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들

영화 들, 열한번째 후기

작성자
한역
작성일
2018-03-06 11:47
조회
164
이번에는 들뢰즈가 언급한 영화들을 나름대로 분석해보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영화를 어떻게 소화할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반응으로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들뢰즈의 직접적인 언급을 토대로 영화를 가능한(!) 성실하게 재구성해보는 것. 다른 하나는 들뢰즈에 너무 의존(?)하지 않고, 조금은 독자적인 설명을 시도해 보는 것. 의도했던, 의도치 않았던 간에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본격적인 후기를 아래 남겨봅니다.

+ 작성자가 수업에 늦었던 탓에, 앞선 분들의 발표에 대해서는 각자 써오신 글을 중심으로 후기를 남겨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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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포드, <역마차>


건화는 모뉴먼트 밸리의 기이한 존재감을 서두로 <역마차>를 리뷰했습니다. 먼저 마차의 내부와 외부를 둘러싼 이중의 체계가 있습니다.  이는 각각 내부의 승객들을 둘러싼 대결과 사랑 등의 사건과, 그러한 사건들을 감싸고 있는 바위산 및 하늘 같은 자연환경의 이미지로 설명됩니다. 주인공인 링고 키드를 중심으로한 행동 이미지는 마치 운명을 개척하려는 듯, 자신의 주어진 환경을 바꿔나가는 구조(SAS')를 보입니다. 이는 변함없는 지평선으로 자리를 지키는 모뉴먼트 벨리의 풍경과 겹쳐지면서 '우주적으로 확장된' 행동 이미지의 구조(SAS)를 구성합니다. 들뢰즈는 포드의 <역마차>를 행동-이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모뉴먼트 밸리가 간직한 "대지의 항구적 현전과 하늘의 내재성"(p.272)은 영화 속을 장식한 대립항들(백인/아파치, 문명/야만, 사회/개인 등)을 무화시킵니다. 주인공들의 목적이 '로즈버그'라는 특정한 장소로 수렴되면서, 여정은 시작합니다. 그러나 주인공들은 목적지에 다가가려 할 수록 예상치 못한 습격, 불모의 경유지들과 당도합니다. 그렇다고 <역마차>는 이를 무력하게 보여주지 않고, 임시적인 상황의 연속을 활기찬 호흡으로 구성해나갑니다.

은서도 멜로리 부인과 링고 키드라는 인물의 특정한 사건을 중심으로 행동-이미지의 구조(SAS')를 분석했습니다. 글의 마지막에  "Vision without action is empty dream. But vision with action can change the world."라고 인용한 문장이 재밌습니다. 인물들을 매번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만들고, 일정한 변화와 추동을 이끌어내는 것은 어떤 목표나 목적 같은 것입니다. VIsion을 이상이나 환상이라는 단어로 대체할 수 있다면, 들뢰즈가 말하는 '꿈'이나 '국가'라는 말과는 어떤 관계가 성립될까요.

"그러므로 미국의 꿈이 그저 꿈일 뿐이라는 것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 그것이 스스로 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며, 자신의 권력을 얻는 곳도 꿈인 것이다. 포드에게나 비더에게나 사회는 변하고 또 변하기를 멈추지 않는데, 이 변화들은 포괄자의 안에서 형성되는 것들로서, 포괄자는 그 변화들을 감싸고 국가의 연속성이라는 건강한 환상으로 축복한다."(p.275)

