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천개의 고원> 읽기 시즌3ㅡ4강(10.14)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10-20 14:27
조회
144
이번 주에는 미시정치와 파시즘을 다룬 아홉 번째 고원을 탐사해보았습니다. 아홉 번째 고원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절편성/선분성’이라는 개념을 하나의 렌즈로서 제시합니다. 이들이 말하는 절편이란 말 그대로 양끝점이 있는 선입니다. 절편성은 중앙 집권화된 국가장치나 전문화된 정치제도가 없는 원시사회를 설명하기 위한 민속학의 개념이라고 합니다. 원시사회에는 중심화하는 권력이 아니라 공간, 시간, 관계를 분절하는 절편들이 있습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이 개념을 가져와서 현대사회를 설명합니다. “현대의 정치 체계는 스스로 통합되고 다른 것을 통합하는 포괄적인 전체”이지만, “병치되고 겹쳐지고 정돈된 하위 체계들의 집합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399)있다고 들뢰즈-가타리는 말합니다. 그러니까 원시사회의 절편성을 현대사회의 국가장치가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들을 공명하게 하는 ‘공명장치’로서 현대 국가는 “자신이 부양하거나 지속시키는 절편들 위에서 작동할 뿐 아니라 제 안에 나름의 절편성들을 소유”(399)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곳에서 모든 방향으로 절편화”(397)됩니다. 우리의 체험은 “거주하기, 왕래하기, 노동하기, 놀이하기 등” 공간적·사회적으로 절편화되고 “거리는 마을의 질서에 따라 절편화”되며 공장은 “노동과 작업의 본성에 따라 절편화”됩니다. 또 “사회 계급,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등 거대한 이원적 대립에 따라 이항적으로 절편화”되는가 하면, “나의 일, 내 동네의 일, 도시의 일, 나라의 일, 세계의 일”으로 점점 확대되는 원들 안에서 원형적으로 절편화되고, “하나의 직선 위에서, 여러 직선 위에서 선형적으로 절편화”(397)됩니다. 우리는 다양한 절편들을 가로지르면서, 그때마다 다른 행위와 주체성을 요구받습니다. 학교는 우리에게 “너는 더 이상 가족에 있지 않다”라고 말하며 군대는 “너는 더 이상 학교에 있지 않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절편에도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견고한 절편성(나무화된 절편성)과 유연한 절편성(리좀적인 절편화 작용). 전자가 거대한 이항기계에 의존하는, 중앙집중을 보증하고 가능성을 격자화하는 절편성이라면 후자는 다양체들의 결과로부터 생긴 절편성입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전자를 ‘그램분자적’ 절편성이라고, 또 후자를 ‘분자적’ 절편성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때 ‘그램분자적’이라는 말은 ‘척도화된’, ‘양화된’이라는 뜻이고 ‘분자적’이라는 말은 ‘양화할 수 없는’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전자는 인종, 계급, 세대, 성(性) 등의 인식가능한 범주들의 차원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그러한 항들 사이를 오가며 균열과 변이를 야기하는 미시적인 흐름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전자를 ‘거시정치’의 차원으로, 후자를 ‘미시정치’의 차원으로 구분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은 견고환 절편성과 유연한 절편성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채로 뒤얽혀 있다는 데 있습니다. “남녀 양성은 다양한 분자적 조합을 이루며, 여기에 여자 안의 남자나 남자 안의 여자뿐만 아니라 남녀 각각이 상대방의 성 내부에서 동물이나 식물 등과 맺는 관계도 포함”됩니다. 또한 견고한 절편성으로서의 사회계급은 특정한 척도로부터 빠져나가는 군중들과 연관되어 있는데, “군중이라는 개념은 계급이라는 그램분자적 절편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절편화 작용의 유형을 통해”(406-407) 나아갑니다. 미시적 차원의 흐름들은 언제나 다시 거시적 차원으로 재영토화되고, 견고한 절편성 또한 언제나 이탈하는 흐름들을 재전유할 필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누구보다 절실히 창의력을 필요로하는 절편화된 기업).

