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천개의 고원> 읽기 시즌2ㅡ6강(10.28)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11-01 03:04
조회
248
지난주에 이어서 이번 주에도 ‘되기’ 개념을 공부했습니다. 지난주에 채운샘은 응조권부터 크로넨버그의 영화 《플라이》까지 다양한 예를 들어서 ‘되기’란 ‘~처럼 되기’가 아니라 ‘생성’이며 여기에서 핵심적인 것은 이질적인 것과의 접속을 통해 미지의 항을 출현시키는 일임을 강조하셨죠. 이번 주에는 어째서 되기란 항상 ‘소수적인 것-되기’(여성-되기, 동물-되기)일 수밖에 없는지에 관한 설명으로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들뢰즈-가타리는 페미니스트인가? 혹은 동물 애호가인가? 여성-되기, 동물-되기라는 그들의 개념을 처음 접하면 이런 질문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되기란 생성이라고 해놓고, 이들은 왜 남성-되기나 인간-되기란 불가능하다고 하는 걸까요? 남성과 인간도 부단한 생성 속에 있기는 마찬가지인데 말이죠.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그것은 우선 남성이 유달리 다수적인 반면, 생성들은 소수적이며, 모든 생성은 소수자-되기이기 때문”(550)입니다. ‘남성’, ‘인간’이라고 할 때 이들이 가리키는 것은 남성 일반, 인간 일반이 아니라 수목적 질서를 체현하고 있는 표준적이고 다수적인 항으로서의 ‘남성’과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들뢰즈-가타리가 문제 삼는 것은 영토로부터 달아나는 움직임들을 봉쇄하는 규범적 척도로서의 남성, 인간입니다. 따라서 남성들의 생성은 무궁무진할 수 있지만 남성-되기란 있을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수많은 익명의 아저씨들을 마주할 때면 여성-되기라는 문제를 더 없이 가깝게 느끼게 됩니다. 도처에 ‘아저씨’라는 말이 그 자체로 그의 존재규정인 것처럼 보이는 남성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지위와 직함, 권력, 돈, 나이 등등의 영토에 스스로를 완전히 동일시해버린 존재들.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를 접하며 제가 좀 더 이해하게 된 것은, 이것이 단순히 그릇된(구시대적인?) 관념들을 내면화한 결과라기보다는 규범적 영토성으로부터 이탈하는 움직임들을 구성해내지 못한 결과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꼰대 개저씨(?)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단지 정치적 올바름을 따르는 것으로는 불충분할 것 같습니다. 정말로 여성-되기가, 남성적 영토들과 다르게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겠죠(‘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는 영화 제목(원래는 시 구절)이 새롭게 다가오네요).

이로부터 곧바로 따라 나오는 것은,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소수’란 다수성이라는 주어진 항과 마주하고 있는 소수성이라는 또 다른 항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여성-되기란 남성성의 반대항으로서의 여성성을 취하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소수-되기란 남성/여성, 정상/비정상, 어른/아이, 이성애/동성애 같은 이항분할자체로부터 달아나는 일을 말합니다. 이는 ‘발명’의 문제입니다. 여성을 흉내 내거나 상태로서의(즉 또 다른 영토로서의) 소수성을 특권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램분자적 여성성이 아니라 남성이나 여성 같은 항으로 환원되지 않는 분자적 운동을 구성하는 것. 들뢰즈-가타리에게 소수-다수의 문제는 영토와의 관계에서 달아나느냐 고착화되느냐의 문제입니다.

상태로서의 소수성에 머무는 한 우리는 새로운 항에 재영토화될 뿐입니다. 가령 최근 몇 년 사이에 다양한 대중매체에서 퀴어적인 코드가 일종의 트렌드가 되어가고 있는데, 들뢰즈-가타리의 관점에서 단지 이런 식으로 퀴어적인 코드를 소비하는 것만으로는 소수-되기에 가까이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좀 더 유연한 영토에 재영토화될 수 있을 뿐이겠죠. 자신의 성(性)과의 관계에서 다른 품행을 구성해낼 수 있을 때, 주어진 항들로 귀결되지 않는 선을 그릴 수 있을 때 그것을 소수-되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소수-되기는 다수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운동과 더불어 소수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운동 또한 구성합니다. 채운샘은 스피노자의 예를 들어주셨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유대인들은 배제의 대상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패쇄적인 공동체 안에 고립되었죠. 유럽인들에 ‘대해서’ 자신들의 견고한 영토성을 형성한 것입니다. 자신의 위험한(?) 철학 때문에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한 스피노자는 유럽인에 대해서 자신의 유대인성을 형성하지도, 반대로 유럽인에 동일시하는 방식으로 유대적인 것을 부정하는 길로 나아가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의 사유의 운동을 통해 고유한 실존의 양식을 구성해내는 방식으로 두 항 모두로부터 달아났습니다. 스피노자의 유대인-되기는 그가 마주하고 있던 유럽적인 것과 유대적인 것이라는 두 항 모두의 변환을 가져옵니다.