들뢰즈의 말대로 문명-국가의 탄생에 대한 영화가 그리피스 이래로 할리우드에서 계속 발명되었다면, <역마차>도 '미국의 꿈'을 재발견하고 재구축하는 과정을 그려낸 영화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루이스 부뉴엘,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들뢰즈는 '충동-이미지'를 설명하면서 부뉴엘의 영화 세계를 조명합니다. 저는 충동-이미지의 핵심을 감화-이미지와 행동-이미지를 매개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서술해보았습니다. 특히, 행동에 미치지 못한 무수한 실패의 사건들을 토대로, 영화에서 어떻게 좌절이 형상화되고 있는지 분석해보았습니다.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에서 인물들의 만찬은 종종 우발적이고도 엉뚱한 사건의 개입으로 성사되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군인들을 비롯한 삼자의 느닷없는 출현 때문인 듯 보이다가, 나중에는 일련의 꿈 시퀸스를 통해서 실패의 원인이 강조됩니다.  주목해야할 것은 꿈이라는 자각에 이르는 편집의 효과입니다. 부뉴엘의 영화에서 꿈과 현실의 경계는 모호합니다. 죽은 이들이 산 자와 대면하는 장면에서도 현실과 환상을 구별하는 경계는 뚜렷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사실적이고도 초현실적인 인상이 뒤섞이면서, 진짜와 가짜의 구분도 효력을 잃게됩니다. 다만 그것이 '꿈'이었다는 사실로 본 영화가 행동-이미지에 도달하지 못한 순간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충동은 심지어 각자로 하여금 자신의 몫을 선택하고 자신의 순간을 기다리며 자신의 동작을 지연시키게 하는, 그리고 각자가 자신의 행동을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게 하는 악마적 지성마저 가지고 있다.” (pp.233-234)

여기서 충동-이미지를 관통하는 특징은 '지연'입니다. 본 영화에서 지연의 과정은 미뤄지는 만찬을 비롯하여 영화 전반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영화에는 행동-이미지에 도달하지 못한 많은 힘들이 잠재해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감화-이미지로 보았습니다. 여기서 들뢰즈가 말했던 감화-이미지는 얼굴에 나타난 정서적인 측면을 포함하여, 근본적으로는 사물에 내재한 “어떤 잠재성” 내지 “불특정한 공간에 노출된 특질-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p.209)

보영은 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클로즈업에 주목했습니다. 인물의 얼굴을 비롯해 식탁에 놓일 음식, 가족 사진 등에 적용된 클로즈업은 일정한 특질-힘을 장전하고 있습니다.  클로즈업이 인물의 표정이나 이어지는 행동의 징조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본 영화의 몇몇 장면들과 감화-이미지와의 관계를 의식하게 됩니다. 여기에 꿈이라는 장치의 개입으로 불특정한 공간이 구성되면서, 충동-이미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논리적인 인과 관계가 허물어지면서 꿈과 현실의 경계도 쉽게 구획할 수 없게 됩니다.  저도 충동-이미지가 행동-이미지와 감화-이미지를 매개한다는 설명 아래, 충동-이미지가 본격적인 행동에 이르지 못한다는 설명은 수긍가도, 그것이 감화적인 것과는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를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지은의 경우에는 영화의 초현실주의적인 표현법과 더불어 부르주아의 위선을 폭로하려는 감독의 의도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주인공들의 위엄은 터무니없는 초현실의 상황에서 무너지며, 만찬에서 강조되는 품위와 계급적 자의식은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영화 내내 중요한 테마로 변주되는 '죽음'이라는 주제도 중요해보입니다. 처음에 부르주아들이 찾아간 식당에서 벌어진 식당 주인의 죽음. 군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나오는 망자와의 조우. 결국 죽음의 그림자는 주인공들을 한꺼번에 엄습하고야 맙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갑작스런 갱단의 침입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부르주아들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꿈으로 처리됨으로서, 우스꽝스럽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부르주아들은 식욕과 성욕에 갇혀있으며 그들의 짐승과도 같은 욕망들은 충동-이미지의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들뢰즈가 본 영화를 두고서 말했던 '닫힌 반복'과 '나쁜 반복'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p.246) 만찬이라는 사건은 특정한 인습과 양식에 따라서 진행되며, 들뢰즈는 이를 '군대'나 '외교관 사회'처럼 닫혀진 환경에 대한 타락의 작업을 추구해나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특히 "그 경계들을 무너뜨려 그것들을 세계를 향해 열어주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던 '좋은 반복'과는 달리, '나쁜 반복'이라는 말로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과 <멸망의 천사>를 평한 것이 흥미롭습니다. 참고로 <멸망의 천사에서의 나쁜 반복은 "초대된 사람들을 넘어설 수 없는 경계로 둘러싸인 하나의 실내에 잡아두는" 법칙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pp.246-247)

건화는 이 영화에는 부르주아 자체에 대한 습관적인 인식을 벗어나려는 의도가 있으며, 풍자의 수단에 꿈이 설정된 것이 흥미롭다고 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부르주아라는 계급에 적용되는 '착취'의 부정성보다도, 주인공들의 전반적인 생활을 구성하는 표상들 자체를 보여주면서, 앞선 집단에 대한 독특한 사유를 가능하게 해주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논의를 했던 것 같습니다. 부뉴엘의 영화에 대한 학우들의 남다른 관심을 확인했던 시간이었습니다.

