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천개의 고원> 읽기 시즌3ㅡ3강(10.7)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10-13 22:28
조회
174
1. 얼굴 지우기

우선 지난 시간에 이어서 ‘얼굴’ 개념에 관한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얼굴’ 개념을 통해서 들뢰즈-가타리는 언어적 차원을 뒷받침하는 동시에 교차하면서 언어적 차원을 확장시켜주는 표현적 차원을 문제 삼고자 했다고 합니다. 왜 이러한 차원을 사유하는 것이 중요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언어활동에 동반되는 신체성을 사유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언어 자체’를 중립적인 것으로 생각하곤 하죠. 그 자체로 올바른 표현과 그릇된 표현이 있다는 생각. 혹은 말 자체를 따로 떼어 놓고 분석해서 그 객관적인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생각. 이런 생각은 언어가 언어적 지층임을 보지 못하도록 합니다.

들뢰즈-가타리에게 언어와 얼굴을 함께 사유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특정한 의미생성과 주체화를 강요하는 권력배치물과 다르게 관계함으로써 주어진 언어적 지층으로부터 도주하는 일입니다. 모든 것은 배치 속에서 의미화된 상태로서 존재합니다. 따라서 특정한 영토로부터 도주한다는 것은 곧 특정한 의미작용의 체계에 균열을 일으킨다는 뜻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들뢰즈-가타리는 언어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 그 자체로 권력의 생산물이기도 한 ‘얼굴’의 차원을 함께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겠죠.

언어는 그것을 특정한 의미로 고정시키는 얼굴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얼굴이란 무엇일까요? 들뢰즈 가타리는 얼굴을 흰벽과 검은 구멍을, 모든 의미가 되튀는 흰 벽과 그것에 빨려 들어가 주체성을 형성하도록 하는 검은 구멍을 만들어내는 체제라고 정의합니다. 언어의 의미가 아무렇게나 분기하지 못하도록 막는 의미작용의 체제(흰 벽)와 주체를 형성하는 점으로 기능하는 검은 구멍. 이러한 ‘얼굴성’이라는 추상기계는 나무를 형성합니다. 부모의 얼굴, 학생의 얼굴, 군인의 얼굴, 경찰의 얼굴, 노동자의 얼굴, 부자의 얼굴 등등, 얼굴은 기표와 주체를 연결하고 조건 짓습니다.

따라서 얼굴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오를랑이라는 프랑스 예술가는 서구의 미적 기준으로 여겨져 온 비너스의 턱과 프시케의 코, 유로파의 입술, 다이아나의 눈, 모나리자의 이마를 그대로 본 따 성형수술을 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고 합니다. 얼굴은, 그리고 우리의 얼굴에 덧씌워진 미적 기준들도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 얼굴은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산물이며, 그 자체로 전쟁터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거겠지요.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얼굴 기계는 우리의 굴복과 예속의 척도입니다. 예를 들어, 얼마 전 민호가 제게 ‘아저씨’가 된다는 것, 적당히 되는대로 질문을 회피하고 겪을 것을 겪지 않으며 어느새 나이가 들어버린 고집스럽고 무신경하며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전형적 아저씨가 되어버리는 것의 공포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요. 말하자면 이때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예속’이라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전형적인 아저씨의 얼굴성을 갖게 되는 일과 비슷한 무엇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젊음의 표상에 집착한다고 해서 ‘아저씨의 얼굴’로부터 달아나 얼굴을 지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일 것입니다.

주체를 지운다는 것, 얼굴을 갖지 않는 것은 ‘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점에 갇히지 않고 계속 선을 그리는 문제와 관련됩니다. 점에 갇히지 말고 선을 그리기. 들뢰즈-가타리가 ‘얼굴’에 대립시키는 개념은 ‘탐색하는 머리’입니다. 얼굴을 갖는 것이 아니라 탐색하는 머리를 구성한다는 것은, 어떤 한 가지 표상에 갇히지 않고 모든 것을 향해 열려 있는 감각을 만들어내는 것을 뜻한다고 채운샘은 말씀하셨습니다. 유연한 신경, 열려있는 감각을 갖기. 매번의 새로운 순간들, 유일무이한 정보들을 구태의연하게 처리하는 우리의 감각을 문제 삼기. 기체적인 정신을 구성하기. 이것이 들뢰즈-가타리가 생각하는 철학의 목표입니다.

