 이전의 세계"라고 표현한 바가 무척이나 심오합니다. (131p.)

이후에 들뢰즈는 퍼스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로부터 비롯한 논의를 할 것임을 예고합니다.
여기서 그는 좀 더 구체적인 영화적 사례들을 중심으로 지각/행동/감화-이미지를 설명합니다.

영화들을 한 번쯤 봤었다면 좀 더 이해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간략히나마 정리해보겠습니다.


[지각-이미지]
: 루비치 <내가 죽인 사나이> 중, "등을 돌리고 있는 군중이 있고, 키 중간의 높이에서 보면 불구자의 다리 한 쪽에 해당하는 틈이 있다. 이 틈을 통해서 또 다른 앉은뱅이 불구자가 지나가는 행렬을 구경한다."

[행동-이미지] : 프리츠 랑 <도박꾼 마부제 박사> 중, "기차 안에서의 살인을 위해 맞추어진 시계들, 도둑맞은 문서를 실어가버린 자동차, 마부제에게 신호를 알리는 전화 등과 함께 공간과 시간 속에서 조직되고 분할된 행동"

**지각/행동-이미지가 동반된 경우 : 서부극의 경우, "주인공은 맨 먼저 보기 떄문에 비로소 움직이며, 그가 이기게 되는 것은 행동의 간격이나 간발의 지연이 그로 하여금 모든 것을 보게 해주기 떄문이다."(앤소니 만의 <윈체스터 73>)

[감화-이미지] : 칼 드레이어 <잔다르크의 열정> 중, "잔다르크가 보여주는 얼굴 및 일반적인 얼굴에 대한 대부분의 근접화면"

들뢰즈에 따르면 하나의 영화 작품은 이 같은 운동-이미지의 유형에서  한 가지의 우세한 편집을 따른다고 합니다.
그리피스가 행동적인 편집을, 드레이어가 감화적인 편집을, 베르토프가 지각적인 편집을 중심으로 했다는 것이 근거입니다.

[전체화면]은 지각-이미지에, [중경화면]은 행동-이미지에, [근접화면]은 감화-이미지에 대응됩니다.
에이젠슈타인의 지적을 반영하여, 들뢰즈는 "운동-이미지들 각각은 영화 전체에 대한 편집, 전체를 파악하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133-135pp.)

**135p에서 번역에 오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전체화면에서는 '감화적'이 아니라 '지각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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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들뢰즈가 말하는 영화의 특별함을 생각해봅니다. 영화의 발명은 지각의 주체가 육안에서 카메라로 옮겨간다는 점을 확인시켜줍니다.  지각의 중심은 사람에서 기계로, 동시에 불확정적인 중심이 반영됩니다. 하나의 고정된 중심이 없는 시선을 보여주는데, 영화가 가장 적합한 매체임을 상기해봅니다. (지은)

이해관계에 따른 생략이나 감산이 이뤄지지 않는 카메라의 순수한 지각. 중심이 불확정적으로 되면서, 지각의 주체 역시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영화는 이러한 인간주의적인 방식으로부터 시점을 해방시킬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화는 카메라의 눈으로 세계를 지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건화, 첫 시간 후기) 들뢰즈가 파악했던 카메라가 지닌 '비인간주의'란, 그 일반적인 어감과는 달리 오히려 긍정해야할 관점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우리를 우리로부터 해체하고 그 다음 우리 자신 역시 해체할 수 있을것인가?"와 더불어,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적어도 하나의 지각, 가장 끔찍한 일인 자아에 대한 자아의 지각이 계속되리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지각하는 일과 지각되는 일의 행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125p.)라고 말했던 부분이 부처님 말씀 같기도하고, 여하튼 재밌습니다. (건화, 혜원 등등)




이후에는 장장 3시간이 넘어가는 D.W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을 다 같이 봤습니다. 영화가 중반을 넘기는 동안 거장의 작품 앞에 고개 숙이며 간간히 존경(?)을 표하다가, 마지막을 장식한 전투 장면에서 한창 몰입하며 봤습니다.  <반지의 제왕>의 헬름 협곡 전투씬을 방불케하는 KKK단과 흑인 병사들의 대결은 살짝 어처구니 없어도 재밌었습니다. ^^ 아쉽게도 시간이 다하여 영화에 대한 감상은 다음 주로 미루게 되었답니다.

나눠본 이야기들을 일일이 정리하다보니, 그래도 서로 간에 나름대로 생각하고 고민한 흔적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요약하려면 덜어내야하는데, 중요하게 느껴진 논의나 책 속의 구절들이 무척 신경쓰여서.. 되도록이면 자세하게 정리해보았습니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좀 더 간결하게 써보겠습니다. 회고는 여기까지. 이상, 4주차 후기 마치겠습니다!
전체 3

  • 2018-01-10 09:39
    우와... 한역샘 넘나 성실한 후기네요(감동ㅠㅠ). 정리해주신 토론 내용을 다시 보니 참 많은 이야기를 했다는 생각과 함께 들뢰즈의 말을 해석해내기보다는 그 말들 주위를 빙빙 돈 것 같다는 느낌도 드네요...ㅎㅎ; 더 꼼꼼히 읽어야겠습니다ㅠㅠ! 알찬 후기 감사합니다~~

  • 2018-01-10 10:11
    헉 넘나 꼼꼼한 후기인 것!! 그날의 세미나가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ㅎㅎㅎ

  • 2018-01-10 11:18
    오 135페이지 읽어보니 "감화적" 단어가 반복이 되네요... 역시 꼼꼼하게 읽으시는 한역샘!
    영화 <필름>은 지금 생각해보니 주관적 지각과 객관적 지각의 술래잡기 같은 느낌도 드네요 ㅎㅎ 주인공이 짐승들의 눈이나 거울들을 덮어버림으로써 주관적 시각을 하나하나 소멸시켜 가는데, 그때 마지막 남는 객관적 지각인 카메라가 재빨리 주인공의 정면을 파고들어가 주인공의 분신이 되어, 주인공 자신이 죽지 않는 이상 끝까지 가지고 있을 자신의 눈-지각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죽는다는 것은 이대로 지각이 꺼져버리는 것인가? 들뢰즈는 마지막 자아의 지각마저 사라져 버린 이 '죽음'이 "새벽 이전의 세계로의 재합류"라고 표현하는 듯 합니다. @@ 여기서 정말 한역샘이 말씀하신대로 종교적 색채가 물씬 ㅋㅋㅋ "행동-이미지, 지각-이미지, 감화-이미지의 소멸을 진행시키면서 베케트는 빛나는 내재성의 면 쪽으로, 물질 및 물질이 발생시키는 운동-이미지의 우주적 물결 쪽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들뢰즈가 이미지의 무한집합이 일종의 내재성의 면이 된다고 했는데, 모든 이미지의 소멸 즉 '죽음'은 완전히 세계로부터 사라진다는 뜻 보다는 이 이미지의 전체(?)집합 속으로 합류한다는 뜻 같아보이기도 해요. 우리는 죽어서 흙이 되어 우주와 합류하는것처럼.... 하하하........ 써놓고도 민망하네요.
    암튼 넘 잘읽었습니다 한역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