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들

영화, 들 열두번 째 후기

작성자
보영
작성일
2018-03-16 23:43
조회
149
책상 위에 그릇이 있습니다. 저 쪽에 앉은 이가 보는 그릇과 이쪽에 앉은 이가 보는 그릇은 다른 모양일겁니다. 그렇다면 그 둘중에 어떤 게 그릇일까요? 만약 둘 다라면 그릇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외부에 세계가 있고 그 안에 놓인 대상을 내가 나의 감각으로 지각한다는 식으로 세상을 구분해서 인식하는 것, 익숙한 이 인식 구조에 들뢰즈는 반대합니다. 그는 세상이 그렇게 이루어져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영화가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들뢰즈는 세상이 어떤 곳이라 보고 있는걸까요.

 

# 세계는 운동 자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을 짚고 넘어가자면, 들뢰즈는 세계를 운동 그 자체라고 보았습니다. 물질은 생성 변화하는 것이고 멈추어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감각 기관의 한계때문에 멈춰있는 듯이 보일 뿐입니다. 바로 이 때 생성 변화가 곧 운동 movement이고 이는 행동action과는 다르다고 합니다. 세계는 끊임없이 물질 간 영향을 주고 받는 일, 작용과 그 작용에 대한 반응(반작용), 능동과 수동으로 채워지고, 그런 운동이 계속 복합적으로 이루어지는 세계가 물질세계입니다. 우리가 믿는 상식은 A라는 Body (결합되어있는 단위, 외부에 작용하고 반작용하는 틀)가 A'라는 주관을 가지고 물질세계를 본다. B는 B'로, C는 C'로… 무수히 많은 서로 다른 바디가 서로 다른 주관으로 물질 세계를 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베르그손은 그런식으로 물질세계가 A, B, C의 바디 밖에 별개로 존재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베르그손은 세계와 나를 분리하지 않고, 내가 보는 절단된 부분이 세계라고 말합니다. A에게 세계는 A가 작용, 반작용하며 관계 맺는 방식으로 절단된 단면이고, B에게는 B가 작용하고 관계맺으며 절단한 만큼이 세계인 셈이죠. 그래서 세계는 모두에게 다릅니다. 그리고 같은 사람이라 해도 그 날 그 날 절단하는 방식이 다르고 그렇기에 매일 다른 세계를 살아가죠. 이처럼 각자에게 각자의 세계가 있고, 마치 패치워크같이 이런 세계가 계속 맞물려가고 끊임없이 또 그 패치워크들끼리도 작용, 반작용하며 문양을 바꿔간다고 베르그손은 말합니다. 그는 주관과 객관이 결합되어 있는 상태이자 운동-이미지 자체, 실재real, 생성변화 자체가 세계라고 보았습니다.

# 초점을 골라라

보는 일은 초점을 하나에만 집중하는 일입니다. 모두 다 보려고 하면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죠. 나머지를 버리고, 초점을 맞출 부분을 선택해야 비로소 눈에 들어옵니다. 세계는 끊임없이 운동하고 작용 반작용하며 변주하는데, 그 안에서 특정한 신체(초점)를 가지고 작용 반작용에 참여하고 영향을 주고받는게 우리, 혹은 물thing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는 바로 이 우리의 초점에 갇혀있어 세계를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대로 지각하지 못합니다. 지각의 점이 있으므로, 우리 지각의 한계가 있으므로, 지각하는 점을 고르느라 나머지를 놓았기 때문에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 각자가 초점을 맞추어 절단해낸 세계는 어떤 운동-이미지로 변주되고 있을까요?

* 지각-이미지: 지각한다는 것은 세계를 절단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세계의 운동을 모두 지각 하지 않고, 모든 것에 한 번에 다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한 부분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그 기준은? 내 관심사죠. 머리 하러 갈 때가 되면 사람들 머리만 보이고, 신발을 새로 사려고 하면 지나다니는 사람들 신발만 보이는…그런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채운샘은 초점을 맞추며 자기 세계를 절단하는 일이 지각입니다. 지각되는것과 지각하는 것의 만남, 운동이 곧 영화의 프레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영화 자체가 하나의 패치워크, 그것도 매번 문양과 방향을 바꾸는 패치워크 같은 것입니다.