프리츠 랑, <메트로폴리스>


발표자들의 SF에 대한 애정어린 고백(?)과 함께 논의가 진행되었습니다. 부끄러움도 마다하고 하나씩 말해주신 감상을 정리해봅니다.

혜원은 <메트로폴리스>에서 눈에 띠었던 것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 자체보다도, 도시의 근간을 이루는 거대한 기계였음을 말합니다. 기계는 노동자들의 저항과 분노의 표적이 되지만, 역설적으로 이들이 거주하는 도시의 근간은 끊임없는 기계들의 운동에 달려있습니다. 영화에서 기계의 존재감은 빛으로 표현됩니다. 권력자 프레더슨의 관심을 끌었던 것도, 노동자들이 노동으로 만들어낸 것도, 전구 다발의 불빛입니다. 기계의 힘과 영향을 영화에서는 강렬한 조명 효과로 보여줍니다. 빛의 존재는 그것이 미치지 못한 영역, 어둠을 동반합니다. 독일 표현주의 사조를 대표하는 영화인 <메트로폴리스>에서는 명암의 대비가 도드라져 보입니다. 빛과 어둠의 명확한 경계가 언제나 양면을 간직하고 있듯이, 영화 속에서 기계에 대한 멸시와 의존은 동시적이면서 구조적인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지상과 지하, 자본가와 노동자를 비롯한 대립항들의 충돌은 모두 기계를 매개하고 있습니다. 권력자가 노동자들의 불만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로봇을 만든 것이며, 분노한 노동자들이 향하는 곳도 기계실입니다. 머리와 손 사이의 심장, 갈등의 중재자이자 관계의 가교가 되는 소재가 기계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예슬은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를 지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와 비교하였습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두 편의 영화는 각각 1927년과 1929년에 개봉되어 시기적으로도 가깝습니다. 기계라는 소재를 다루는 둘의 관점은 미묘한 차이를 보입니다. 랑의 작품에서 기계는 첨단의 발전과 인간의 편의에 기여하는, 흔히 생각하는 기계의 이미지에 충실한 것처럼 보입니다. 반면 베르토프의 작품에서 기계(카메라)는 마치 사람처럼 스스로 활력을 보이고, 사람처럼 진취적인 힘을 표현합니다. <메트로폴리스>에서 기계는 인간의 목적을 대신하고 욕구의 대상이 되는 수동적인 인상을 주지만, <카메라를 든 사나이>에서 기계는 그 자체로 능동적이며 완결적입니다.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 대한 관점에서도 한쪽은 부정적인 힘을 강조하고, 다른 한쪽은 긍정적인 힘을 보여줍니다. 예슬은 두 편의 영화 모두 심미적으로 뛰어난 점이 있지만, 마음은 <메트로폴리스>에 좀 더 이끌렸다고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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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을 추구하느냐, 모험을 추구하느냐에 따라서 글의 개성도 달라졌습니다..만, 우리는 자신이 썼던 글의 한계를 못내 의식하기도 했습니다. (^^)
그럼에도 서로 간에 주고받은 이색적인 감상들이 흥미롭습니다. 영화를 낯선 방식으로 보고자 함은, 점점 더 낯선 질문과 마주치게 됩니다.
어떻게든 <시네마>를 읽어보려는 자세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분주하게 보고, 치밀하게 읽고, 주눅들지 않고 써보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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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07 16:56
    부뉴엘의 영화는 정말 토론시간이 엄청나게 길었죠 ~ 이번에 상영하게 될 <위대한 환상>도 기대가 됩니다! 이번주도 한역샘의 고뇌와 퐈이팅 넘치는 에너지 기대할게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