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천개의 고원> 읽기 시즌2ㅡ5강(10.21) 후기

작성자
한역
작성일
2019-10-23 23:56
조회
160
이번 주에는 열 번째 고원을 탐사했습니다. 열 번째 고원에서 다뤄지는 개념은 ‘되기’입니다. 여기서 ‘되기’라는 개념은 영어로 Become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Become은 보통 두 가지로 번역됩니다. 하나는 어떤 사물이 생겨나거나 완성되어간다는 의미에서 ‘생성’인데, 생성이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변화의 뉘앙스를 온전히 감지하기 어렵습니다. 하나의 씨앗에서 열매를 맺고 꽃이 피는 과정을 생성 중에 있다고 여기긴 쉬워도, 꽃이 지고 열매가 떨어져 ‘멸’하게 되는 과정까지를 생성의 차원으로 여기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Become은 또한 앞서 언급했던 ‘되기’라는 말로 번역됩니다. 그런데 이때 ‘되기’라는 단어에서 ‘~로 되기’라는 어감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무엇이 된다’는 목적지향의 뉘앙스를 갖고 ‘되기’를 이해하는 것도, 씨앗이 겪는 변화를 ‘꽃’이나 ‘열매’로 되기 위해서로 오해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Become은 역자의 판단에 따라서 ‘되기’나 ‘생성’ 외에 ‘변용’이라는 말로 옮겨지기도 합니다.

이번 고원에서는 늑대인간, 흡혈귀 같은 괴물들이 ‘되기’와 ‘생성’의 사례로 언급되었습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그리스 시대 도기에 그려진 늑대인간 그림을 봤습니다. 보통 늑대인간이라고 하면, 음기 가득한 달밤 속에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우왁스러운 포즈를 취해야할 것 같은데, 도기에 그려진 늑대인간은 허리에 양손을 얹고,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보디빌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도기 속 늑대인간의 그림에서 어딘가 부도덕한 느낌을 찾기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보름달에 늑대로 변신하는 인간을 고대 그리스에서는 역량의 표현으로 보았습니다. 쉽게 말해서 변신할 수 있는 존재는 능력자입니다. 신화 속에서 제우스는 인간 여자와 연애를 할 때 어떤 자연물로든 변신할 수 있는 힘을 보여줍니다. 제우스가 신들의 신으로 인정받았던 이유에는 그러한 변신 능력이 있었습니다. 반면, 중세에서 변신은 주로 악하고 미신적인 능력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늑대인간을 비롯한 괴물에 대한 악마적 이미지는 변화 가능성에 대한 중세 기독교 사회의 부정적인 낙인과 함께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미시파시즘을 다뤘던 고원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정치적 질문은 ‘어떻게 더 좋은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좋은 사회를 상정하는 우리의 욕망은 어떻게 목적지향적인 중심(수목적 절편화 작업)을 통해 견고해지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욕망은 어떻게 억압과 죽음을 원하게 되는가를 문제로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중앙 집권적인 질서 체계로부터 도주하기 위한 혁명적인 힘을 어떻게 발명해야 할까요? 가타리는 ‘분자혁명’을 말합니다. 이때 혁명은 기존의 체제의 문제점을 보완한 대안적 체제를 요청하지 않습니다. 분자혁명은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영역’, 또 다른 시스템의 요청으로 환원되지 않는 힘들의 구성입니다. 가타리는 현 시대의 자본주의 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말합니다. “자본주의 권력은 경제영역 안에서 그리고 계급의 종속을 통해서 실행될 뿐만 아니라, 경찰, 감독관, 교사, 교수를 통해서 실행될 뿐만 아니라, 제가 모든 개인의 기호적 예속이라 부른 또 다른 전선에서도 실행된다는 사실에서 시작합니다. 아이들은 텔레비전에서, 가족을 통해서, 보육원에서 자본주의적 대상과 관계를 인식하게 됩니다.” (<분자혁명>)

가타리는 ‘기호적 예속’이라는 개념으로 자본의 흐름이 어떻게 일상에서의 미세한 부분들에서 우리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작동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최근에 학교에서는 일찍부터 아이들에게 돈을 어떻게 경제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지를 배운다고 합니다. ‘합리적 소비’에 대한 교육은 저축에 관한 관념을 심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투자나 재테크를 통해서 수중에 있는 용돈을 어떻게 불릴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기도 합니다. 돈에 대한 감각을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방식으로 코드화하는 과정이 가타리가 말하는 ‘기호적 예속’의 사례입니다. 기호적 예속은 자본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방식으로 일상에서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킵니다. “제가 기호화라고 부르는 것은 지각에서, 공간운동에서, 노래 부르기, 춤, 흉내, 애무, 접촉에서, 신체와 관련한 모든 것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기호화 양식은 지배언어로, 전체적인 발언생산과 자신의 통사적 규칙을 조정하는 권력언어로 환원됩니다. 학교나 대학에서 배우는 것은 본질적으로 내용이나 자료가 아니라 일정한 사회적 카스트에 적합한 행동모델입니다.”(<분자혁명>)