*  행동-이미지 : 그렇게 절단해내고 지각한 세계 속의 내 반응이 행동-이미지입니다. 액션을 중심으로 굴곡지는 세계, 이제 이 공간은 액션을 거쳐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게 되죠.

* 감화-이미지: 이러한 지각-이미지와 그것이 촉발한 행동-이미지는, 그러니까 세계와 나의 작용 반작용은 나의 신체에 흔적을 남깁니다. 체험(액션)이 신체 내부에 남긴 흔적이 바로 감화-이미지입니다. 뒷모습으로, 벌벌 떠는 손은 세계를 신체가 어떻게 견디고 소화하고 있는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의 내면의 표정이 들뢰즈가 말하는 '얼굴화'된 것들입니다. 세계가 남긴 흔적! 전 이 표현이 넘넘 맘에 들었어요. 저도 세상에 남은 이런저런 흔적을 찾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표정이 흔적일거란 생각은 해본 적 없는데 이렇게 들으니 재밌었어요.

# 질문-이미지(?)

들뢰즈는 베르그손이 패치워크같이 세상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영화는 세계를 재현하는게 아니라 단면 단면의 이미지를 통해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데, 그래서 영화 자체가 하나의 세계라고 합니다. 행동을 하면서 세계를 구부리고 그 구부러진 단면을 지각하고 그 내부 지각의 점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 그러면서 살고 있는 거라네요. 물질세계가 작동하는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영화이므로 들뢰즈가 말하는 영화는 상상이 아닙니다.

영화가 이런 세계를 보여준다면, 질문은 여러가지로 이어집니다. 이 Body가 절단한 세계는 어떤 모습인가? 그 절단면을 가지고 또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세계에 개입하는가? 상호작용이 Body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가? 영화가 보여주는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내가 절단한 것이 전부가 아닌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 있다는 건데, 내가 절단한 방식이 세계의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는게 예술인걸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내 세계를 다르게 취하여 생성, 변환하며 활동반경을 넓힐건가요? 자명하다고 믿고있는 사실에 질문을 던지는 일, 세계가 뭐야? 왜 난 이것을 이런 방식으로 지각하지? 왜 이걸 이런 시선으로 포착하지? 를 질문하는 게 예술인걸까요?

채운샘은 있다, 없다의 세계가 아니라 생성,소멸의 세계라고 하셨는데 이 부분이 아직도 어렵습니다. 저는 너무 오랫동안 있다, 없다라는 축으로만 제 세계를 절단해왔나봐요. 그리고 집에 오며 예슬언니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제가 궁금했던 지점은 왜 활동반경을 바꾸고(혹은넓히고) 계속 다른 세계를 취해야하는걸까? 하는 점입니다. 카프카 소설에서도 자꾸 활동 반경을 넓힌다, 방향을 바꾼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게 또 안락함에서 아주 멀어지는 일이라고 나오거든요. 안락함, 편안함을 내던져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편한게 좋은게 아닐까요? 그럼 좋다는건 뭘까요.. 정말 질문이 끝이 없네요 그리고 답은 하나도 안나오네요 (ㅋㅋㅋ) 들뢰즈가 아직도 저에겐 멀지만, 패치워크같은 세상이라는 비유는 꼭 와닿았습니다. 같은 책을 읽어도 전에 읽었을 때랑 지금 읽었을 때 보이는 부분이 다르듯이, 예전엔 졸며 보던 영화가 나중에 나를 눈물흘리게 하는 일도 있듯이 그 시점시점마다 내가 절단해낸 세상, 그래서 내 눈에 들어오는 세상, 내가 구부리는 세계, 그 세계가 나에게 남기는 흔적이 다른가봐요. 사람이 정말 다 다르구나 하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그냥 사람이라고 편리하게 부르고있지만 각자 아예 다른 우주인거구나, 싶기도 했어요. 제가 아닌 존재에게 보이는 세계의 모습이 궁금합니다. 그래서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하는걸까요?

겨울의 문턱에 시작한 영화, 들 세미나였는데 어느덧 봄바람이 불고 해가 길어졌네요. 그 시간 동안 그리고 지금도 쉬지않고 세계를 구부리고 세계에 의해 구부러지고 있는 우리, 남은 시간도 잘 움직여봅시다! 그럼 다음 시간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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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22 10:28
    각자 다른 우주라니 넘나 멋진 표현이네요 ㅎㅎ 보영샘 질문들 같이 얘기해봐도 재밌을거 같아요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