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들

영화, 들 아홉 번째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8-02-22 15:42
조회
138
늦은 후기 죄송합니다. 미루기에는 끝이 없네요. 벌써 내일이 세미나라니;

지난 시간에는 《시네마 Ⅰ》의 8장 〈충동-이미지〉를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기억을 조금 더듬어 보자면, 들뢰즈는 4장 〈운동-이미지와 그 세 가지 양상〉에서 베르그송을 인용하며 ‘이미지의 즉자성’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미지란 실재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실재적인 것이라는 거죠. 이미지와 운동, 그리고 물질 사이에는 어떤 구분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고정된 세계(현실)와 그것을 재현하는 이미지(가상)로 이루어진 이분화된 세계가 아니라, 닻을 내릴 “현실”을 부여받지 않은 이미지들의 무한한 상호작용으로서의 세계(=“보편적 변주의 세계, 보편적 파장, 보편적 물결침의 세계”).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보편적 변주의 세계 속에서 중심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걸까요? 우리는 일정한 중력의 작용 속에서 유기체로서의 우리 자신의 동일성을 확인하며 살아갑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러한 ‘불확정적 중심’을 형성하게끔 하는 것은 운동(=이미지)바깥에서 그것을 규정하는 초월적인 무엇이 아니라, “운동들 및 단위로 쓰일 수 있는 운동들 사이의 간격들”입니다. ‘나’라는 형상이나, 나의 유기성을 이루는 질서가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어서 운동들이 그에 따라 배열되는 것이 아니라, 목적 없는 운동들이 일정하게 틈과 간격을 만들어낼 때 매번 ‘중심’과 ‘동일성’이 생산되는 것이죠.

이에 따라 이미지의 두 가지 지시체계가 존재하게 됩니다. “중심없이 상호작용하고 절대적으로 변화”(《들뢰즈의 씨네마톨로지》)하는 ‘물질-운동-이미지’의 ‘절대적 체계’와 “중심을 잡고 필요에 따라 다른 이미지들의 부분만을 수용”하는 ‘두뇌-육체-이미지’의 상대적 체계. 사실 이 두 체계의 구분은 오로지 편의를 위한 구분일 뿐입니다. 이미지의 상대적 체계는 사실 절대적 체계 안에 있고, 절대적 체계는 매번 상대적 체계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겠죠. 영화는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지시체계의 동일성을 폭로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에는 카메라라는 중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카메라는 매번 스스로의 중심을 이동하고 변이시키면서 “결착할 중심이나 지평의 중심”을 해체하고, 단절들을 만들어냄으로써 ‘탈중심화된 물적상태’를 열어내죠.

들뢰즈가 난해한 설명들을 이어가고 있는 지각-이미지, 감화-이미지, 충동-이미지 등은 이미지들이 상대적 체계 내에서 변주되는 양상들입니다. 사물 자체이기도 한 무한하고 총체적인 지각은 생략과 감산의 과정을 거쳐 불확정적 중심과 결부될 때 지각-이미지가 됩니다. 감화란 “즉시 반사할 수 없거나 처리할 수 없는 일정한 힘이 간극을 점유하고 있을 때”(《들뢰즈의 씨네마톨로지》) 육체가 그 자신의 진동과 감응을 내부에서 느끼는 단계를 가리킵니다. 감화-이미지는 “지각할 수 없는 혼란과 행동할 수 없는 망설임 사이에서, 즉 포착과 반응의 실패 또는 좌절 한가운데서” 떠오릅니다. 들뢰즈는 행동-이미지로 나아가기 전에 충동-이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충동-이미지는 감화-이미지와 행동-이미지 사이의 변용인 것 같습니다.

“특질과 힘을 물적 상태 속에서, 역사적으로 한정할 수 있는 환경 안에서 현실화된 것으로 파악할 때, 우리는 행동-이미지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행동-이미지의 리얼리즘은 감화-이미지의 관념성에 대립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 사이에, 즉 일차성과 이차성 사이에는 ‘변질된’ 감화 혹은 ‘배아적’ 행동이라 할 수 있을 그 무엇이 존재한다. 그것은 더 이상 감화-이미지는 우리가 보았듯이 ‘불특정한 공간’ / ‘감화’라는 쌍에서 발전한 것이다. 행동-이미지는 ‘한정된 환경’ / ‘행동방식’이라는 쌍에서 발전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낯선 쌍과 만나게 된다: ‘근원적 세계’ / ‘원초적 충동’의 쌍이 그것이다.”(질 들뢰즈, 《시네마 Ⅰ: 운동-이미지》, 시각과 언어, p.232)

인용해놓고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요ㅠㅠ. 들뢰즈는 지각-이미지, 감화-이미지, 충동-이미지를 설명하면서 온갖 영화, 철학, 예술을 동원합니다. 그래서 읽다보면 이게 도대체 무엇에 대한 설명인지 헷갈리게 되는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다들 같은 심정일거라고 믿습니다). 특히 이번 8장에서는 혼란이 더욱 격심해져서 채운샘께 살짝 조언을 구해보았습니다. 채운샘께서는 들뢰즈가 하고 있는 이미지의 분류작업(?)이 운동으로서의 이미지가 영화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어떻게 영화가 운동을, 다시 말해 지각과 감화와 행위와 충동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이라고요. 들뢰즈가 언급하는 ‘위대한 자연주의의 거장’ 중 슈트로하임은 ‘퇴락’을 통해 부뉴엘은 ‘반복’을 통해 ‘근원적 세계’와 ‘원초적 충동’을 실재적으로 구성해내고 있는 것이겠죠. 들뢰즈가 언급하는 영화들을 그때그때 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부뉴엘이 어떻게 충동-이미지를 구성하고 있는지는 내일 확인해볼 수 있겠네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전체 2

  • 2018-02-22 19:28
    들뢰즈도 어렵다고 말한 '충동-이미지'였기에, 저도 부지런히 질문을 준비해야겠네요. 4장이 벌써 까마득하군요. 덕분에 복습하고 갑니다. ^^

  • 2018-02-27 13:09
    그래도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덕분에 충동-이미지가 무언지 아주아주아주아주 조금이나마 감을 잡게 된것 같아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