2. 선들의 유형학

이번 주 강의에서 주로 다뤄진 여덟 번째 고원은 ‘선’들에 관한 챕터입니다. 여기서 들뢰즈-가타리는 헨리 제임스, 피츠제럴드, 피에레트 플뢰티오의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단편 소설들을 분석하며 세 가지 유형의 선들에 대해 말합니다(제목에 적힌 1874년이라는 날짜는 단편소설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바르베 도르비유의 <진홍색 커튼>이 발표된 날이라고 합니다). 견고한 분할선과 유연한 분할선, 그리고 도주선이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 유형의 선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도주선입니다. 도주는 ‘지층’만큼이나, 《천개의 고원》 강의를 듣는 동안 자주 접하게 되는 말이죠. 채운샘은 이번 기회에 도주에 대해서 설명해주셨는데요. 도주란 결국 리좀이라고 합니다. 도주는 이분법적 수목체계를 교란시키는 리좀입니다. 즉 이거냐, 저거냐라는 선택지를 벗어나 ‘사이’로 가는 것. 길을 잃은 곳에서 새로운 길을 내는 것, 두 항을 가로지르는 선을 그리는 것이 도주입니다. 들뢰즈-가타리의 관점에서 ‘정치’라는 것도 이러한 ‘도주선 그리기’에 다름 아닙니다. 친일/애국, 진보/보수, 좌/우 같은 선택지에서 올바른 항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를 교란시키는 사유들과 실천들을 만들어내는 것. 이를 들뢰즈-가타리는 ‘미시정치’라고 부릅니다(미시정치에 관해서는 다음시간에^^).

그런데 도주선이라는 개념에서는 ‘도주’라는 말이 중요한 만큼이나 ‘선’이란 말도 중요합니다. 이때 ‘선’은 ‘점’에 반하는 개념입니다. 점은 그 자신의 본질을 지닌 채 고립되어 있는 실체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아무리 서로 가깝게 이어 놓아도 ‘선의 운동’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선이란 바로 독립된 점들을 미리 전제한 상태에서는 사유할 수 없는 이행 중인 것으로서의 현재, 운동, 차이를 나타내는 개념입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세계를 선들의 운동으로 사유합니다. 연결과 접속만이 있는 세계.

채운샘은 이를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을 가지고 설명해주셨습니다. 영화는 한 사무라이의 죽음을 다룹니다. 그런데 사무라이의 죽음을 두고 사무라이 자신. 사무라이의 아내, 사무라이를 죽인 산적의 해석이 엇갈립니다. 어떤 욕망, 충동, 해석의 운동 속에서 계열화되느냐에 따라서 ‘사무라이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자결’로, ‘살인’으로, 결투를 통한 ‘정당방위’로 출현합니다. 즉 선들의 운동 이전에 독립된 ‘점’으로서의 사건이란 없다는 것이죠.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중 시위 장면도 보여주셨습니다. 그 장면에서 채플린은 트럭이 떨어트린 깃발을 찾아주려다 얼떨결에 시위대의 선봉에 서게 되고 시위의 리더로 오인 받아 잡혀가게 됩니다. 떨어진 깃발을 찾아주려는 채플린의 행위가 어떤 선의 운동 속에 놓이느냐에 따라서 예상치 못한 의미로 출현하게 됩니다. 더 흥미로운 이야기는 코미디언들의 걸음걸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찰리 채플린과 자크 타티, 버스터 키튼 등의 코미디언들은 언제나 자신의 걸음걸이를 통해 양적인 빠름/느림으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어쩌면 사유의 문제도, 예술의 문제도, 삶의 문제도 가장 정확하고 올바른 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선을 그리는 데에 있는 게 아닐까요?

들뢰즈-가타리는 앞서 말씀드린 세 가지 단편 소설들을 분석하면서 선들을 세 가지로 유형화합니다. 우선 견고한 분할선이 있습니다. 견고한 분할선은 시작과 끝을 갖는 선입니다. 철저하게 1대1로, 기브 앤 테이크로 이루어진 관계나 대화를 상상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떠한 이탈도 변주도 없이 출발점과 도착지를 왕복하는 선. 이는 수목적 선입니다. 두 번째로 유연한 분할선이 있습니다. 이 선은 “해석을 요청하는 침묵들, 암시들, 함축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위에는 미리 결정된 정체적 관계를 벗어나는 흐름들과 입자들이”(채운샘 강의안 6쪽) 있습니다. 채운샘은 시가 그리는 언어의 선을 예로 드셨습니다. 언어적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단순히 기표-기의 관계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해석의 선들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 시의 언어죠. 마지막으로 도주선입니다. 도주선은 ‘그리고’를 창출하는 선입니다. 어디서든 접속할 수 있는 선. 중요한 것은 이들이 도주선을 보다 선차적이고 근본적인 차원의 선으로 이해한다는 점입니다. 도주선은 모든 선에 내재한 이탈의 잠재성입니다. 절편을 용인하지 않고 벽을 꿰뚫고 검은 구멍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영토를 이탈하는 절대적 탈영토화의 선이 바로 도주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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