그런 의미에서 기호적 예속에 저항하기는 우리가 일상에서 이 세상을 지각하고 느끼는 세세한 방식을 신중하게 살피는 과정이 됩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다니엘 벤사이드의 저항론은 특정한 권력자를 향한 것도, 인민이나 프롤레타리아트와 같은 계급적 이름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저항은 언제 어디서나 권력의 중심을 겨냥한 원리 원칙을 따르는 실천이 아닙니다. 저항은 우리가 처한 상황 논리에 따라 언제든 다양한 형태로 펼쳐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어떤 사안에 대해 분개하고, 토론에서 합의된 주장을 중앙 정부에 청원하는 방식에 갇히지 않는 저항이 가능한 것이죠. 다니엘 벤사이드가 말하는 저항 방식은 두더지 게임의 양식과 닮아있습니다. 언제 어느 표면에서 두더지가 튀어나올지 모르듯이, 그에 맞춰 우리의 몸을 비틀고, 시야를 옮겨야하는 수고들이 요구됩니다. 특정한 광장에서 권력자를 비판하는 구호를 함께 외치는 것만으로 ‘저항’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해 파졸리니는 68혁명에 참여했던 학생들의 모습에서 이들의 구호가 언제든지 기득권의 논리를 전유할 수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부잣집 아들의 얼굴을 한 그대들. / 좋은 피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 그대들은 하나같이 못된 눈길을 지녔고 겁쟁이에 우유부단하고 좌절한다. / (완벽해!) 그러나 그대들은 알고 있다 / 어떻게 자신감에 찬 지배자가 되고, 공갈범이 되는지” (피에르 파졸리니, <사랑하는 학생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증오한다.>)

들뢰즈에게 혁명과 저항은 ‘소수자-되기’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처해있는 정치적 지평에서 미리 주어진 선택지를 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바로 그 정치적 지평에서 선택지를 제시하는 분할선 자체를 문제 삼기. 정치를 감각하는 다수적인 방식에서 벗어난 질문을 던지기. 여기서 소수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수량적으로 적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곤충이 인간보다 수가 많지만, 모든 가치에 인간 중심주의가 하나의 척도로 통용되는 인간들의 현실 세계에서 곤충은 소수적 존재에 불과합니다. ‘다수적’이라는 말에는 우리에게 관습적이고 익숙한 방식의 힘-관계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수자-되기는 주류적인 가치와 표준화된 척도에 포획되지 않는 여러 시도를 포함합니다. 들뢰즈에게 ‘되기’를 추동하는 문제는 중심에서 주변으로 향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들뢰즈에게 ‘되기’는 가장자리에서 중심으로 들어가, 다수적인 가치를 전복하는 감각의 변이를 경험하는 문제와 밀접합니다. 들뢰즈/가타리의 ‘동물-되기’는 단지 특정한 동물의 형태를 모사하고 재현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동물-되기는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기존의 힘-관계가 다른 힘과의 접속을 통해 이전과 다른 역량을 드러내 보이는 과정입니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플라이>는 물질전송기에 의해서 파리 유전자가 섞인 과학자가 ‘인간도 파리도 아닌 존재’로 변해가는 과정을 강렬한 이미지로 표현한 영화입니다. 영화에는 물질을 구성하는 정보(유전자)가 전송되는 기계에 이질적인 것이 개입할 때, 이것은 어떻게 ‘지각 불가능한’ 변용을 초래하는지에 관한 물음이 담겨있습니다. ‘되기’의 핵심은 이질적인 것과의 결합, 접속, 전염, 감염을 통해 미지의 항(X)을 출현시키는 것입니다. H.P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은빛 열쇠의 문을 넘어서>은 랜돌프 카터라는 이름의 마법사가 주인공입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고정된 자아의 차원을 넘어가는 다차원의 경험을 통해 변이와 생성에 이르는 대목이 있습니다. 여기서 ‘마법’이라는 모티프 역시 하나의 물질이 다른 물질로 변신하고 변화한다는 점에서 ‘되기’와 연결됩니다.

“그는 동시에 여러 곳에 있었다. 1883년 10월 7일 지구, 랜돌프 카터라는 소년은 고즈넉한 저녁 빛을 받으며 뱀굴을 나와 험준한 비탈을 뛰어내려오고 있었다. (...) 그러나 그 똑같은 시간, 좀 더 정확하게 1928년의 그때 랜돌프 카터의 모습을 한 그림자가 지구 외부에서 초고대인들과 함께 대좌에 앉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3의 랜돌프 카터는 최종 관문 너머 형체 없는 미지의 우주 심연에 있었다. (...) 카터의 분신들은 인간과 비인간, 척추동물과 무척추동물, 지적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 동물과 식물 등 여러 가지 형태를 띠고 있었다. 게다가 그 중에는 인간의 삶과는 딴판으로, 낯선 행성과 체계, 은하와 우주 공간을 종횡무진하는 카터의 분신도 있었다. 죽지 않는 포자의 형태로 세계에서 세계로, 우주에서 우주로 떠다니는 그들은 모두 카터 자신이었다.” (<실버 키의 관문을 지나서>, 전집3)

‘되기’의 차원에서 가상과 실재는 따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실재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임시적 세계의 연속, 복잡다단한 실재를 구성하는 코드의 조합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0과 1의 코드들이 조합하는 방식에 따라 디지털 이미지가 현상되듯, 동양 철학에서는 음양의 조합 방식에 따라 세계가 만들어진다고 이해합니다. 중요한 것은 코드의 배치입니다. <플라이>에서 인간 유전자와 파리 유전자의 조합으로 탄생된 ‘파리-인간’은 이것의 중심이 ‘인간’인지 ‘파리’인지 헷갈리게 만듭니다. 이처럼 ‘아웃사이더’(=특이자)는 우리의 중심적인 가치를 의심하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들뢰즈/가타리의 ‘동물-되기’는 인간이라는 단일한 종種의 정체성에 갇힐 수 없는, 인간적인 가치에서 벗어난 생성의 차원을 긍정하는 기획입니다. 카프카의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아들-갑충(<변신>)과 원숭이-인간(<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또한 하나의 중심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체이자, ‘되기’의 표현물입니다. ‘되기’는 고정된 단일한 정체성에서 빠져나올 역량을 어떻게 구성하고 현실화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해주는 개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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