이처럼 되기는 언제나 이중의 운동을 구성합니다. 들뢰즈 자신의 작업이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예가 됩니다. 들뢰즈는 흄, 칸트, 스피노자, 니체 등 자신의 선배 철학자들에 대한 몇 권의 주석서들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때 들뢰즈는 그러한 철학자들에 ‘관한’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가령 지금 니체 마이너스 세미나에서 읽고 있는 《니체와 철학》을 예로 들자면, 들뢰즈는 니체로부터 ‘힘의 유형학’이나 ‘차이의 철학’이라는, 니체 자신이 정식화하거나 직접적으로 명시한 적이 없는 사유를 이끌어냅니다. 들뢰즈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자신의 선배 사상가들과 비역질을 해서 기괴한 사생아를 출산합니다. 니체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변환시키는 동시에 니체의 사상 또한 니체 자신조차 예측하지 못했을 방식으로 변형시키는 것이죠. A와 B가 접속해서 A도 B도 아닌 사유의 변형을 이루는 것. 이것이 되기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공동작업도 이러한 의미의 상호-되기라고 할 수 있겠죠.

‘되기’ 고원의 결론은 ‘음악-되기’라고 합니다. 음악-되기, 달리 말하자면 이는 지각불가능하게 되기입니다. ‘지각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말 자체가 너무 어렵고 심오하게 느껴져서 처음에 저는 왠지 자기 자신을 완전히 상실하거나 스스로의 신체를 해체해버려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채운샘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서 들뢰즈-가타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차원과 함께 사유하는 것’입니다. 지각가능하다는 것은 뭘까요? 우리는 A아닌 것들과의 구분 속에서 A를 실체화함으로써 A를 ‘지각가능한 것’으로 만듭니다. 예를 들어 살아 움직이는 것을 시체나 무생물과 대립시킴으로써 ‘삶’을 지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체화하는 사고를 초월하면 삶과 죽음은 대립되지 않습니다. 소멸이란 사실 생성의 중단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무언가로의 생성에 다름 아닙니다. ‘개체’를 고정된 실체로보는 관점에서 벗어나면 개체의 죽음은 다른 무엇으로의 변환(생성)에 다름 아니며 그런 점에서 죽음은 삶의 연속입니다. 역으로 개체의 삶은 끊임없는 소멸의 연속이기도 하죠.

죽음의 대립항으로서의 삶, 삶의 대립항으로서의 죽음은 ‘지각’ 가능합니다. 살아 움직이는 것을 ‘지각’하고 죽어서 스러져 있는 것을 ‘지각’하는 것으로 우리는 ‘삶’과 ‘죽음’ 각각을 ‘지각’하죠. 그런데 이러한 인간적인 대립을 벗어난 차원의 생/멸의 동시성은 ‘지각’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대상입니다. ‘지각’을 통해 하나의 항을 취하는 순간 우리는 항상 그에 대립되는 무언가에 대한 부정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각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은 A를 A가 아닌 모든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차원과의 관계 속에서 사유하는 것. 자기 자신을 자신이 아닌 모든 것과의 관계 속에서 감각하는 것. 이것이 지각불가능한 것-되기입니다. 여기에는 절대적인 긍정의 논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나타난 것들’을 절대화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나타난 것들을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그로부터 빠져나가는 운동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기. 수목적 사유는 언제나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문제 삼습니다. 있음/없음, 남성/여성, 삶/죽음의 이항적 분할 속에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죠. 여기에서는 다른 질문을 던지고 다른 사유를 구성하고 다른 삶의 양식을 발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와 반대로 리좀적 사유는 들뢰즈-가타리가 리좀, 도주, 분자적 운동이라고 부르는 ‘지각 불가능한’ 차원으로 자신의 사유를 열어냅니다.