모든 것은 정치적입니다. 우리의 미시적 차원의 욕망들은 이미 거시정치의 영역과 관계 맺고 있으며, 견고한 절편성들은 빠져나가는 흐름들을 끊임없이 다시 포획함으로써만 기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정치라는 것을 단지 ‘현실 정치’의 영역에 가두어두거나 혹은 계급, 성, 인종 등 특정한 정치적 문제를 다른 것들과 단절된 독립적인 무엇으로 특권화해서는 안 됩니다. 견고한 절편성과 유연한 절편성이 뒤섞이며 작동하고 있는 배치를 살펴야합니다.

아무튼 들뢰즈-가타리의 관심은 ‘미시정치’입니다. 물론 이때의 미시정치란 거시정치의 차원과 무관한 무엇이 아니라, 거시적 차원과 뒤섞여 있으면서도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차원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정치’의 문제를 “국지화하기 힘든 관계들로서의 입자나 흐름들에 관련되는 차원”(채운샘 강의안 3쪽)에서 사유함으로써 이들이 제시하는 정치의 이미지는 무엇일까요?

들뢰즈-가타리에게 정치란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투표하고, 공공사업을 벌이는 등등의 일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자크 랑시에르는 우리가 흔히 ‘정치’리고 부르는, 앞서 말한 이러한 모든 활동들을 “행위의 양식들, 존재의 양식들, 말하기의 양식들의 나눔을 결정하는”(<불화>) ‘치안(police)’의 활동이라고 말했습니다. 들뢰즈-가타리에게나 랑시에르에게나 정치의 문제는 이러한 나눔의 질서를 파열시키고 방해하고 해체하는 행위와 관련됩니다. 이들이 말하는 ‘미시정치’는 “거시정치를 휘저으며 달아나는 지속적 운동”(채운샘 강의안 4쪽)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들뢰즈-가타리는 ‘어떻게 더 좋은 사회를 만들 것인가?’라고 질문하지 않습니다. 거시적인 차원에서의 억압이나 착취에 맞서 싸우며 더 공정한 나눔의 질서를 만드는 것도 이들이 이해하는 ‘정치’에 있어서 핵심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혹은 우리를 분절하는 절편상들을 좀 더 유연하게 하는 문제도 아닙니다. 문제는 결국 도주입니다. 채운샘은 루쉰의 예를 들어주셨습니다. 루쉰은 ‘혁명’을 ‘재현’하는 혁명문학에 반대했습니다. 즉 ‘정치적인 것’의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것은 루쉰에게는 전혀 혁명적 활동이 아니었던 것이죠. 혁명적인 지식인이 되기 위해서는 ‘혁명적인 것’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혁명적으로 되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좌익문필가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은 “쁘띠부르주아 작가가 자신이 속한 계급에 반발하거나 쁘띠부르주아지에 대해 폭로적 성격을 띤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전부입니다. 자신의 조건 속에서 자신의 도주선을 발명하는 것.

정치를 바라보는 이러한 관점에서, 들뢰즈-가타리가 제기하는 ‘정치적인’ 질문은 바로 ‘욕망은 왜 스스로 억압되기를 바라는가, 욕망은 어떻게 자신의 억압을 바랄 수 있는가?’라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부터 제기되어온 질문입니다. 즉 가장 정치적인 문제는 제도를 개선하고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기 이전에 타인과 자신의 억압과 죽음을 향하는 욕망의 역설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천개의 고원》에서 이들은 이러한 욕망의 역설을 ‘미시파시즘’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이 말하는 파시즘은, 흔히 이해되는 것처럼 ‘전체주의’를 의미하지도 않으며 특정한 극우 세력들에 국한된 것도, 인종주의와 같은 그릇된 사상에만 깃들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말 그대로, 이들이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미시적 차원의, 욕망의 차원의 파시즘입니다. 그것은 타자의 죽음,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죽음을 욕망하는 욕망의 역설을 뜻합니다.

따라서 농촌의 파시즘, 도시의 파시즘, 젊은이의 파시즘, 퇴역 군인들의 파시즘, 좌익 파시즘, 우익 파시즘, 커플과 가족과 학교의 파시즘 등이 있습니다. “자기가 유지시키고 배양하며 극진히 여기는 자기 자신인 파시스트,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분자들을 갖고 있는 그러한 파시스트를 보지 않으면서 그램분자적인 층위에서 반-파시스트가 되기란 참으로 쉬운 일”(410)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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