이러한 ‘지각 불가능한’ 차원을 사유하기 위한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이 바로 ‘고른판’입니다. ‘고른판’이라는 말은 충분히 숙성된 반죽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라고 합니다. 거기에서 모든 것들은 평평하게, 어떠한 위계나 분할로부터도 자유로운 상태로, 어떤 방식으로도 현실화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닌 상태로 존재합니다.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하고 있는 평면. 평평한 평면 안에서 모든 것들이 결합될 수 있는 상태.

이는 스피노자가 신(즉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과 일치합니다. <윤리학> 1부 정리28번에서 스피노자는 고른판에 대한 사유를 구성합니다. 그 구절에서 스피노자는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모든 실재는 다른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다른 실재들에 의해 규정되지 않으면, 그러한 방식으로 실존하고 활동하도록 규정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즉 모든 개체는 자기 자신을 실존하도록 하는 원인으로서 자신이 아닌 모든 개체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죠. 스피노자가 그려 보이는 세계에서 어떤 것도 혼자서, 단독으로, 원자처럼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모든 것 속에서 모든 것에 의해 존재하는 우주. 스피노자는 그러한 변용하고 변용되는 관계 속에 있는 개체들의 무한한 우주를 신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리고 같은 것을 들뢰즈-가타리는 고른판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서 ‘신(전체, 자연)’은 그러한 실재들의 생산하고 생산되는 부단한 관계 속에서, 그러한 과정과 더불어 존재합니다. 따라서 양적 차원에서 개체(양태)는 유한하지만 생성의 차원에서 보면 무한(즉 신)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전체와 부분이 어떤 가림막도 없이 일치되는 차원으로서의 자연. 그것이 고른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위계나 분할도 미리 주어져 있지 않다면, 우리가 매순간 목도하는 이 무한한 ‘차이’들은 뭘까요? 어떻게 모두 신 안에 있으면서도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일 수 있는 걸까요?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 안에 있는 모든 복잡한 실재들은 운동과 정지, 느림과 빠름에 의해서만 서로 구별됩니다. 모든 유한한 실재들은 그 자체 안에 무한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한낱 먼지에도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우주 안의 모든 양태들의 운동들이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다만 (예를 들어) ‘인간’과 ‘모기’가 유지하고 있는 신체의 조성이 다를 뿐인 것이죠. 상대적으로 크고 작거나 우월하고 열등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에 자신을 존재하도록 하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맺고 있는 리듬과 속도가 다를 뿐입니다. 따라서 (채운샘의 예를 빌리자면^^;) 에프킬라와 마주칠 때 모기의 조성은 해체가 되는 반면 인간의 조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때 해체와 유지를 결정하는 것은 개체 자신의 본질이 아니라 개체가 자신 아닌 모든 것들과 유지하고 있는 상이한 거리들입니다. “삶이라는 이 유일하고 동일한 판 위에서 서로 부분이 되는 변양들의 무한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482-483)

이러한 조성,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관계에는 역량의 정도가 대응합니다. 얼마나 다양한 것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조성을 이룰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스피노자적이고 들뢰즈-가타리적인 의미의 역량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기 자신과의 자폐적 관계만을 고수함으로써만 자신의 조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역량의 최저상태를 나타냅니다. 반대로 ‘강렬함’, ‘내공’, ‘역량’이란, 누가와도 대응할 수 있는 힘, 다시 말해 낯서 것들과의 관계에서 유연하게 자기 자신의 조성을 변환시킬 수 있는 힘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완결된 조직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과 계속해서 합성을 이루면서 조성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역량의 강화, 스스로의 힘에 대한 긍정, 나아가 삶에 대한 긍정이라는 문제는 완전한 무엇에 대한 모방을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문제는 다양한 것들과의 마주침 속에서 자신이 유지하고 있는 조성을 변환시키는 일입니다. 여기에는 자기 자신의 실존을 좀 더 위험하게 다룬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식별 불가능한 것 되기, 한 번도 되어본 적 없는 것 되기. 이 공부가, 이 삶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지만 가보기!?
전체 1

  • 2019-11-01 16:26
    오호~ 소박한 깨달음에 이른 후기로군. "!?"가 좀 거시기하지만, 뭐 긍정적으로 열린 결말인 거스로...ㅋ